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계월
노란 봉다리의 믹스커피를 거품기로 수백 번 젓고, 커다란 판에 왁스펜으로 자잘한 비즈를 붙이고, 좋아하는 아이돌의 포토카드에 스티커를 붙이며 꾸미고, 조그만 게임기 안에서 물고기를 하염없이 잡으며 우리는 따분한 일상을 이런저런 행동으로 채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방에 스스로를 가둔 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손에 잡히는 것들이 취미가 된 지 벌써 2년이 되어간다. 확실히 세계의 바이러스 팬데믹은 우리에게 기존의 여가를 재고할 기회를 주었으며 전에 없던 새로운 취미들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취미들이 비슷한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틱톡,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의 SNS를 매개로 뜨거운 물과 믹스커피, 거품기만 있으면 되는 달고나 커피 만들기에 도전하고 성공하는 컨텐츠들이 잇따라 업로드되었고, 달고나 커피를 실패하지 않고 만드는 방법이 널리 공유됐다. 그걸 보고 따라한 달고나 커피를 자랑하는 것까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취미가 더 이상 개인적인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렇듯, 근래에 새로운 취미에 대한 도전과 성공은 너무나 집단적이고 과시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취미라는 것은 본디 여가 시간에 나의 선호로 즐기는 꾸준한 행동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취미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면 취미의 속성은 무엇인가? 아니, 과감하게 말해서, 애초에 취미는 개인적인것으로 여겨진 적이 있었는가? 이것 또한 중요한 주제이다. 우리의 취미는 내밀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을 향해 폐쇄적인 방식으로 열려 있고, 일종의 권력으로까지 작용하고 있다. 이 글은 취미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취미가 개인적이라는 오해를 짚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취미와 취향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 있어 20세기의 ‘행동하는 지성’ 피에르 부르디외의 이론은 필수적이다. 그의 이론은 21세기 한국의 취미 유행과 그 사회적 함의를 분석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의 핵심 개념은 ‘아비투스(Habitus)’이다. 이 단어는 우리가 아는 영어 단어와 유사하다. ‘Habit’이다. 그리고 ‘Hobby’와도 비슷한 발음을 가진다. 이는 모두 영어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다. 라틴어 ‘Habitus’에는 수도사들이 입는 옷이라는 뜻도 있는데, 이는 수도사들이 매일 같은 시각에 규칙적으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기도를 하고, 같은 노동을 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같은 어원을 가진 ‘Habit‘과 ‘Hobby‘의 차이이다. 전자는 습관과 버릇이라는 의미에 가깝고, 후자는 취미에 가깝다. 습관, 버릇, 취미 모두 단어의 뿌리에 걸맞게 꾸준히 실천한다는 의미를 띠지만, 우리는 분명히 습관 내지는 버릇과 취미의 미묘한 차이를 인지하고 있다. 각자가 느끼는 그 미묘한 차이를 완벽히 정리할 수 없다. 그러나 문장으로 조금이나마 표현해보자면 취미는 자의적인 부분이 큰 비율을 차지하며 만들어지는 것이고(또는 그렇게 착각 및 오해되는 것이고), 또한 그런 만큼 개인의 선호가 습관이나 버릇보다는 훨씬 많이 반영된다. 한편, 한국어에서 습관이나 버릇은 고친다는 말과 어울려 쓰인다. 이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시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하는 질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초면인 상대에게 자아가 많이 투영되는 행동인 ‘취미’를 묻는다. 반면, ‘습관’이나 ‘버릇’은 시정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여겨져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취미’는 ‘습관’이나 ‘버릇’보다 누군가의 정체성에 더 가까운 행동으로 여겨지는 셈이다. 부르디외의 이론에 쓰이는 아비투스는 습관과 취미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 개념이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체화(體化)된 사회적 습관‘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체화된 것에는 몸에 배어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오는 행동 특성이 분명히 내포되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뒤, ‘사회적 습관’이다. 사회적 습관이라는 말은 첫눈엔 꽤 모순적이다. 습관이라는 건 개인적인 것이 아닌가. 누군가는 거짓말할 때 눈이 자꾸 왼쪽 위로 가고, 또 누군가는 마음이 복잡할 때 손목을 문지른다. 그런 개인적인 것이 습관이고 버릇이다. 이런 부르디외의 모순적인 아비투스 개념은 취미를 정의할 때 신선하게 적용될 수 있다. 아비투스 개념에 사회적이라는 관형어를 삽입하는 과정에서, 부르디외는 사회적인 것을 집단적이며 계급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또 집단적이며 계급적인 만큼, 개인이 가진 아비투스는 그가 속해 있는 곳의 영향을 받는다. 이 때문에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에 비대한 자아를 넘어서는 무의식적인 측면이 있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닌 부분이라고, 부르디외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아비투스는 무의식적인 행위의 틀(Frame)이라고. 행위의 틀이라는 언술은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결국 보이지 않는 경계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그리고 그러한 틀은 은밀하고 집단적인 방식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차원에서는 인식하기 어렵기까지 하다. 우리가 우리의 취미를 순전히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아비투스는 어떻게 은밀하게 우리의 삶 속으로 파고드는가?
부르디외는 사회문화적인 지식을 포함하고, 사회적인 이동성(사회 안에서의 계층을 옮겨가고자 하는 성질)을 자극하는 자산인 문화 자본 자체가 당장 권력으로 쓰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문화 자본은 오인되고 은폐[1]된 채로 위계 질서를 정립하고 권력을 재생산한다. 심지어 그것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은밀하게 우리의 삶 속으로 스며든다. 예를 들자면, 당신이 최근 사업을 시작했다는 친구 하나를 우연히 만났는데 전에는 보지 못한 골프웨어를 빼입은 모습이라고 해보자. 그의 뒤에는 허리까지 오는 골프 캐디백이 놓여 있다.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사업이 꽤 잘된 모양이라고, 돈을 많이 벌었겠노라고 짐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골프라는 스포츠는 우리에게 상류층의 취미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비싼 장비를 구비해야 한다든가, 다른 스포츠보다 훨씬 큰 장소를 필요로 한다든가 등의 실질적인 이유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논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비슷한 조건을 가진 다른 취미들에는 부여되지 않은 은밀한 사회적인 가치가 골프에는 있다. 그 가치는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몇 명이, 미디어 매체가, 혹은 골프웨어 브랜드가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확한 원인은 찾기 어렵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시간동안, 인지하지 못한 타자에 의해, 인지하지 못한 오인과 은폐를 계속해서 겪어 인지하지 못한 권력과 수직 질서를 만들어냈다. 물론, 골프는 상류층만 즐기는 스포츠는 아니다. 우리는 골프라는 스포츠 자체보다는 골프에 부여된 사회적인 가치와 대중적인 이미지를 중심으로 이러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화적 의미 재생산은 당연히 골프뿐만 아니다. 음악회, 갤러리를 다니거나, 커피보단 티백차가 아닌 잎차로 티타임을 가지는 것. 이것들은 어떻게 오인되고 은폐되는 것일까? 부르디외는 이러한 오인과 은폐가 같은 집단 안에서 ‘공모’되고, 계급 설정과 교육에 의해 이뤄진다고 말한다. 문화 자본을 많이, 자주 향유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문화 자본을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래로 보게 된다. 사실 이것은 문화의 장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무엇이든 많이 가진 자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계급 상 하위로 설정한다. 그런 은밀한 계급 설정은 집단 내에서 암묵적으로 공유된다. 또한 그 집단 내에서도 아비투스는 수직적인 방향으로 교육된다. ‘대를 잇는’ 모습과 같은데, 일차적으로는 부모에게서 아이로, 이차적으로는 집단 내의 연장자에게서 연소자로 이념이 전달된다.
이러한 과정은 매너의 유통과도 유사하다. 테이블 매너의 기원엔 여러 가지 설이 있고 또 시간이 지나며 많은 디테일이 바뀌었겠지만, 중요한 점은 테이블 매너가 계층을 구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다음에 한 번 밥 먹자”는 안부 인사가 통용되는 것은, 인간에게 식생활이 필수불가결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매일 규칙적이고 습관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식생활이다. 테이블 매너는 그러한 배경에서 생겨났다. 상류층은 일정 수준 은폐된,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전해지는 자신들만의 ‘룰’을 식탁에서 정해두었다. 만약 신분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의 지위를 알고 싶다면 같이 식사를 하는 것으로도 식별이 충분해지도록. 고기를 써는 데에 디저트용 나이프를 쓴다든가, 식사 도중 식기를 잠시 내려둘 때 포크와 나이프를 식탁 위에 그대로 둬버리는 등의, 테이블 매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그를 상류층의 테이블 매너를 교육받지 못한 사람으로 결정되어버린다.
이러한 맥락은 아비투스의 큰 예시로 작용한다. 한 집단 안에서 대를 이어 교육되고 그것은 은밀해진다. 은밀해져야만 그것이 권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원시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희소성은 재산으로, 권력으로 환원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아무나 향유할 수 있는 것은 희소성이 떨어지고 자연스럽게 권력으로서의 문화 자본으로는 탈락이다. 비밀은 곧 권력이 된다. 그저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에 가지런히 기대어 두는 것이, 알맞은 주전자에 잎차를 우려 첫 물은 따라 버리고 잔에 담는 것이, 갤러리에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것이, 은밀해진 문화 자본으로 그래서 권력으로 작용된다. 하지만 문화 자본 자체가 대중에게서 완벽하게 숨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골프도, 갤러리도, 스테이크도 대중에게 열려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열려 있지 않다. 대상은 열려 있되, 그것을 향유하는 방식이 은폐되고 오인되어야 한다는 게 요점이다.
그 교육은 문화 자본을 가진 집단 내부에서만 공유되는 것이고, 그 집단에 침투하기는 매우 어렵다. 흡사 문학 작품 의 주인공, 젊은이 라스티냐크가 프랑스 상류층 사교계에 들어가고자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연상된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지만 지식인이며 야망이 충만하다. 돈을 빌려 상류층의 여인들에게 연줄을 잇고 그들에게서 사교계의 매너를 전수 받으며, 여유는 없지만 억지로 고급 양복을 입는다. 19세기의 프랑스 사교계의 모습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가? 이미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거대한 사교계다. 문화 자본을 향유하는 것은, 그러니까, 만들어진 우리의 취미는 라스티냐크의 노력과도 같다. 우리가 정말 자연 발생적으로 그 취미를 원하고 있는 것일까? 라스티냐크의 야망 내지는 욕망은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이유는 자연스럽고 타당하다. 그는 성공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의 취미도 문화 자본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서 취미를 즐기고, 그런 동시에 취미의 위계 질서를 인정하게 된다. 작위적이고 상당히 타의적인 레디메이드더라도, 모순적으로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은폐되고 오인된 문화 자본이 취미로 향유될 때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 인위적이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것. 서론에서 잠깐 소개했다시피 세상을 향해 폐쇄적인 방식으로 열려 있는 것이다.
생산의 시대에서 소비의 시대로 이행된다는 단계적 서술로 대표되는 전지구적 자유 경쟁. 신자유주의 시대는 현대 자본주의를 설명하기에 용이하다. 욕망과 욕구, 그리고 이에 대한 미학적 만족이 소비자들을 일시적으로 충만하게 한다. 원하는 것을 상품으로서 잠깐 가지고, 다시 다른 것에 유혹당해 새로운 것을 욕망한다. 끝없는 고리로 소비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소비 사회를 돌고 돈다. 소비 사회는 온전한 만족이 아니라, 만족에 대한 기대로 작동한다. 불완전한 만족이 소비자를 완료 없는 갈망으로 이끌고, 소비자는 자신의 자본으로 다른 자본을 탐하게 된다. 물화(Verdinglichung)는 자본주의의 정치사회적 결정의 모든 의제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모든 것은 상품화된다. 소비자는 채워지지 못하는 만족으로 상품들을 찾아 끝없이 헤매게 되고, 물화된 무한한 개수의 상품들이 소비자와 직간접적으로 직면한다. 그중 몇 가지는 소비자의 일상 속으로 잠입한다. 소비가 여가 시간과 긴밀하게 맞닿으면서 발생하는 일이다. 스포츠레저, 관광뿐만 아니라 비교적 규모가 작은 일상 속 취미 활동도 상품이 됨과 동시에 그 역방향으로도 소비자가 상품을 소비하면서 취미가 된다. 이러한 취미는 신자유주의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무한하게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상품이 과하도록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 무한한 상품을 소비하면서 생기는 취미 역시 무한해진다. 또 만족에 대한 기대 때문에 타인의 상품 향유 전시에도 소비 심리가 크게 자극된다.
부르디외의 문화 자본 이론은 분명 취미의 한 부분을 설명하기에 적절하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따라서 그가 설명하지 못하는 취미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살았던 20세기의 프랑스에서 신자유주의를 동원하여 21세기의 한국으로 넘어와보자. 서론에서 언급했던 달고나 커피 만들기와 보석십자수에는 그 어떤 계급성도 찾아보기 힘들다. 부르디외의 이론으로 골프와 음악회 등의 취미를 설명할 수 있었지만, 달고나 커피 만들기와 보석십자수는 그렇지 않다. 판이한 분위기를 가진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취미들은 SNS에 전시되고 광고로 유통되면서 ‘유행된 취미’로 번졌다. 취미는 공공연하게 전시되고, 모방되고, 공유되는 것이다. 결국 부르디외의 이론과 같은 결론을 낸다. 취미는 지극히 집단적인 것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다른 점은, 이런 취미들에게 수직적인 위계가 없으며, 은폐되고 오인되는 요소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취미에는 정식 교육 절차란 없다. 교육이라는 말보다는 더 친절한 방식으로 개인에게 다가온다. 유튜브에는 달고나 커피를 만드는 방법과 과정이 숨겨진 것 없이 많은 영상으로 업로드되어 있다. 보석십자수에도 상세한 사용설명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교육과 계급을 요점으로 하는 부르디외의 설명보단, 소비자들의 끝없는 기대와 소비 전시에서 비롯된 모방 욕구라는 신자유주의적 설명을 곁들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물화된다고 설명한 바 있다. 믹스커피를 팔이 아플 때까지 휘저어 거품을 만든 채 마시던 집안의 취미도 믹스커피를 소비하는 것이었지만,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프랜차이즈 커피 브랜드들이 이러한 유행을 기민하게 눈치채고 달고나 커피를 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비자들이 집안에서 뜨거운 물과 믹스커피 한 봉으로 달고나 커피를 즐길 수 있다고 홍보하는 것이 물화의 좋은 예시다. 소비자들이 소비하기에, 사회경제적으로 물화된다. 개인들이 취미를 ‘소비한’ 이유는 그 이전에 소비의 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소비의 대상들이 성공과 전시를 목표로 행해지는 경향이 분명 존재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성공이 곧 자본이 된다. 돈이라는 실물 자본이 되지 않아도, 성공은 어떤 방식으로든 결과를 만들어낸다. 작은 취미라도 성공은 경쟁력이 된다. 유행이라는 일시적인 것에도 사회적인 공유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유행하는 취미를 향유한 집단의 일부를 묶어주고, 그들의 성공은 전시된다.
또한 일종의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 역시도 취미의 유행을 설명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소비자들은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들이다. 이 사회의 노동자들은 일터에서의 성과에 강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강박의 크기가 크든 작든 간에, 직업 소명에서의 성공은 인생 성공처럼 포장되고 과시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암묵적이거나 노골적인 압박을 느끼게 된다. 성과와 성공에 대한 압박감을 간접적으로 여가 시간에서의 성공으로 풀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가 노동에서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고 느끼지만, 여가에서 성취를 통해 뿌듯함을 느끼게 되면 그러한 압박에 대한 일시적인 해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일시적이라는 점이다. 유행은 일시적이다. 노동 성과에 대한 압박을 여가의 성취로 대신 해소하는 감정 역시 일시적이다. 소비자로서의 만족 역시 일시적이다. 이 모든 것은 제자리에서 완전히 채워질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미는 계속해서 전시되고, 유행하고, 만들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조작되고 있다는 찝찝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 강조했다시피, 이것은 작위적이긴 하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우리를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시킨다.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또한 압박을 잠시나마 해소하고, 문화 자본의 계층적 구조를 분석하며 문화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해내는 등의 취미의 장점을 살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이 집단적인 취미가 노동뿐만 아니라 여가도 점점 중요해져가고 있는 사회에서 바람직한 문화 생산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이러한 연구는 더욱 그 중요성을 빛낼 거라고 믿는다.
[1] 오인과 은폐는 부르디외의 언어이다. 각각 실상과는 다르게 이해 및 인지되는 것, 그리고 숨겨지는 것을 말한다.
김문겸.(2002). 자본주의와 여가. 사회연구, 3(2): 11-42
김재환.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문화생산이론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영남대학교 대학원, 2003. 경상북도
권기남 (2010). 상류계급 골프참여자들의 아비투스와 계급재생산. 한국스포츠
사회학회지, 23(2),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