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왜 저럴까: 중화민족주의의 역사와 현재

편집위원 이지

by 문우편집위원회
* 이 글은 2021년 초 중국의 문화 침탈이 큰 논란이 되던 시기에 쓰였음을 밝힌다. 글이 쓰인 이후인 3월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가 비슷한 역사 왜곡 논란으로 방영 2회 만에 종영되는 사례가 있었다.


2020년 9월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개봉한 디즈니 실사 영화 ‘뮬란’은 기존 작품의 인기에 힘업어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개봉과 동시에 비판도 받았다. 중국의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촬영된 점과, 엔딩 크레딧에 신장위구르자치구 투루판시(市) 공안 당국과 중국 공산당 신장 선전부에 대한 감사 문구(China Special Thanks)를 삽입했다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이다.[1]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중국의 소수민족인 위구르족이 살며 이들에 대한 박해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며, 신장 선전부는 이 지역에서 공산당 선전을 맡고 있는 부서이다. 게다가 영화가 촬영된 투루판시는 위구르족을 비롯해 100만 명 이상이 강제로 구금된 것으로 추정되는 재교육 수용소가 있는 곳이었다. 위구르족에 대한 중국 공안의 박해가 중지되지도, 제대로 해명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촬영을 진행한 디즈니가 당국의 협조에 감사를 표하기까지 하자, 중국 전문가인 에이드리언 젠츠는 “디즈니는 집단 강제수용소의 그늘에서 이익을 보는 국제 기업”이라고 비판했다.


게다가 2020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한국 문화를 중국의 전통 문화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물의를 빚고 있다.[2][3][4] 한복에 이어 김치나 김장, 심지어는 한국 전통 매듭까지 자국 것이라 주장하는 중국 네티즌이 많고, 이 때문에 인터넷 상에서 악플 공격 같은 다분히 소모적인 언쟁이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예로 미국 인디 게임 회사인 ‘댓 게임 컴퍼니(thatgamecompany)’가 자사 모바일 게임 ‘SKY-빛의 아이들’에 캐릭터가 입을 수 있는 패션 아이템으로 갓을 추가하면서 일어난 논란을 들 수 있다.[5] 이 아이템뿐만 아니라 캐릭터가 같이 입는 복장도 한복의 두루마기와 매우 흡사한 형태였다. 갓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이 유행을 타면서 ‘kingdom hat’이라는 이름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아마존에서 판매되기도 했다.

그림 1.PNG 그림 1 왼쪽이 글로벌 서버, 오른쪽이 중국 서버에 적용된 디자인. (출처: 탑스타뉴스)


그런데 이 아이템이 글로벌 서버에는 갓, 중국 서버에는 중국 전통 모자 디자인으로 적용되면서 중국 유저들이 “중국 서버에만 다른 모양으로 디자인된 것은 갓이 한국 고유의 문화임을 인정한 셈 아니냐”고 반발하기 시작했고, 댓게임컴퍼니에 의견을 표명할 것을 촉구했다. 2월 4일 댓게임컴퍼니 CEO 제노바 첸 대표는 자신의 웨이보로 중국 유저들에게 사과했다. “이번 모자 변경 사건으로 실망한 모든 유저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중국의 문화가 아시아 전체, 세계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며, “내가 중국 사람이라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다. 모자를 만들며 중국적인 요소를 많이 참고했다. 명나라 모자는 (이번 모자의) 디자인 영감의 원천이다”라고 밝힌 것이다. 게다가 유저 항의 이후 댓게임컴퍼니는 해당 아이템 설명에 ‘명 왕조의 모자(Hat of Ming Dynasty in China)’라는 설명을 추가했다.


제노바 첸 대표의 입장 발표 뒤에도 중국 유저들은 같은 내용의 입장문을 댓게임컴퍼니와 대표의 공식 트위터에도 올리라고 촉구하며 회사 공식 계정, ‘SKY’ 영문 공식 계정, 한국과 일본 공식 계정에 제노바 첸의 웨이보 포스팅을 붙여넣어 “중국 유저에게 '꿈의 계절'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부탁한다. 중국 플랫폼(웨이보)에 대한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트위터에도 정보를 공개하라”(그림 2 참조), “중국 유저에게는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두 모자 모두 중국산이며 모자가 중국의 것이라고 설명하라”라는 글을 올리고 있다. 이에 한국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VANK)는 “멋있다고 다 중국의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문화제국주의에 반대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웹 포스터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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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캡션: 제노바 첸과 댓게임컴퍼니가 트위터에서도 응답할 것을 촉구하는 글을 영문으로 적은 뒤 제노바 첸의 중문 웨이보 포스팅 캡처본, 영문 번역본, 한글 번역본 사진들을 같이 포스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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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캡션: ‘SKY’ 트위터 영문 공식 계정 게시글에 달린 댓글들. 다른 유저들이 동일한 내용의 댓글을 그대로 붙여넣기 한 듯 똑같이 업로드하고 있다.)

그림 4.jpg 그림 4 반크의 웹 포스터


이런 중국의 행동이 ‘동북공정’이라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2000년대에 효력을 다했다고 생각되었던 동북공정이라는 개념이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다시 떠오른 단어와 이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민족주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도달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Ⅰ. 민족주의 만들기


진나라 이전부터 중국인은 ‘중국’ 또는 ‘화하(華夏)’와 ‘이적(夷狄)’을 엄밀히 구분하여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이 구분은 문화적으로 강조된 것이지 종족적으로 강조된 것이 아니다. 중국인은 전통적으로 이 세계에는 세 가지 종류의 생령(生靈)이 있다고 생각하여 왔는데, 이것은 즉 중국인(華夏), 이적(夷狄), 그리고 금수(禽獸)였다. 이 가운데 중국인은 가장 교화가 잘 되었고 그 다음 오랑캐이며 금수는 전혀 교화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6]


‘화이관’이라는 단어에서 꽃피울 화(華)는 화하족, 즉 중국을 지칭하고 오랑캐 이(夷)는 그 외의 국가를 지칭한다. 자신들의 문명이 주변의 문명에 비해 월등하다는 사상에 기반하여 다른 종족과 자신들을 차별화하는 세계관으로, 이렇듯 중국의 전통적인 민족주의는 문화적 우월의식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중국은 농경사회에 기반을 둔 정주민족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유목민족에 비해 문명을 축적하기가 용이했다. 또 일찍이 진(秦)과 한(漢)이라는 통일 국가가 형성되면서 중국 전체가 내부적으로 단일한 문화를 향유하게 된 점 역시 문화중심적 중화사상이 형성된 이유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우월의식에 기반한 전통적 중화사상은 1840년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오랑캐’인 서양에 패배하면서부터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중국은 더 이상 중화일 수 없었다. 이 시기 조선이나 일본의 문헌은 중국을 China의 음차인 ‘지나’라고 지칭한다. 위대한 하나, 중심이 아닌 만국 중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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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그림 5-1(캡션: 일본이 특히 청일전쟁 이후부터 중국을 지나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도로, 우측 하단에 ‘조선, 만주, 지나총도’(朝鮮 滿洲 支那 總圖)라고 적혀 있다. 우→좌)


당시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던 동아시아 3국이 모두 그랬듯 18세기 중국에도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여러 민족·민족주의 사상들이 속속 출현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중화민족’은 일종의 영속주의적 민족 개념이다. 고대 섬서성을 중심으로 거주했던 화하족이 전한(前漢) 시기를 거치면서 주변 이민족을 통합하여 한족으로 발전하였고 당대(唐代)에는 북방, 남방 이민족을 흡수해 신 한족으로, 그리고 청대(淸代)에는 티베트, 위구르 등 주변 이민족을 병합하면서 중화민족이라는 거대민족으로 발전했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 학자 중 한 명이 량치차오(梁啓超)인데, 그는 중국에 ‘nation’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며 그 번역어로 민족(民族)을 제시한 사람이다. 그는 스승 캉유웨이(康有爲) 등과 함께 변법자강(變法自彊) 운동[7]을 일으키며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고 했다. 비록 운동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망명 생활을 하며 중국 내 한족과 소수민족을 통합하는 새로운 ‘근대적 중화민족’의 개념을 제시한다.


당시 ‘중화민족’은 여러 의미로 혼용되어 쓰였다. 어떨 때는 한족만을 지칭하기도 했고, 어떨 때는 중국 내 대표적 소수민족인 만주족, 몽골족, 회족(回族), 묘족(苗族), 장족(壯族)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했다. 전자를 한족만을 가리키는 ‘소(小) 민족주의’, 후자를 ‘대(大) 민족주의’라고 부른다. 량치차오는 처음엔 유교 사상에 기반하여 한족 중심의 개혁을 통해 중국을 서구 열강의 침탈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후엔 모든 중국인이 힘을 모아야 비로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결론짓고 ‘대 민족’으로서의 중화민족을 호출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중화민족’의 원형인 셈이다.


이를 이어받아 쑨원(孫文)의 민족주의가 출현한다. 쑨원은 청나라의 종말이자 새로운 ‘중화민국’의 시작이었던 신해혁명을 이끌어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그는 황제제도가 사라진 새로운 공화국에서 중심이 되어야 할 사상으로 삼민주의(三民主義), 즉 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를 제시했다. 그리고 그 민족주의의 주체로서 중화민족을 호명하고 그들이 중국의 변화를, 발전을 이끄는 주체라고 보았다.


쑨원 역시도 처음에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만주족의 청나라를 몰아내고 한족만을 중심으로 한 민주국가인 중화민국을 세우자는 민족주의를 주장하였다. 만주족이라는 무능하고 부패한 이민족 정권에 대한 혐오에서 그의 민족주의가 비롯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신해혁명이 성공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이후 뒤집힌다. 강한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내에 있는 민족들이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국가의 근본은 인민에게 있다. 한족(漢族), 만족(蠻族), 몽고족(蒙古族), 회족(回族), 장족(藏族)의 여러 영토를 합하여 일국(一國)을 만들고, 한족, 만족, 몽고족, 회족, 장족의 여러 민족을 합하여 한사람(一人)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민족의 통일을 말한다.


윗글은 쑨원이 중화민국의 총통에 취임하면서 읊은 <임시대총통취직선언서> 일부이다. 여러 영토를 하나의 나라로, 여러 민족을 한 명의 사람으로 만들자는 대목은 그동안 오랑캐로 취급받았던 소수민족을 배척하지 말고 함께 힘을 모아 5족공화(五族共和)의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쑨원의 상생적, 개방적 민족주의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이를 반영한 오족공화기가 중화민국의 국기가 되었을 정도로 쑨원의 대 민족주의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근현대 중국의 새로운 민족주의는 이렇게 탄생했다.


중국 국민당이 세운 중화민국은 곧이어 대륙의 패권을 공산당에게 넘겨주었고, 공산당 역시 민족주의라는 이념을 국민당과 공유했다. 그런데 사실 공산당과 민족주의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중국 공산당의 이론적 기반인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민족주의는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동원하기 위해 조작해낸 개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8] 모든 국가와 계급이 소멸되는 공산주의를 인류 최종적인 이상사회로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는 민족주의든, 국가주의든 모든 내셔널리즘(nationalism)[9]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중국공산당을 이끌던 마오쩌둥(毛澤東)은 민족에‘해방’이라는 개념을 첨가해 ‘저항적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일본 제국주의나 서구 열강 같은 외부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을 필두로 반제국주의 저항적 민족주의 운동을 펼치던 중국공산당은 1931년 11월 중국 소수민족들이 ‘민족자결원칙에 따라 중국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립 국가를 건립할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다. 국내 각 소수민족이 완전자결권을 가지고 있으며 단독으로 자신의 국가를 건립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는 우드로 윌슨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인데, 이처럼 한족은 물론이거니와 각 소수민족까지의 자민족 독립 국가 건설을 인정한 것은 파격적이고도 개방적, 평등적, 진보적인 민족주의를 보여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은 돌연 1939년 6월부터 이러한 입장을 철회하고 통일국가 건립을 전제로 한 ‘민족구역자치제’를 강조하기 시작한다. 단일국가 아래에 다민족이 공존하는 통일적인 다민족 국가를 건설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제도였는데, 당시 공산당은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당과 국공합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외부의 적에 대응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자에 민족 간의 공조와 단결, 통합을 다른 것보다 더 우선순위로 놓게 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경내의 모든 민족은 일률평등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협조하여 대(大) 가정이 되게 하며, 대민족주의와 협애민족주의에 반대하고, 민족 간의 질시와 억압, 민족단결을 파괴하는 행위를 엄금한다.


1949년 9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야에 마오쩌둥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공동강령>에서 민족 간의 분열이 아니라 대단결을 강조한다. 또 모든 소수민족과 한족을 한데 묶어 ‘각 민족이 우호·협력하는 대가정’이라는 통합적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통합적 민족주의 아래 소수민족이 각자의 자결권을 주장하며 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은 분열이었고, 중국 관내의 모든 민족은 한 민족으로 하나 되어야만 했다.



Ⅱ. 중화민족을 호출하기


중국은 한족과 나머지 55개의 소수민족을 묶기 위해 ‘중화민족’이라는 가상의 ‘상상된 공동체’를 사용하며, 그들을 통합하기 위해 각 민족의 역사와 신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왔다. 이것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소수민족 역사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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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캡션: 중국 주요 소수민족과 역사공정이 진행된 곳은 대부분 일치한다. (출처: 동북아역사넷))


중국 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센터)에서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여러 역사공정을 벌여 왔다. 공정(工程)은 프로젝트에 대응되는 중국어로, 역사공정이란 역사 해석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중국의 주변국에선 지속적인 변동과 혼란이 잇따랐다. 인구 대다수가 이슬람교 신자인 신장위구르 지역은 당시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주의가 확대되면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또 남서부 지역은 베트남과의 국경 분쟁을 겪는 것은 물론, 다른 인접 국가인 미얀마나 라오스를 넘나들며 유통되는 마약 때문에 생겨난 여러 사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중국의 역사공정은 대부분 이러한 위기를 겪던 변경 지역에 시행되었다. 티베트와 신강 지역에서는 서남공정 및 서북공정이, 중국 남부에서는 남방공정이, 남몽골[10] 지역에는 북방공정이 진행됐다. 모두 중국 입장에서는 경제 및 발전 수준이 낮거나 주변의 위기에 취약하여 안정성이 낮을 수밖에 없는 소수민족의 거주지역이자 ‘하나의 중국’을 만드는 데 위험이 되는 지역이었다. 즉 역사공정은 주변국에서 이어지는 변동이 변경의 낙후됨과 결합해 연쇄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중앙과의 통합을 강화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공정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동북공정이므로, 동북공정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지금까지 중국에서 진행된 역사공정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졌는지 엿보려고 한다. 동북공정은 2002년부터 변강사지연구중심과 중국 동북 3성 지역이 연합하여 시작한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로, 언론에 집중 보도된 고구려사 외에도 다른 분야들을 포함하고 있다. 한반도 고대사, 발해사, 중국과 러시아의 변경지역 역사와 기타 소수민족 및 중국의 강역 이론과 조중(朝中) 관계사가 그렇다.


중국이 제시한 동북공정의 ‘성과’들은 언론에도 널리 알려졌다시피 국내에서 한국사의 형성 과정을 심각하게 왜곡했다고 강하게 비판받았다. 그 예시로 우선 중국이 동북 변경지역 역사를 일관되게 곡해하여 서술한 점을 들 수 있다.[11] 조선족의 활동 범위를 한반도 내로 국한하고 조선족의 활동 영역이 한반도를 벗어나 만주로 넘어갈 때는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킨 것이 그렇다. 이에 따라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 정권,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고려의 북방한계선을 한반도 내라고 주장했다. 또 발해는 당에 속한 말갈족의 지방정권이며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이 아닌 말갈족이라고 주장하는 서술도 있었다. 이 외에도 각 연구 논문에서 다루었거나 제기된 문제들은 시선이나 관점에 따라 의견이 다양하게 나뉘며 학술적 토론의 장이 열릴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런데도 중앙에서 볼 때 바람직한 서술을 정사로 고정한 것이다. 특히 과거 중국에서도 한민족의 고대사나 중국 본토와는 독립된 정치 실체로 규정해온 고구려사를 일관되게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서술한 점은 “여러 다양한 의견 사이의 교류보다는 하나의 입장에서 설명을 전개하고 있다”고 지적받았다.[12]


또 동북공정 내 일부 연구 결과는 패권주의적, 팽창주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13] 한반도 남부에 살았던 마한, 진한, 변한의 한반도인들이 중국에서 건너간 이주민이라고 설명하거나 ‘수당송명청 이래로 한반도는 중국에 복속되어 있었으므로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나 신라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춘사범학원 부교수 쟝웨이동의 논문이 대표적이다. 이남주는 이에 대해 “한반도의 독자적인 역사는 신라지역으로 제한되거나 아니면 근본적으로 부정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우려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동북공정이 전통적인 중화주의적 세계에서 조공 질서가 외교관계 중 하나였음을 완전히 무시하고 당대의 외교 질서를 국민국가 출현 후의 외교관계와 동일선상에 놓고 해석하는 등 의도적으로 곡해를 자행했음을 드러낸다. 이는 영토주권론에 입각해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강역에 무리하게 적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14]


2. 중화민족 선조 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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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캡션: 중국 정주 황하풍경구에 있는 염제와 황제의 조각상. 일부러 세계 최대의 조각상이 되도록 조각했다고 한다. 출처: 다음블로그 ‘중국 그리고 중국문화’)


중국인을 일컫는 여러 표현 중에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는 말이 있다. 염제와 황제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중국 신화에는 동서남북중을 관장하는 다섯 명의 신이 있는데, 그중 중앙을 관장하는 신이 황제(黃帝), 남방을 관장하는 신이 염제이다. 황제는 본래 고대 국가에서 적법한 황통(皇統)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임금이 바뀔 때마다 제사를 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후 청이 나라 안팎으로 시달리던 시기부터 지식인들은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호명하기 시작했다. 내우외환이 가득하던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에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불려나온 것과 비슷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은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더 넓은 세계와 마주하게 되었고, 다시 예전의 ‘강한 중국’에 대한 열망을 품었다. 그러나 이 목표 달성에 있어 중대한 걸림돌이 있었는데, 바로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의 분열 가능성이었다. 때문에 중국은 소수민족이 가장 많이 사는 남방 지역을 겨냥하여 그들까지 중국인으로 포섭하기 위해 남방을 관장하는 신 염제(炎帝)를 불러왔다. 이때부터 중국 각지에 염제와 황제가 나란히 놓인 염황사당이 지어졌다.


그런데 오족공화에서도 언급되었던 중국의 대표적인 소수민족 묘족(먀오족)은 자신의 조상이 염제가 아닌,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한 치우라고 주장하며 이 염황지손이라는 개념에 반대했다. 사실 치우가 묘족의 조상일 가능성은 단군이 한민족의 조상일 가능성과 비슷하다. 실제로 이 운동을 이끈 천징(陳靖)은 “치우가 진짜 먀오족의 조상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먀오족을 단결시킬 정신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천징은 중국공산당 군대인 홍군의 장군 출신으로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영향력을 십분 활용하여 중앙 정부 지도자며 현지 지도자에게 “우리는 중화민족이기는 하지만 염황의 후손은 아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이에, 중국은 치우 역시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인정하며 염제, 황제와 나란히 치우를 모시기로 결정하고 각지에 ‘중화삼조당’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2000년대에 이르러 치우는 별안간 동이족의 수장으로 둔갑한다. 여러 역사공정이 진행되면서 중화민족의 시원이며 선조를 발굴해내는 작업에 열이 오른 시기 치우가 동쪽에서 왔다는 고서의 기록까지 검토 없이 수용해 그를 동이족의 제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중국으로 하여금 묘족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열악하고 낙후된 동북 지역까지 중화민족으로 포섭하는 효과를 이끌어 내었다. 이 논리는 이후 한 걸음 더 나아가 ‘치우는 동이족으로 중국인의 조상이고, 한국인은 동이족의 후예이니 한국인도 중국인’이라는 주장에까지 이른다.



Ⅲ. 하나의 중국을 위한 소수민족 탄압[15]


‘하나의 중국’의 기반을 다진다는 미명하에 아직도 탄압당하고 있는 소수민족의 대표적 예시로 티베트를 들 수 있다. 1965년 자치구가 된 티베트는 청의 강희제 시기에 명명된 ‘서장’이라는 명칭이 현재까지 사용되며 서장자치구로 불리고 있고, 당·송 대에는 토번이라 불렸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부터 티베트는 국제법적으로 독립 국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당연히 1912년 건국된 중화민국은 티베트에 대한 통제권이 없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인도가 독립하던 시기인 1947년 티베트도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될 때 마오쩌둥은 티베트의 독립을 무효로 보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해 11월 티베트가 다시 독립을 선언하고 1년 뒤인 1950년 10월 7일 중국 정부는 군대를 보내 티베트를 강제로 점령했고, 11월 1일 티베트에 ‘서장장족자치구’ 인민정부를 설립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청 왕조가 망한 뒤 잃어버렸던 영토를 회복한 것이며 국내 문제라고 보고 있다. 2008년 티베트 유혈사태를 강경 진압한 뒤 받은 수많은 국제적 비난에도 “우리와 달라이 라마 집단과의 갈등은 민족문제도, 종교문제도 아니며 인권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전적으로 중국의 내정에 속하며 조국의 통일과 분열의 문제”라고 한 후진타오 전 주석의 대답이 이를 방증한다.[16]


위구르 또한 마찬가지다. 신장위구르자치구에 거주하는 위구르족은 역사적으로 원홀, 위홀, 회골, 외올, 회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고구려와 연합해 수·당에 대항했던 돌궐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 시절의 돌궐은 그 세력이 쉽게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 수나라가 혼인 동맹을 위해 공주를 네 차례나 보냈을 정도였다. 이후 강성해진 당나라에 지배당했다가 당이 멸망한 이래로는 위구르 카간국, 차가타이 칸국, 아르간드 칸국[17] 등의 독립왕조를 세워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교류하고 독자적인 문자를 만드는 등 역사적인 족적을 남겨 왔다.


1755년 청 건륭제가 이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한 뒤 청의 영토로 편입한 뒤부터 이 지역은 ‘새로 점령한 강역’, 즉 ‘신강(新降, 중국 발음으로는 신장)’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오늘날 익숙한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여기서 유래한 표현이다. 1933년 위구르족은 봉기를 일으켜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을 건국했으며 지속적으로 독립국을 세우려는 민족운동을 벌였다. 1944년 9월에는 독자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건국한 것이 그 예다. 하지만 1949년 9월 25일 신강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인해 다시 중국 영토로 편입되었다. 1952년 신강은 “중국영토로서 분리할 수 없는 일부분”이자 “중앙인민정부가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1급 지방정권”으로 규정되었다.


중원의 한족 입장에서 바라본 명칭인 ‘신장위구르’ 대신 ‘동투르키스탄’, 또는 ‘투르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위구르족의 요청조차 거부당했으며, 위구르족에 대한 탄압 역시 계속되고 있다. 1950~1981년 동안 194건의 위구르족 반혁명 운동이 발생했으며, 무장 반란은 19건이 있었다. 더불어, 1990~2001년 사이 국내외 동투르키스탄 운동 세력들이 신장자치구 내에서 주도한 테러 사건은 최소한 200여 건이었고 이 운동은 2008~2009년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분리운동은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중국 정부의 폭력 진압으로 제압되었다. 중국은 이런 식으로 위구르족이 현재 벌이고 있는 독립운동은 폭력적으로 탄압한 뒤 다음 세대를 대상으로는 한족화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다음 주용식의 글이 이를 잘 설명한다.


신장위구르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정부의 근본적인 대응은 중화민족화, 더 정확하게는 한족화를 위한 서북공정이다.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는 1996년부터는 국가관, 민족관, 종교관, 문화관, 역사관의 ‘오관교육’, 그리고 2004년부터는 조국, 중화민족, 중화문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에 대한 4가지의 공통인식을 수립기 위한 교육이 추진되어 왔다. 한어와 소수민족 모어의 이중교육을 통해, 실질적으로 한어 교육을 추진해 왔다. 이러한 중국의 교육 기조는 중국이 조국이고, 소수민족도 중화민족의 일원이며, 소수민족의 역사도 중국사의 일부라는 등, 국가, 민족, 문화, 역사의 공유인식을 불러일으켜 소수민족을 중화민족화 하는 전략이다. 더불어 중국은 서북공정의 결과로 ‘서역통사'를 출간했는데, 여기에는 신장은 한대 이후로 중국에 편입되었고 위구르족은 중화민족의 일원이라는 중화민족주가 반영되어고 있다. 위구르족은 중국왕조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고 결과적으로는 ‘중화민족대가정’을 이루었다는 이른바 대일통론이다. 역사와 문화의 통합에 더해, 중국은 민족적으로도 위구르족을 중국과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규모 한족 이주를 통한 중국의 공격적인 한족화 정책으로 2011년 신장에 거주하는 한족의 비율은 40%를 넘었다. 이에 대해, 싱글러톤(William Shingleton)은 위구르의 한족화를 식민정책을 넘어 인종청소에 가까운 동화정책이었다고 주장한다.[18]



Ⅳ. 국내의 민족주의 다지기: 애국주의 교육


중국은 사회주의의 실효성의 실패와 소수민족 분리의 움직임에 따른 새로운 대안의 이데올로기로 민족주의, 곧 ‘애국주의’를 선택했다. 애국주의라는 기치 아래 국민통합을 모색한 것이다.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은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는데, 천안문 사태는 1989년 6월 4일 밤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을 계엄군을 동원해 탱크와 장갑차로 해산시키면서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천안문 광장 외에도 시내 곳곳에서 수천 명의 시민들이 시위 진압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사건은 당시 중·소 정상회담 취재차 입국했던 외신 기자들에 의해 즉각 보도되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고 세 달 뒤 중국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은 “우리의 가장 큰 잘못은 교육에 있으며, 젊은이와 청소년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였다”고 발언해 1978년에 본격적인 개혁개방을 하기 전 애국주의 교육을 시키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를 내비쳤다.[19] 그리고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중책을 맡고 있었던 장쩌민 역시 “대대적으로 이데올로기 영역의 작업을 강화하고, 사상정치작업을 개선하고, 끈질기게 전국 인민, 특히 청소년에 대한 애국주의·집체주의·사회주의 자력갱생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는 사상교육과 혁명전통교육을 해야 한다”, “새로운 역사조건에서 애국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선양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하고 철저한 애국주의교육을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교육은 어린이부터 다잡아야 한다. 전국 인민, 특히 많은 청년들은 중국의 역사, 특히 근대 이후의 역사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애국주의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20] 이 발언들은 1994년 “애국주의교육실시강요(愛國主義敎育實施綱要)”가 발표되며 구체화됐는데, 강요는 지침과 같은 말로 풀이하자면 ‘애국주의 교육 지침’이라는 뜻이다. 그 내용이나 해설은 이렇다. (괄호는 인용자가 표시한 것)


첫째, 애국주의교육은 애국주의, 사회주의, 집체주의는 본질적으로 통일된 것으로 이를 연계해서 교육해야 한다. (즉, 국가에 대한 사랑은 사회주의를 이끄는 공산당에 대한 사랑임을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애국주의교육의 중심내용은 중국의 근현대사와 국정교육이다. (근현대사에 대한 교육을 통해 공산당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고 국정교육을 통해 사회주의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하였다.)

셋째, 애국주의교육은 개인이나 작은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와 민족의 이익에 손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교육해야 한다. (즉, 국가와 당에 대한 희생을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애국주의교육은 아동시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러 차례 유치원부터 애국주의교육을 시킬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공산당에 대한 충성을 세뇌시켜 다른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다섯째, 애국주의의 실천에 있어 지행일치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누군가 국가와 민족, 사회주의사업에 해를 끼치면 투쟁해야 한다.)[21]


이렇듯 아동·청소년기부터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을 받은 세대가 자라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과격한 애국주의·민족주의에 물든 청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을 ‘분노청년(憤怒靑年)’, 줄여서 ‘분청(憤靑)’이라고 한다. 2019년 홍콩 민주화운동이 수개월 이어지며 전 세계적으로 뉴스를 탔을 때 이에 호응하여 한국 대학생들이 붙인 포스터를 훼손하며 ‘홍콩은 국내문제이니 외국인은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하던 중국 출신 학생들이나[22], 앞서 짚었던 ‘SKY: 빛의 아이들’의 중국 유저들은 모두 이런 애국주의 교육의 성공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시진핑이 집권 초기부터 중화민족 통합과 단결, 애국을 강조해왔다는 것을 짚어둘 필요가 있다. 그의 정치 이념과 지도사상이 집약된 단어가 한두 번쯤은 들어보았을 ‘중국몽(中國夢)’이다. 시진핑은 2012년 11월 국가박물관에서 개최된 <부흥의 길>이라는 전시회를 참관한 다음 “매 사람마다 이상과 추구가 있고 꿈이 있다. 현재 여러분은 모두 중국의 꿈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근대 이래로 중화민족의 가장 위대한 꿈이다.”라고 말한 것이 최초의 중국몽 발언이다. 그는 이후로도 여러 발언에서 중국몽을 ‘모든 인민의 꿈’, ‘중화민족 전체의 열망’으로 동치시켰고, 심지어 이 중국몽을 단계화, 대중화시켜 세계의 꿈으로까지 발전시키겠다고 주장한 바 있다.[23] 그의 중국몽은 모든 인민이 하나로 단결하고 자신의 역량을 총집합시킬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홍콩이나 마카오 같이 일국양제[24] 하에 있는 특구나 대만도 예외는 없다.


이런 ‘중국몽’ 강조 흐름에 맞게 2019년 11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은 새로운 애국주의 교육 방침인 “신시대애국주의교육실시강요(新時代愛國主義教育實施綱要)”라는 것을 발표했다. 25년 만에 정비된 애국주의 교육이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개정된 것이다. 다음은 강요의 일부분이다.


애국주의는 중화민족의 민족 마음이고 민족혼이며, 중화민족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재산이고, 중국 인민과 중화민족이 민족 독립과 존엄을 보호 유지해야 하는 강대한 정신적 동력이다. 애국주의는 중화민족의 마음속 깊게 새겨져 있고, 각 민족의 단결통일을 유지해야 하고, 후손들은 조국 발전번영을 위해 노력하며 분투해야 한다.


이 밖에도 강요는 ‘신시대 애국주의는 곧 조국과 중국식 사회주의, 공산당을 향한 충성’이라고 언급했다. 청소년이 받는 학교 수업에서 중국의 역사, 전통문화, 공산당, 국가 안보에 대한 내용을 다룰 것이며, 특히 홍콩과 마카오에 거주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일국양제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 “홍콩·마카오 주민과 대만 동포가 국가 정체성을 높이고 국가 통일과 민족 단결을 자각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한다. 이를 반영해 각 학교에서는 공산당 사상 교육 어플이나 음악, 드라마, 짧은 동영상 및 라이브 스트리밍을 이용하여 청소년에게 애국주의를 가르치게 된다. 이러한 애국주의 교육의 강화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인 ‘중국의 꿈’을 실현하는 중대하고 심원한 의의라고 주장했다.[25] 2019년은 홍콩의 민주화운동이 수 개월간 계속되었던 해이기도 해서 제2의 홍콩 시위를 방지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것이 기정사실이다. 청소년에게 성장기부터 중화민족으로서의 소속감을 심어두려는 정책인 것이다.



나가며


지금까지 문화적 우월성에 기반한 중국의 전통적 민족주의인 중화사상이 ‘한족과 55개 소수민족 전부 중화민족’이라고 주장하는 중화민족주의로 변하는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중화민족’을 탄탄히 다지기 위해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하고 각종 역사공정을 진행한 것을, 그 과정에서 전설과 신화 및 역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해 ‘우리는 원래 중화민족의 일부였다’는 식으로 서술해왔다는 것까지도 알 수 있었다. 또 중국은 민주화운동인 천안문 사태 이후 애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아동과 청소년에게 국가, 민족, 당에 대한 충성을 가르쳐왔다는 것도 짚었다. 이 교육을 받고 자라 과도한 민족주의, 애국주의적 성향을 띠는 현재의 청년들을 ‘분청(憤靑)’이라고 하며 ‘홍콩은 국내 문제니 외국인은 신경 쓰지 말라’고 일갈하는 중국 유학생들이나 한국 문화는 중국 문화의 일부가 아니라는 주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국 네티즌들이 여기에 속하리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었다. 집권 이래로 ‘중국몽’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며 중화민족의 단결, 통합, 국가·민족·당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고 있는 시진핑 정부가 애국주의 교육을 한층 더 강화하겠다는 지침을 내놨다는 것 역시도 살펴보았다.


한국인을 중국 조선족이라고 표현하고, 한국 문화를 중국문화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일련의 흐름은 이렇게 중화민족주의가 강조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이 중화민족을 만들고 소수민족을 탄압해온 역사나 중국의 민족정책을 꾸준히 연구해온 공봉진은 동북공정처럼 “중국에서 애국주의와 중화민족주의가 강조될 때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왜곡되거나 부정되는 사례가 발생했었다”고 말하며 “신시대애국주의실시강요”가 발표된 만큼 다시금 중국의 애국주의·중화민족주의가 한국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했다.[26]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에 대한 애국주의, 민족주의를 얘기하는 것이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공격적인 색채를 띨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우려가 ‘SKY-빛의 아이들’ 사태나 이른바 ‘한복 공정’, ‘김치 공정’ 등 한국 문화를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최근의 현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 제일 민감한 것은 역사와 문화 문제일 것이다. 사실 역사는 누구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다민족국가 고구려는 한민족의 전신인 예맥족 외에도 한족과 말갈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발해는 여기서 말갈족 비중이 더 높아진다. 고구려 유민 상당수는 당으로 이주해 뿌리를 내렸다. 중국의 주장이 맞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역사도 온전히 어느 나라만의 역사라고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조선족은 엄연히 한국 출신 중국인이고, 중국이 소수민족 역사의 일부로 한국사를 가르치는 것을 지적할 근거는 없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동아시아의 문화를 이끄는 선두주자였고 주변국과 수백 년간 교류를 거듭해오면서 일면 비슷해 보이는 요소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문제는 역사적인 사실까지 무시하고 왜곡해가며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 ‘수당-고구려 전쟁은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내분이었다’, ‘한반도의 정권들은 중국에 오래 조공을 바쳤으므로 중국의 속국이었다’, ‘한복은 명나라의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중국 입맛에 맞는 하나의 시각을 정사로 규정해버린 것이다.


상대가 억지주장을 할 때 기분이 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우리의 분노를 되돌아보자. 지금 내 감정이 ‘중국이 감히 한국을 자기네 속국으로 봐?’라는 다분히 민족주의적 감정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지. 모든 문제에 뜨거운 가슴으로 일일이 대응하는 건 일시적이고 소모적이며 머릿수로는 중국을 이기지도 못한다. 비논리는 강력한 정동을 불러일으키지만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건 차가운 머리다. 비논리에 논리로 대하는 것이 가장 어렵지만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대응하는 힘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1] 서유근, “유역비의 ‘뮬란’, 이번엔 “인권탄압 中공안에 감사” 비난 빗발“, 조선일보, 2020.09.08

[2] 남수현, “"요즘 중국이 한복 뺏어가려고 드릉드릉함?"…'한복 동북공정' 논란은 진짜일까”, 중앙일보, 2020.10.23.; 이건혁, ““한복은 중국 것” 황당 주장하며 한국 서비스 돌연 중단한 中 게임사“, 동아일보, 2020.11.06.

[3] 정상혁, “[정상혁의 동북아 통신]中언론 “김치공정은 한국의 트집”, 디지틀조선TV, 2021.01.18.

[4] “한복·김치 이어 한국 무형문화재 매듭장까지 소유권 주장하는 중국”, 뉴스핌, 2021.01.29.

[5] 이창규, “"다시 시작된 동북공정" 게임 'Sky : 빛의 아이들'서 출시된 갓 아이템, 논란 피하려 중국서 모양 수정했다가 비판→대표 중국에 사과”, 탑스타뉴스, 2021.02.04.

[6] 馮友蘭. 1985. 『中國哲学簡史』. 北京大学出版社, 213쪽; 조봉래, 2017, 「사상적 연원과 시대적 흐름을 통해 본 시진핑 정부의 중화민족주의 강화」, 『민족연구』 제70호, 53쪽에서 재인용.

[7] 청일전쟁 패배 이후 절충적 개혁인 양무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이 중심이 되어 정치, 교육, 법 등 청나라 사회전반의 제도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운동. (출처: 두산백과)

[8] 그렇기에 중국에서는 민족주의보다 애국주의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인다.

[9] nation은 ‘민족’으로도 ‘국가’로도 번역된다.

[10] 몽골 공화국을 외몽골, 몽골과 인접한 중국의 변방 자치구를 내몽골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을 기준으로 내외를 구분하는 중국식 명칭이다. 이 글에서는 몽골 공화국을 북몽골, 몽골 자치구를 남몽골이라고 적는다.

[11] 이남주, 2004,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와 대응방향」, 『황해문화』 45호, 220쪽

[12] 이남주, 위의 글, 220쪽

[13] 이남주, 위의 글, 221쪽

[14] 소수민족을 ‘중화민족’으로 편입하고 중국 56개의 민족을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시도가 지역 대상 공정이라면 중화민족을 ‘상상된 공동체’가 아니라 실존하는 역사로 만들려는 시도가 하상주단대공정(1996~2000, 이하 단대공정)과 중화민족탐원공정(2003~2007, 이하 탐원공정)이다. 단대공정은 전설 속의 국가(사실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로만 알려졌던 하나라와 상(은)나라를 실존하던 역사로 확정하겠다는 프로젝트로, 고대사의 기원을 앞당겨 중국사의 위상을 강화겠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단대공정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 후속 프로젝트로 탐원공정이 시작되었는데, 탐원공정은 마찬가지로 중화문명의 시원을 캐되 신화와 전설을, 특히 ‘황제’를 중국의 역사 영역으로 끌어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중국 대륙에는 기원전 1만 년 전부터 국가가 존재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민족적 자부심을 한껏 고양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15] 공봉진, 2009, 「중국 소수민족주의와 중화민족주의: 티벳과 위구르족의 민족주의운동을 중심으로」, 『국제정치연구』 제12호 제1집 참고

[16] “후진타오 "티베트 사태 인권문제 아니다"”, 연합뉴스, 2008.04.12.

[17] 칸국, 카간국, 한(汗)국은 몽골 제국이나 튀르크 계열의 국가에서 쓰인 명칭으로, 칸이 통치하는 정치 공동체를 의미한다. 일종의 제후국 개념이다.

[18] 주용식, 「중국의 국가대전략 ‘하나의 중국’: 대한족주의와 지역패권주의」, 『신아세아』 제21집 제4호, 73쪽

[19] 鄧小平, 1994, 『鄧小平文選』 第三卷, 人民出版社, 1994, 326~327쪽; 김인희, 2018, 「중국의 애국주의교육과 역사허무주의: 1988년 〈하상(河殤〉의 방영에서 1994년 〈애국주의교육실시강요(愛國主義實施綱要)〉 선포까지」, 『韓國史學史學報』 제38호, 356쪽에서 재인용.

[20] 江澤民, 「在慶祝中華人民共和國成立四十周年大會上的講話」, 『人民日報』 1989年 9月 30日; 김인희, 2018, 앞의 글, 356쪽에서 재인용.

[21] 김인희, 2018, 앞의 글, 358쪽에서 재인용.

[22] 김윤구, “홍콩 사태에 놀란 中, '애국교육' 강화…시위재발 예방 차원”, 연합뉴스, 2019.11.14

[23] 조봉래, 2017, 앞의 글, 65쪽

[24]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제도(one country, two systems)’.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안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서로 다른 두 체제를 공존시키는 것을 말하며, 중국의 홍콩과 마카오 통치 원칙이며 대만 통일 원칙을 의미한다. 중국 대륙과 홍콩·마카오·대만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국가로,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가의 주체이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국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이고, 대만은 자치권을 갖는 지방정부라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한다. (출처: 윤경우, “일국양제[一國兩制]”, 중국현대를 읽는 키워드 100, 네이버 지식백과)

[25] 김윤구, “홍콩 사태에 놀란 中, '애국교육' 강화…시위재발 예방 차원”, 연합뉴스, 2019.11.14

[26] 공봉진, 2019, 「중국 ‘신시대(新時代) 애국주의’에 관한 연구-‘신시대 애국주의교육’을 중심으로-」, 『국제정치연구』 제22집 제4호, 137쪽



참고 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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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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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규, “"다시 시작된 동북공정" 게임 'Sky : 빛의 아이들'서 출시된 갓 아이템, 논란 피하려 중국서 모양 수정했다가 비판→대표 중국에 사과”, 탑스타뉴스, 2021.02.04.

(http://www.topstar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859109, 접속 2021.02.19.)

정상혁, “[정상혁의 동북아 통신]中언론 “김치공정은 한국의 트집”, 디지틀조선TV, 2021.01.18.

(http://www.dizzotv.com/site/data/html_dir/2021/01/18/2021011880259.html, 접속 2021.02.11.)

“한복·김치 이어 한국 무형문화재 매듭장까지 소유권 주장하는 중국”, 뉴스핌, 2021.01.29.

(https://www.newspim.com/news/view/20210129000945, 접속 2021.02.11.)

“후진타오 "티베트 사태 인권문제 아니다"”, 연합뉴스, 2008.04.12.

(https://news.v.daum.net/v/20080412193610432, 접속 2021.02.19.)


블로그

중국 그리고 중국문화 (https://blog.daum.net/huangsf/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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