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염
지난 1월 30일,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중앙운영위원회에 눈에 띄는 요구안이 하나 등장했다. 미래캠퍼스에서 신촌캠퍼스로 본적을 옮긴 학생들의 전 성적이 본교에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현 체계를 바꾸라는 안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요구안은 부결되었다. 하지만 부결된 요구안에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이 요구안은 “100인안건상정제”를 통해 상정되었다.[1] 100인안건상정제는 학생회 회원 중 100명 이상이 뜻을 모으면 이를 안건으로 채택하여 중앙운영위원회에서 논의하게 되는 연세대학교의 제도이다. 다르게 말하면, 분교에서 본교로 본적을 옮길 때 원래의 성적이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연세대학교 본교 학생 100명 이상이 동의한 것이다.
앞선 요구안처럼 본교와 분교 간의 다른 대우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선은 에브리타임 등의 커뮤니티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분교에서 본교로 적을 옮긴 학생은 “손쉽게” 높은 성적을 받아가기 때문에 본교 학생에 대한 “역차별”이 일어난다는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주장들의 기저에는 본교 학생과 분교 학생은 “다르다”는 마음이 깔려있다. 그래서 분교 학생이 “같은” 학교의 학생으로 취급되기 위해서는 “같은 기준”을 적용받을 수 있게 하는 특정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속변경 학생들의 성적 유지를 막아 달라는 요구에 많은 학생이 동의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본교와 분교 학생이 다르다는 주장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그 생각의 이면들을 천천히 살펴보자.
본교와 분교 학생이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언제나 입결이 거론된다. 본교와 분교의 “입결”이 다르기 때문에 대우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 학교에 어느 정도의 성적을 지닌 사람들이 합격했는지 보여주는, 입시 결과를 줄여 부르는 말인 입결은 대학 진학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숙할 개념이다. 대학교는 그곳의 학풍이나 특징보다는 입결에 따라 최상위부터 최하위까지 줄 세워져 있다. 자신이 쌓아온 성적, 생활기록부 등의 데이터베이스를 입결과 비교하며 “갈 수 있는”, 그리고 성적이 “남아서” “아깝지 않은” 대학교를 추리는 일은 대학 진학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이렇게 대학교에 지원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순서대로 줄 세워지고, 정해진 등수까지만 입학이 허가된다. 그렇기에 특정 대학교에 합격한 사람은 불합격한 사람에게 학교의 입결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입시에 들인 노력과 그에 따른 성과, 그리고 그것이 방증하는 자신의 능력이 상대의 그것보다 뛰어나다고 뽐낼 수 있게 된다. 비단 학생뿐 아니라 학교 바깥에 있는 사람들조차 ‘고학력’ 학생이나 졸업자가 더 성실하거나 뛰어나다고 믿게 된다.
입결이 다르기 때문에 대우도 달라야 한다는 주장은 앞서 말한 줄 세우기 시스템의 정당성에 크게 의존한다. 줄 세우기 시스템에는 ‘능력’을 잘 ‘반영’한다는 전제가 숨어 있는데, 이 전제를 만족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하여야 한다.
첫째, 모든 사람의 능력을 정확하게 평가하여 상대적인 순위를 정할 수 있어야 한다. 출신학교, 성별, 용모, 생활기록부 기재사항, 수능 성적 등 모든 조건이 일치하는 두 수험생 A와 B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둘은 같은 연도, 같은 전형으로 특정 대학교의 노어노문학과에 지원하였다. 둘의 유일한 차이점은 A는 B보다 고등학교 영어 성적이 높고, B는 A보다 고등학교 국어 성적이 높다는 것이다. 둘 중 누구를 더 뛰어나다고 평가할 것인가? 답이 애매하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예시보다 더 복잡하다. 개인의 수많은 특징이 평가 요소이며, 각 요소의 경중을 따지는 것은 넓게는 그 대학교의 자의적인 기준, 지엽적으로는 서류를 검토하고 면접을 진행하는 입학사정관의 판단에 기초한다. 같은 전형에 응시한 사람을 입학사정관 한 명이 전부 채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도 평가자 개인의 컨디션이나 채점 순서에 따라서도 점수에 영향이 있다. 과연 평가자가 각 요소에 대해 매기는 정량적 점수와 정성 평가가 모두의 동의를 얻을 만큼 합당할 수 있을까? 내신 성적, 수능 점수 등 이미 정량적으로 기재된 항목도 합당한 비교나 가산이 가능할까?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이렇듯 첫 번째 조건은 충족하기 매우 까다롭고 충족의 기준을 찾기도 난감하다.
둘째, 줄을 세우는 과정에서 편향된 시선이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누군가가 성별, 출신지역, 출신학교, 용모, 재산, 장애, 국적 등의 사유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낮게’ 평가된다면, 이는 결코 정당한 줄 세우기가 아닐 것이다. 교육부도 이를 인지하여 2021학년도 대학 입시부터 모든 대학이 면접 뿐만 아니라 서류 전형에서도 수험생의 출신 고등학교를 알 수 없게 하는 ‘고교 정보 블라인드 평가’를 도입하였다. 하지만 이 제도만으로 편향된 시선을 전부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일례로 현재 경남 진주교육대학교는 2018년 전형에서 의도적으로 장애인 수험생에게 최하점을 주었다는 의혹으로 교육부의 감사를 받고 있다.[2] 최근 하나고등학교도 2011년도에서 2013년도까지 선발된 남학생과 여학생의 비율을 맞추기 위해 여학생의 점수를 의도적으로 감점하거나 남학생에게 보정 점수를 부여하여 등수를 조작한 정황이 드러났다.[3] 이러한 사례가 계속되는 것만 보아도, 두 번째 조건의 달성까지는 여전히 많은 시간과 과정이 남아있다.
셋째, 출발선이 다른 경우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 출발 지점이 중구난방인 사람들에게 남들보다 재빠르게 달려가 먼저 줄을 서라고 한다면 분명 출발선이 앞에 그어져 있는 사람이 유리하다. 줄 세우기는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졌기에, 동일한 출발선에서 각자의 노력으로 순위를 겨룰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다른 이보다 높은 순위에 올라서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누군가가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안락한 가정에서 오롯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때, 다른 누군가는 경제적 지원이 없어 직접 돈을 벌어야 하는, 공부에만 몰두하기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누군가가 학원을 다섯 개 다니고 일타강사의 강의를 돌려볼 때 누군가는 교과서에만 의존한다. 남자 형제가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재수를 할 동안, 성적이 비슷한 여자 형제에게는 재수가 허락되지 않는다. 어떤 비장애인이 별다른 고충 없이 학업을 이어갈 때, 어떤 장애인은 적합한 교수자를 찾고 필요한 교육 자료를 찾는 등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들이 내놓은 결과는 정말로 오직 노력에 의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이외에도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수많은 경우들을 고려하면 능력만으로 다른 이와 같은 조건 아래 비교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정하기 위해 여러 지원과 선발 정책이 존재하지만 미꾸라지가 마구 활개치는 연못에 깨끗한 물을 겨우 몇 방울 떨어뜨렸다고 연못 전체가 맑아지길 바라는 수준이다. 출발선 앞당기기는 여전히 공공연하다. 게다가 이러한 문제를 시정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는 사람은 출발선을 유리하게 그을 수 있는 계층의 사람들이기에 굳이 능력에 의한 ‘공명정대’한 줄 세우기를 달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 번째 조건도 손 쓸 도리 없이 마구 엉킨 매듭처럼 실현이 요원하다. 심지어 매듭을 풀려는 의지마저 부족한 상태이다.
이렇듯 줄 세우기가 정당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삐걱거리며 시스템 자체를 믿기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입결이 다르기에 대우도 달라야 한다는 학벌주의 식의 주장은 빛이 바래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서 이득을 취하는 기득권층의 주도 아래, 이러한 주장에는 허점을 감추기 위한 수만 겹의 페인트가 덧씌워진다. 덕분에 아직도 그 빛은 찬란하다. 그래도, 그 아래에 변색된 알맹이가 있음은 변하지 않는다. 능력이 정확하게 평가되었는지도, 평가 과정에서 편견에 따른 왜곡은 없었는지도, 정말 성과를 능력으로 일구어냈는지도 알 수 없는 줄 세우기에 의존하는 차별 대우 주장은 공허하다.
그렇다면 시간이 흘러, 드디어 위에서 제시된 모든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하였다고 가정해보자. 모든 사람이 줄 세우기식 평가가 진정 공정하다고 동의할 수 있을까? 얼핏 생각하면 안 될 게 뭐가 있을까 싶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친 또 다른 문제점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능력’으로 사람을 대우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의 문제이다. ‘합당한’ 줄세우기가 이루어졌으니,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좋은 대우를 받고 능력이 미흡한 사람은 그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도 되는 것일까?
능력은 달리 말해 사회에 대한 ‘기여’이다. 능력 즉 기여에 따라 대우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자본주의적인 주장이다.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 사회에 기여하고 기여와 별개로 각자가 필요한 것을 받자는 공산주의와 비교해보면 능력주의가 상당 부분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능력으로 사람을 대우하는 풍조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나아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는 국가 차원의 복지와 규제를 강조하였던 수정자본주의가 몰락한 이후 등장한 자본주의 체제로, 복지와 규제를 축소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그 말은 즉슨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공공의 문제를 공공연하게 다루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실패는 그 ‘누군가’의 실패일 뿐, 사회적인 차원에서 해결되기 힘들어졌다.
신자유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이를 매우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국가 차원의 복지가 자신의 삶을 지켜주지 않음을 알기에, 수많은 사람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았기에 자신은 절대 망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대학을 졸업하여 취직을 못하는 경우가 예외였다면, 지금은 대단히 재수가 좋아야 겨우 취직을 할 수 있다. (……) 사람들은 자기가 재수 없어서 망한다기보다, 재수가 좋아서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4]라는 통찰에서 보듯,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재수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능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사회 속에서 능력은 더 좋은 학교의 졸업장, 더 좋은 자격증, 더 좋은 이력 등 수많은 ‘무기’, 또 ‘부적’의 형태로 개인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데에 힘을 보태고, 개인에게 망하지 않으리라는 위안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개인은 어쩔 수 없이 능력을 키우고, 능력에 의지하고, 능력을 믿는다.
이렇게 사회가 불안에 휩싸인 탓에, 사람들은 타인 그리고 세상을 돌보지 않게 되었다. 여러 비정한 현실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해결해보자는 물음은 “왜 내가 남의 일까지 신경 써야 하냐”라는 대답을 받게 된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문법 아래에서라면 철저히 타당해 보이는 사고이다. 누군가가 뒤처지는 것은 곧 그 누군가를 제외한 이의 추월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뒤처진 자는 노력하지 않은 자, 자신을 구제하지 못한 자이다. 그리고 추월한 자는 그와 다르게 자신의 좋은 ‘재수’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속에서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보며 내 존재의 정당성이 흔들리고 새로운 윤리를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는커녕, 그것이 내 미래의 얼굴이 되지 않기 위해 그 얼굴을 외면하거나 반면교사로 삼아, 이 공포의 체제에서 예외가 되기 위해 더욱더 적자생존의 경쟁에 뛰어든다.”[5] 다른 개인과 함께 나아가기보다는, 어서 자신의 능력을 키워 다른 이를 앞지르는 것이 이 세계의 도그마가 되면서, 능력에 대한 신앙은 도전되기보다는 거듭 공고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도 역시 신자유주의의 돌풍 한가운데에 있기에, 능력주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두의 사고방식에 스며들어 있다. 그렇기에 능력에 따라 줄을 제대로 세우고 나면,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그만큼 많은 것을 누려야 하고, 능력이 미흡한 사람들은 그만큼 적은 자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는 소위 능력이 뛰어난 자와 미흡한 자 모두에게 해당된다. 그렇기에 궁극적으로는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인식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변화와 체제 자체에 대한 깁고 더하기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개인이 오롯이 능력 경쟁에 매진하고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일을 당연한 현상으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은 합당한가? 숱한 혁명의 역사에서는 모든 사람이 천부적인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모든 이는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존중받는다. 즉 능력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시선과 대우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천부인권에 동의하는 현대 사회는 실상 정반대의 결론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는 ‘능력’이 없는 자를 ‘누릴 자격’이 없기에 ‘고려할 필요가 없는 자’로 간주한다. 자신의 안위와 삶에 대한 보장을 ‘능력’으로 알아서 사들여야 하는 세상에서,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권리를 가질 권리’가 박탈되는 것이다. 능력이 없는 주제에 안온한 인생을 바라는 것은 오만이 되었고, 동시에 누군가가 이루어주어야 할 의무가 희미한 소망이 되었다.
줄 세우기 식 평가는 권리를 가질 권리에 대한 주장을 효과적으로 침묵시킨다. 평가가 거듭되며 사람들은 능력으로 타인 심지어 자신의 가치를 매기는 데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능력에 따라 차별하거나 차별받는 상황을 당연히 여기게 된다. 줄 세우기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줄 세우기 시스템에 관해 이야기할 때 쉽게 지워지는, 그러나 반드시 인지해야 하는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짚어보아야 한다. 일단 우리는 무서울 정도로 단단하게 돌아가는 체제 속에 던져져 살아가고 있고, 이런 사회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참 어려운 일이지만, 신자유주의 구조 속에 살면서도 그 구조가 담지하는 능력주의라는 덫을 조심해야 한다. 자신과 타인을 능력으로 평가하고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님을 문득문득 상기해야 한다. 그렇게 조금씩 곱씹고 고민하다 보면 분명 다른 사회를 향한 새로운 걸음에 보탬이 될 것이다.
연세대학교의 분교를 향한 차별적 시선에서부터, 학벌주의로 이어지는 줄 세우기 식 평가에 대한 신화가 어떻게 허구적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결론적으로, 입결의 차이를 거론하며 미래캠퍼스의 학생과 신촌캠퍼스의 학생이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행위에는 줄 세우기가 ‘능력’을 잘 반영한다는 믿음이 전제된다. 또한 ‘능력’으로 사람을 대우하는 것이 옳다는 신자유주의식 시선과도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세 가지 명제를 경유한다. 첫째, “능력이 잘 반영된” 줄 세우기로 본교에 입학하였다는 것. 둘째, 이 능력은 본교생이 더 대우받아야 할 근거로 충분하며, 분교생은 본교생과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만약 분교생이 본적을 옮긴다면 본교생과 같아지기 위해 특정한 잣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연세대학교의 학생이 가장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학력 차별인 동시에, 줄 세우기 식 평가에 대한 신뢰를 명백히 드러낸다. 서론에서 말했던, 본적을 옮긴 학생들의 성적을 유지해서는 안된다는 100인 안건 상정은 기득권의 머릿수로 학내 소수자를 누르려는, 민주성에 대한 도전임과 동시에 줄 세우기에 대한 공공연한 믿음을 100이라는 숫자로 다시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었다. 본교와 분교 학생에 대한 대우 차이를 살필 때, 이러한 현상이 어떠한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실 줄 세우기는 아주 편리한 방식이다. 일단 줄을 세우고 보면 합격한 자와 떨어진 자,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를 나누는 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사회는 이 줄 세우기를 오랫동안 계속해왔기에 사람들은 이미 그 규칙에 익숙해졌다. 이미 이 제도와 학벌주의, 능력주의로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도, 이득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기에 지금의 평가 방식은 분명 바뀌기 쉽지 않고, 종종 차선의 제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가 이제 시작 단계라는 것도 줄 세우기 식 평가가 그간 얼마나 강력했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문제점만 나열할 뿐 제대로 이렇다 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게 자못 아쉽다.
하지만, 너무나 뿌리 깊은 문제라고 해서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현재 상황에 대한 문제 제기와 대안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을 줄 세우기 식 평가와 학력주의, 능력주의가 만연한 시대로 보는 동시에 이를 전복하려는 시도가 여기저기 싹트고 있는 시대로도 보았으면 좋겠다. 싹을 나무로 가꾸기 위해, 우리 모두가 연세대학교의 본교와 분교 간의 갈등뿐 아니라, 줄 세우기 식 평가와 학벌주의, 신자유주의 그리고 능력주의 사회 전반의 문제에 꺼림칙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고민할 수 있길 바란다.
[1] “[단독] 연세대, 서울 원주 성적 차별 안한다”, <매일경제>, 2021.02.18., 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21/02/162708/
[2] “장애인 단체 “장애 학생 입시 차별 전수조사해야”…교육부 사과 촉구“, <KBS NEWS>, 2021.08.09.,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51961&ref=A
[3] “남학생 점수 높여준 하나고, 남녀차별 하나은행과 꼭 닮아”, <프레시안>, 2021.05.07.,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50715100657061?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0DKU
[4] 엄기호,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낮은산, 2009., 99.
[5] 엄기호,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낮은산, 2009., 117.
참고문헌
“[단독] 연세대, 서울 원주 성적 차별 안한다”, <매일경제>, 2021.02.18., 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21/02/162708/
“장애인 단체 “장애 학생 입시 차별 전수조사해야”…교육부 사과 촉구“, <KBS NEWS>, 2021.08.09.,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51961&ref=A
“남학생 점수 높여준 하나고, 남녀차별 하나은행과 꼭 닮아”, <프레시안>, 2021.05.07.,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50715100657061?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0DKU
엄기호,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낮은산, 2009
마이클 센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한길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