이 길고 긴 터널의 끝에는 광활한 우주

편집위원 지오

by 문우편집위원회


*자살이나 자해, 소진에 관한 이야기가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심한 우울감을 느끼거나 자살 및 자해충동을 느끼시는 분들은 읽지 마세요.


*지면으로 발간된 글을 다시 읽고 어색한 문장과 표현을 일부 고쳤습니다.



맴도는 이야기들


한참을 건너뛰다가 오랜만에 생리를 시작한 날이었다. 첫날에는 늘 생리통으로 몸져 눕는 나는 그날도 다르지 않게 침대에 누워 밀린 과제들을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잔뜩 쌓기 시작했다. 한 단체 채팅방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학교에서 벌어진 부당한 일에 맞서 싸우는 일로 처음 만났던 공동체 P의 방이었다. 어쩌다보니 지금은 다함께 모여 만두 빚고 김치 담그고 전시회를 보러 다니고 슬픈 일이 있을 때는 위로주를 들이키고 아픈 구성원을 살피는 모임으로 바뀌어버렸지만. A의 일이니 경찰서로 와달라는 그의 하우스 메이트 Z의 다급한 요청이 있었다.


겨울에 비니를 쓰면 도토리 요정처럼 매우 귀여워졌던 A는 생긴 것과 다르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용맹하고 불같은 성격을 지녔고, 그래서 때로 남들과 부딪히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이 녀석이 드디어 사고를 쳤구나!’라고 생각했다. 사건이 해결될 때쯤 진통제가 들기 시작할테니 A와 Z의 집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마음 한편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을 애써 누르면서.


근처에 사는 친구 여러 명이 그 채팅을 보고 경찰서에 찾아갔을 것이면서 아무도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말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공들여 무시하고 있는 그 예감이 사실일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그 현장에 있을 것 같은 M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은 후 생리대를 챙길 정신머리도 없이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날이 한창 더워지던 여름날 나의 귀한 친구 A는 보고 싶은 친구들, 고마운 친구들 이름만을 수상소감 마냥 줄줄 적어놓은 유서 한 장만을 달랑 남긴 채 세상을 떠나 날아갔다.


A의 실종부터 장례식, 그리고 그 이후까지 세상은 용케 뒤집히지도 않고 너무 고요했다. 짧았던 그의 장례절차를 퉁퉁 부은 눈으로 지낸 후 나도 그 고요한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애썼다. 기말 리포트를 포기하고 싶을 때는 나의 일상이 무너지는 것을 A도 바라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되뇌며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씻는 것이, 설거지 하는 것이, 잠을 자는 것이 힘들어질 때도 그 말을 주문인 것처럼 외우고 다녔다. 때로 이 주문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그가 살아있을 적에 그의 우울과 불안을 온 힘을 다해 끌어안지 않은 내가 그의 죽음으로 무너지려 하는 것은 나의 게으름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휴대전화를 꺼놓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날도 아주 많았다. 연락을 통해 어느 종류의 새로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내가 예상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 바깥의 일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의 속도를 차분히 기다려준 나의 수많은 동료들과 선생님들, 이미 충분히 나를 염려하고 있음에도 나를 잘 돌보지 못하는 것 같다며 미안해하던 전 연인 D, 힘들 때면 언제든 찾아와도 된다며 사랑한다고 이야기해준 많은 친구들에게 뒤늦게나마 (아마도 닿지 않을 이 지면을 통해) 감사인사를 전한다. 나는 내가 A에게 베풀지 못했던 것들의 세례를 받으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공백을 기우기


나와 함께 그의 죽음을 가장 먼저 목도했던 P의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가짐을 털어놓으면 그들은 내가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가혹하게 군다고 이야기해줬다. 내가 마음껏 울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준 친구도 있었다. 만약 같은 일을 겪은 누군가가 비슷한 말을 한다면 나 또한 그들에게 그런 충고를 건넸을 것이다.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도 A의 죽음을 슬퍼하려는 나를 끊임없이 단죄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A와 내가 육성으로 나눈 마지막 대화는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가 총괄을 맡았던 프로젝트에 관련된 일이었고, 그가 한동안 휴식이 필요하다며 떠났다가 다시 복귀를 선언한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업무 통화를 할 여력이 되는지 물었고 그가 수락하자 휴대전화 넘어 그에게 이런저런 일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간 잘 지냈냐, 혹은 괜찮냐는 안부인사는 생략했다.


전화를 할때도 그가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나를 포함하여 아주 소수의 사람들 하고만 맞팔로우를 맺고 있는 계정에 A는 죽고 싶다는 이야기, 자해 충동을 억누르느라 얼음을 우둑우둑 씹고 있는 사진 같은 것들을 자주 올렸고, 술을 마시는 날도 잦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내가 그 아이와 알고 지낸 시간동안 일상적으로 보아 왔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도 했다. A는 늘 술을 좋아했고, 우리는 언제나 진심을 반쯤 섞은 채로 죽고 싶다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그래도 A는 되풀이되는 깊은 상실과 슬픔도 꿋꿋하게 잘 견뎌온 씩씩한 사람이니까, 무엇보다도 다른 친구들을 앞서 보내야만 했던 그가 더 이상 친구들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다며 나에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는 이번에도 우울에서 그만의 방식으로 헤쳐나올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전화를 끊은 뒤 이틀 만에 나를 보기 좋게 비웃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A가 나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당시의 나는 A가 가진 짐을 덜어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언젠가는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당장 내일 모레라고는 예상하지 않았고 그를 돌보는 일을 잠시 미루다가 내가 괜찮아졌을 때 그의 곁에 있어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슬픔, 애도, 원망, 죄책감... A의 죽음 이후 P의 사람들은 집단적이면서도 다양한 종류의 감정들을 느끼고 공유했다. 그리고 나는 그 주변에서 나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무기력증, 위염,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질환 같은 신체적인 반응이 복합적으로 나타났을 때에야 내가 그의 죽음을 아주 깊은 곳에서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그것을 꼭꼭 씹어 삼키기 위해 자살에 관한 각종 문헌이나 자살 사별자들에 관한 책들을 읽고 동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 모든 시도들은 실패로 끝나버렸다. 내가 접할 수 있는 그 어느 이야기에도 나와 비슷한 사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살예방센터라는 제도적 기관이 있는 한국에서 사회로 드러나는 자살의 서사는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 듯하다. 자살예방센터는 자살 고위험군의 여러 가지 행위 지표들을 주면서 주변인이 촉각을 세우면 자살을 막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대체로 혈연관계로 묶여있는 자살사별자들은 이 이야기를 뒤늦게 접한 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또 고인의 자살 이유를 찾아 고인의 인터넷 기록을 뒤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빈틈없는 이야기 속 고인이 언젠가는 자신의 생을 스스로 끝낼 것임을 예감한 주변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의료인류학자이자 정신의학 전문가인 아서 클라인먼은 노년기에 알츠하이머가 발병한 자신의 아내를 간병하며 윌리엄 제임스의 “복수의 우주”[1]를 그 어느 때보다 절절하게 체험했다고 진술한다. 같은 질병에 대응하더라도 그 질병을 둘러싼 환자, 주 돌봄제공자, 의료진에 따라서 너무나도 상이한 상황이 직조되고 따라서 모든 질병에 관한 이야기와 선택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A를 떠나보내는 경험도 그랬다. P의 사람들은 본인이 직접 환자가 되거나 환자의 주변인이 되는 환경에 반복적으로 놓임으로써 직간접적으로 정신과 진료를 경험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면 어떤 행동들이 나타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변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A의 자살이 예/아니오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의 문제라는 것을 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 많은 자살사별자들 중 비슷한 경험을 지닌 이들도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는 까닭은 높은 확률로 주변으로부터 시시때때로 무신경하게 들어오는 질문, 어색한 침묵 등이 고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의 입을 무겁게 짓누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견딘다는 것


A의 죽음 한 달 전쯤부터 나와 M, R은 모두 A가 죽을까봐 불안해하고 있었다. 공부를 하기 위해 혹은 일을 하기 위해 셋이 만나면 항상 공통된 화두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A였다. 그러나 A가 무너질까봐 두렵다는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지금 A 곁에 있는 것이 얼마나 지치는 일인가에 대해서도 한참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아무리 골몰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셋 모두 소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혈연가족 바깥의 돌봄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꿈꿨다. 좀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이야기하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과 함께 복닥거리며 살고 싶었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정말 운이 좋게도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어쩌다보니 P라는, 느슨하지만 끈끈한 공동체가 생겨났다. (P에 속한 누군가는 내가 이 공동체를 일종의 돌봄 버블로 보는 것을 동의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A가 사라진 날 가장 먼저 긴급연락을 할 정도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하고 안락한 비빌 언덕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할 것이다.)


다들 다양한 몸의 요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언제나 바깥세상보다 훨씬 너그러운 공간을 꾸릴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서로를 살폈다. 때로는 같이 듣는 수업에서 조별과제 함께하기 같은 사소한 실천을 함으로써 우리 중 누군가가 느닷없이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도 나머지 사람들이 그 일을 나눠 맡았다. 마감기한 준수와 양심적인 기여라는 시간적, 양적 평가규범에 둘러싸인 우리가 구사해낸 생존전략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잘 티가 나지 않아 게으름과 진배없는 것으로 곡해되는 무기력이나 우울 같은 것들도 그 안에서는 각 구성원의 경험을 토대로 잘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그 수용과 이해의 과정이 언제나 호혜적이고 충만하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때로 서로를 죽도록 미워하면서 꾸역꾸역 견뎌가며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A는 종종 기력이 넘칠 때는 이것저것 일을 벌여 나를 끌어들였다가도 불쑥 잠수를 타서 온갖 일을 내가 떠맡게 하기도 했고, 한 밤 중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보고 싶다며 불러내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선후관계가 뒤집히고 온갖 감정들이 뒤범벅된 기억들을 반복해서 꺼내놓기도 했다. 또 어떨 때는 평소보다 훨씬 예민해져서 그 전에는 웃으며 듣던 이야기들에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일도 있었다.


그의 곁을 지키면서 이런 일들이 온전히 A의 뜻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아이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은 때로 나에게서도 보이는 충동이나 우울을 혐오하거나 감추지 않고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 되기도 했다. 더불어 그가 내 앞에서 보인 솔직함을 통해 나를 정말로 가까운 친구로 좋아하고 애정을 쏟고 있다는 것을 엿보게 된 것 같아 기쁘고 황홀할 때도 있었다. 때로 A가 나를 위로해줄 때도 있었다. 외로움이 사무쳐서 누가 나 좀 안아줬으면 좋겠다고 SNS에 짤막하게 글을 올린 날 한달음에 달려와 나를 꽉 안아주던 마르고 힘 있고 축축하던 A의 손과 팔, 그를 찾아 헤매던 날과 마찬가지로 내가 생리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자기가 가진 잘 드는 약과 비건 쿠키를 한 아름 들고 문 앞에 서있던 A의 웃는 얼굴을 앞으로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A는 나보다 고꾸라지는 일이 잦았고, 내가 그의 수업 출석을 챙겨주거나 조별과제에서 그의 몫까지 감당하거나 그가 사람을 필요로 할 때 내가 곁에 있어주는 일은 훨씬 일상적이었다. 그 타성적인 불균형 속에서 나는 A의 고마움을 자주 잊었다. 더 심각하게는 내가 이미 다른 사람을 돌보며 많은 일을 하고 있을 때나 혹은 아주 기본적인 자기돌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을 때였다. 그때는 모든 것들이 부담이 되었다. A는 특히 그가 살아있던 마지막 1년 중 많은 날을 보살핌과 애정을 달라고 표정과 몸짓으로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애써 힘을 내어도 그 부름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P 전체로 확장해보아도 우리는 꽤 자주 돌봄에 실패했다. 구성원들이 돌봄의 필요성을 믿기도 했고, 적어도 서로를 돌보는 데에 있어서는 실천적이고 상황적인 지식도 상당해 돌봄역량이 매우 높았지만 우리 모두 취약성 또한 높은 사람들에 속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퀴어이거나 정동장애인이거나 혹은 세상의 폭력성에 지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울타리 친 이 공간은 조금만 이상한 사람을 보는 것 같으면 ‘손절’을 외치는 세상 위에 서 있는 따뜻한 캠프파이어 같은 것이기도 했지만 그 만큼 밖으로 확장될 가능성은 낮았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돌봄자원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늘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소진되는 이 구조에서 누군가는 언제나 자신의 필요보다 훨씬 적은 보살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돌봄과 상호착취가 종이 한 장 뒤집듯이 가까운 개념이라는 것은 직접 그것에 뛰어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라면 절대로 모를 것이다. P의 사람들이 꽤 자주 하던 말은 “돌봄 그것 생각보다 좆같다.”였다. 이런 고충을 P 바깥의 다른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그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왜 계속 서로를 견디는 거야?”라고 말했고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 질문은 정말 ‘왜 그런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내가 괴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설의법이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요구와 취약함을 전면적으로 돌본다는 것, 그래서 생명의 연약함과 직면하는 것이 어렵고 지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현실”[2]이라는 것조차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세계에서 더 나은 돌봄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은 답이 없는 문제였다. 마침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고민하고 질문하고 골머리 썩기를 멈추고 나의 안온함을 먼저 신경 쓰자고 생각한 순간 A는 영영 먼 길을 떠났다.



좌표 없는 우주로 신호를 보내며


얼마 전 장혜영 의원의 SNS에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온 적 있었다.



“내 한 몸 돌보기도 벅찬데 어떻게 남을 돌보느냐고 한다.

순서가 틀렸다. 우리가 남을 돌보는 일에 소홀했기에

결국 내 한 몸도 돌보기 어려운 사회가 된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남이다. 우리는 타인의 돌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나를 돌보기 위해서라도 남을 돌보아야 한다.”[3]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면서도 쓴 웃음이 지어졌다. 돌봄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끌어올려보기도 전에 저 멀리 관심사 밖으로 치워버린 이 세상에서 저 말에 공감하고 아파하는 이들은 정말로 돌보려고 노력한 사람들밖에 없을텐데. 묘한 억하심정과 더불어 딱 “내 한 몸 돌보기도 벅찬데...”로 시작하는 핑계에 숨어 A를 외면했던 나의 모습들이 스쳐지나갔다.


A가 떠난 후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수 없이도 고민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A를 구할 수 있었던 순간이 많았다. 그때 적절히 개입했다면 어쩌면 A는 며칠을, 몇 달을, 몇 년을 더 살아 30대를 맞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 기억을 안고 A가 죽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 순간들에 그에게 재빨리 달려가려고 백방으로 노력할 것이다. 발과 다리를 들 힘이 없다면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가야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칠 것이다. 그러나 그랬을 때 내가 소진되지 않을지는 자신이 없다 (물론 아무리 소진된다고 하더라도 A가 없는 지금보다는 훨씬 행복하고 충만할 것임은 확실하다). 그에게 성실한 친구가 되려고 애썼던 때에도 끊임없이 나빠졌던 그 아이의 상태를 기억해보면 나는 그 아이를 살린 이후에도 꽤 긴 터널을 지났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 자신의 안온함을 가지고 저울질해야 하는 이 지독한 상황에 대해 그것은 신자유주의 때문에 그렇다느니 이 사회가 정상신체중심주의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렇다는 말은 나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돌봄을 숭고하고 모성적인 윤리로 취급하며 그것의 필요성을 외치는 목소리도, 돌봄이 생존을 위한 호혜의 원리라며 그 당위성을 호명하는 담론도 정말 그 안에서 돌봄을 수행하고 있는 나와는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이런 분석들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고 믿었고 수많은 페이퍼나 글에서 이런 이론을 그대로 차용해 썼음에도 그랬다.


오히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죽임 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4] 살아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개인의 의지라는 상투적이고 공허한 힘을 붙잡지 않고서도 일상적인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돌봄의 망 안으로 뛰어들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섬세하고 다양하며 개인적인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여전히 노년기 환자 간병인, 돌봄 노동자들의 이야기, ‘유족’이야기 말고도 더 다양한 이야기들에 목마르다. 기존의 관계규범에서는 포착되지 않는 이들의 돌봄은 규범적인 돌봄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 또 왜 그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는지,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젊은 사람들의 곁에는 어떻게 있어주면 좋을지, 또 돌봄을 전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제공할 수 있는 돌봄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를 잘게 분절하고 다시 촘촘하게 꿰매는 난잡한 상상과 경험들이 공유되었으면 좋겠다.


A의 부고소식을 접한 주변의 많은 중장년층 페미니스트 선생님들께서 “혹여나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말라”고 위로해주셨던 기억이 떠오른다. 정말 하나같이 그렇게 문자를 보내셨다. 혹시나 그 분들도 “돌봐야 한다”는 명제만을 부여잡고 아무런 지도도 없이 철저하고 쓸쓸하게 실패해본 경험이 있지는 않았을까? 또 그 아픔을 애써 덮어두지는 않았을까? 혹여나 정말 그런 거라면, 돌봄의 필요성에 대해 그 누구보다 강하게 외치고 있는 사람들이 돌봄에 실패한 이야기는 왜 전해지지 않을까. 누구보다 노력했던 사람들의 실패담은 너무나도 아프지만 동시에 고유하고 귀중한 지식들로 넘쳐날텐데. 어쩌면 그 많은 고통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았을 때 우리는 돌보는 자들(care givers)을 어떻게 더 잘 돌보고 돌봄에 실패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더 촘촘하게 이야기해볼 수 있을텐데. 그런 것이 정말 이루어진다면 어쩌면 다시 돌아가 질문했을 때 나는 조금 더 기쁘게 A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앞으로의 세계는 어떤 존재들의 죽음을 좀 덜 경험해도 되지 않을까.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많은 고민을 했다. 그의 마지막 순간 일부가 나의 글로 고정되는 것을 A가 원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가장 컸다. 그러나 “돌봄은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고 적극적으로 추억을 살피는 일로 이어진다”[5]는 클라인먼의 말처럼, 나는 A에 대해 끊임없이 기억하고, 나의 실패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그의 곁에 있기를 택했다. 이 글에 담긴 판단과 감정을 나중에 읽었을 때 그것이 과잉되고 자기변명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 할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쓰지 않는 대신 그것을 끊임없이 고쳐 씀으로써 A에게 못다 한 책임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이 글은 A에게 보내는 그리움의 편지이자 끊임없는 좌절과 소진의 경험 속에서도 누군가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대화요청이다. 돌봄은 “세계를 유지하고, 지속하고, 고쳐 나가는 모든 활동”[6]이라는 조안 트론토의 정의를 따랐을 때, 그 세계는 단일한 추상명사가 아니라 수많은 생명들이 북적거리는 축축한 곳이라는 것을, 그래서 돌봄에 관해서는 그 어느 것보다도 다양한 실천적이고 상황적인 지식이 절실하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아픈 방식으로 깨달아야 했다. 누군가는 그러질 않길 바라며, 또 그런 경험을 한 누군가는 이 보잘 것 없는 모스부호에 응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주길 바라며 나의 작은 이야기를 아직 지도조차 그려지지 않은 어느 우주에 쏘아 보낸다.




[1] 아서 클라인먼, 노지양 옮김, 『케어』, 시공사, 2020., 68.

[2] 더 케어 컬렉티브, 정소영 옮김, 『돌봄선언』, 니케북스, 2021., 57p.

[3] 장혜영 정의당 의원 트위터, 2021.08.21 게시.

[4] 장혜영,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기사 중 일부

[5] 앞의 책 15.

[6] Joan Tronto,「Moral Boundaries: A Political Argument for an Ethic of Care」,『New York: Routledge』, 103; 서보경,「서둘러 떠나지 않는다면, 코로나 19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돌봄의 생명정치」,『문학과 사회』33(3), 2020, 39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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