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세상에 핵발전소가 있을 수 없는 이유

편집위원 포들

by 문우편집위원회

지난 가을의 어느 날, 연희동의 작은 카페로 보라색 티셔츠에 노란 해바라기 배지를 단 사람들이 모였다.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재개를 백지화하기 위해 밀양에서 출발해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는 ‘탈핵탈송전탑원정대’[1]였다. 마이크를 잡은 어르신들의 목소리에서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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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콘서트에서 받은 책자[2]가 전하는 탈핵의 메시지는 너무나 명백하고 간명했다. 손바닥만 한 책자에 담긴 내용과 밀양 어르신들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는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모두를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이토록 명백한 사안에서 누구도 핵발전소 건설 재개의 손을 들어줄 리가 없다는, 충분히 여론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게 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아요”라고 덤덤히 말씀하시던 한 어르신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공론화위원회의 결과는 반전 없이 차가웠다.


신고리 5·6호기 이슈를 지켜보며 문우에서 함께 작성한 사드 자보가 떠올랐다. ‘사드는 안 된다’, ‘핵발전소는 안 된다’는 말에 일단 ‘그건 그렇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그래도 지금은...’이라고 덧붙인다. ‘지금 당장’ 변화가 필요하다는 필사적인 외침이 ‘지금은 아니야’라는 말에 묻혀가고 있다. 사드는 언제 날아올지 모를 북한의 핵무기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고, 핵발전소는 안전하고 값싸고 친환경적인 에너지원이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그 간절한 외침은 왜 생겨난 것일까? 서로 멀고도 가까워 보이는 이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책자 속의 한 문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핵발전은 군대가 시작한 것이다.


‘지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탈핵과 반전이라는 두 외침은 ‘핵’을 공통적으로 안고 있다. 우리는 흔히 핵기술을 민간 핵기술과 군사 핵기술로 나눈다. 착한 핵과 나쁜 핵, 이 둘은 얼마나 같고 다를까? 군에서 시작된 핵기술은 어떻게 민간으로 확산되었을까?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재개로 고리는 세계 1위 핵발전 밀집 단지가 되었고, 성주에 사드가 배치되며 한반도의 평화는 더욱 불안해졌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1. 착한 핵이 먼저? 나쁜 핵이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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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핵에너지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을 알아보자. 핵에너지의 근원은 세 가지가 있다. 중성자의 타격으로 불안정해진 무거운 원자가 두 개의 중간 질량 원자로 쪼개지는 ‘핵분열’, 가벼운 원자들이 결합하여 무거운 원자를 만드는 ‘핵융합’, 그리고 불안정한 원자들이 안정한 상태가 되기 위해 에너지를 방출하는 ‘방사성 붕괴’이다. 이 중 우리가 이야기하는 일반적인 핵기술에 해당하는 것은 ‘핵분열’이다. 핵분열에 주로 이용되는 우라늄, 플루토늄과 같은 핵분열성 물질을 핵원료물질이라고 한다. 핵폭탄과 핵에너지발전은 모두 이러한 핵원료물질이 ‘핵분열’을 할 때 방출되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다. 핵폭탄에서는 그 분열의 연쇄반응이 무제한적이고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지만, 핵분열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전환하는 시설인 핵발전소에서는 그 연쇄반응이 제한적으로 일어난다. 또한 핵발전에 사용되는 핵원료물질의 농도는 핵폭탄에 비해 현저히 낮고, 핵발전소에 있는 원자로에는 여분의 중성자를 흡수하는 물질도 들어있다. 그러나 원리상으로 핵발전도 결국은 작은 핵폭발을 이용해 전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초기의 원자로에서는 연쇄반응의 폭주가 가능했다. 그 예시가 바로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로이다.


이와 같은 전형적인 ‘이중 사용dual-use’ 기술인 핵기술의 개발은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당시의 목적은 에너지 개발이 아니었다. 1939년, 세 명의 과학자가 핵분열을 발견한 이듬해에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한다. 그러자 곧바로 정부 차원에서 이 기술을 군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지휘 아래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나치보다 먼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동원되었다. 그렇게 미국은 세계 최초로 핵에너지 기술을 손에 넣었고,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핵폭탄을 투하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소련도 곧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중국, 폴란드, 동독 등 국가들에 핵기술을 제공하는 원자력협정 체결을 준비한다. 이것은 핵기술을 독점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미국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핵무기가 다른 나라들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계책을 고안하는데, 바로 1953년에 공포한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프로그램이다. 이로 인해 미국과 협상을 체결한 나라는 미국의 핵에너지 기술을 제공받고 그 혜택을 누리는 대신 핵무기 포기를 약속해야만 했다. 미국의 진짜 의도는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목으로 전 세계의 핵무기 기술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었다. 한국은 1956년 ‘원자력의 비군사적 사용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의 협력 협정’을 체결하며 이에 동참하였다.


한편, 전쟁이 끝난 뒤 맨해튼 프로젝트에 동원되었던 인력과 설비는 모두 ‘원자력위원회AEC, Atomic Energy Commission’에 소속되었다. 전쟁을 위한 핵무기를 만들었던 과학자들이 이번에는 그 기술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전기를 생산하는 핵에너지발전소의 터빈과 잠수함의 엔진 등이 개발되었다. 정부와 과학자의 합작으로 나쁜 핵의 뒤를 이은 착한 핵이 태어났고, 미국은 착한 핵의 공로를 부풀려 나쁜 핵이 저지른 만행을 덮어버리려 했다.



2. 한국에 착한 핵이 들어온 건


핵폭탄과 핵에너지발전에는 더 중요한 공통분모가 있다. 첫째, 농축 우라늄이나 플루토늄과 같은 핵분열성 물질이 필요하다. 둘째, 그런 물질을 제조하고 가공할 기술이 필요하다. 이는 핵폭탄과 핵에너지발전에 필요한 조건이 근본적으로 같으며, 민간 핵에너지발전을 위해 마련된 물질과 기술을 핵폭탄 제조에도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핵 발전에는 주로 저농축 우라늄을, 핵무기 제조에는 고농축 우라늄을 사용하는데, 사실상 모든 우라늄 농축 시설에서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다. 또한 우라늄을 사용하는 원자로에서 생성되는 플루토늄 역시 핵무기 제조에 사용될 수 있다.


한국에 ‘착한 핵’이 들어오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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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핵기술 역사는 이 한 줄로 설명이 가능하다. “핵 발전은 핵무장을 꿈꾸는 국가지도자와 산업시설을 싼 전기로 운영하려는 거대 자본의 만남으로 시작된다.”[3] 박정희는 1963년 집권 이전부터 핵무기와 핵에너지발전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69년 시작된 고리 1호기의 부지 공사는 1978년에 완공되어 경상남도 양산군 장안읍 고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 생산 목적의 핵발전소가 들어선다. 그렇게 한국은 전 세계에서 핵발전소를 가진 21번째 나라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5일, 희대의 악법이라 불리는 ‘전원개발촉진법’이 제정된다. 이 법 덕분에 정부는 땅을 토지 소유자들의 동의 없이 강제로 수용하고 18개 법률의 인, 허가까지 모두 면제 받으며 핵발전소와 송전탑을 내키는 대로 지을 수 있었다. 유신 체제 아래 제정된 ‘전원개발촉진법’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70~80년대에는 오일 쇼크Oil Shock[4]가 터졌는데,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석유 값의 폭등은 ‘깨끗하고 값싼’ 핵에너지의 필요성을 역설하기에 아주 좋은 근거가 되었다. 정부의 철저한 계획 아래 1980년대에 한국은 핵발전소의 수가 급증하고 핵 발전 사업의 국산화를 시도하는 등 핵에너지발전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박정희 정부는 2000년까지 44개의 핵발전소를 건설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의 언론인이자 평화 연구원인 오트프리트 나사우어Otfried Nassauer는 이렇게 말했다. “민간 핵 프로그램의 초기 단계에서는 그 프로그램이 군사적 목적으로 쓰이는지 민간용 목적으로 쓰이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울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는 민간 핵기술은 언제든지 군사적으로 사용될 위험이 있다며 국가가 민간 핵 프로그램을 가장한 채 비밀리에 핵무기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당시 한국의 군사 독재 체제는 이에 매우 적합한 환경이었다.


한국에서 박정희가 이렇게 핵기술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핵기술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반대로 국제 핵에너지 시장은 몰락하기 시작한다. 1979년에는 미국 스리마일 섬에 있는 핵발전소에서 방사능이 유출되었고, 1986년에는 체르노빌에서 재앙에 가까운 원전 사고가 터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 1990년대에는 1년에 신규 건설된 원전이 세계적으로 단 10개도 되지 않았는데, 체르노빌 직전에는 한 해에만 33기의 원전이 새로 지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하지만 체르노빌 사고가 난 바로 그 해 한국 정부는 외국 기업으로부터 핵심 기술을 이전 받으며 영광 3호기의 계약을 체결한다. 핵기술을 가진 기업들은 무너져 가는 세계 시장에서 발 디딜 곳을 찾아야 했고, 한국 정부는 핵무기 개발의 꿈을 위해 일단 핵에너지발전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렇게 둘의 필요가 맞아 떨어져 한반도는 점차 핵에너지 강국이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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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착한 핵이 점령한 한반도, 그 이후


지금까지 착한 핵과 나쁜 핵이 어떻게 하나의 시작점에서 갈라져 나왔는지, 그리고 착한 핵과 나쁜 핵이 어떤 구조 속에서 떼려야 뗄 수 없이 존재하는지 알아보았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측면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면 지금까지의 정부가 각각을 대하는 태도와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도 성장과 공급 중심의 에너지 정책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각 정부는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을 띄고 있지만 결국 에너지 정책과 대북 정책, 그리고 그 궁극적 결과에 있어서는 2000년대 이전의 흐름을 이어받는 모습을 보인다. 착한 핵을 감싸는 동안 정부는 북한의 나쁜 핵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북한의 핵무기에 대응하는 대북 정책과 한국의 핵에너지발전을 이끌어온 에너지 정책을 같이 살펴보며 각 정부의 태도를 비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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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느 정권이던 상관없이, 한국의 에너지 정책을 이끄는 것은 핵산업계의 거대한 네트워크이다. 이 조직망은 정부, 산업계, 학계, 공공기관, 관련기관에 넓게 퍼져있으며 하나의 정치인 또는 정당이 쉽게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2000년대 초반의 김대중·노무현 정부 역시 이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두 정부는 표면상으로 보았을 때 핵에너지 발전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에너지의 합리적 소비와 신재생 에너지에 힘을 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참여정부도 기존 정부의 핵발전 정책을 극복하지 못한다. 이때의 에너지 정책은 합리적인 에너지 소비 유도, 탄탄한 에너지 공급망 구축, 신재생 에너지 개발 등 바람직해 보이는 것들뿐이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탈핵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도 않았으며 기존 정책의 현상 유지에 머무른 것이다. 심지어 핵폐기장 부지를 결정할 때 지역 간 경쟁을 부추기는 등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후 신규 핵시설 추진과정에서 주민들이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민주적 의사결정절차가 봉쇄되어 버렸다. 안정성 평가와 같은 정보의 투명한 공유는 기대하기 힘들었고, 지역 간 경쟁 속에서 핵에너지의 경제적 효과가 근거 없이 부풀려지는 구조적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결국 이러한 흐름은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핵발전 확대정책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핵에너지발전은 200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핵산업계와 정부의 물량공세와 대시민 홍보로 이미지 세탁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에서 또 한 번의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한다. 체르노빌 때와 마찬가지로 핵산업은 세계적으로 주춤하는 시기를 겪었으나, 이명박 정부는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의 원전은 안전하다’라는 논리를 펼치며 오히려 핵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한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미국 측에 한미원자력협정을 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개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시설을 건설하려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재처리를 통해 핵무기에 사용되는 핵원료물질인 플루토늄239를 추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꿈꿨던 박정희 정부에게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시설의 유치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고, 그 바람은 박근혜 정부에까지 이어졌다. 핵에너지기술 개발 뒤에 숨겨진 군사적 욕망을 이해하고 나면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과 핵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정책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가 또렷이 보인다.


앞선 정부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대선 당시 다음과 같은 공약을 내걸었다. 신규 핵발전소의 가동을 전면중단하고, 핵발전소의 건설 계획을 백지화하며, 설계수명이 다한 핵발전소는 즉각 폐쇄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한국이 드디어 탈핵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가 싶었으나, 정작 당선 이후 문재인 정부는 그 약속으로부터 한참 후퇴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신규 원전 건설의 문제를 숙의민주주의의 이름으로 ‘500명의 시민참여단’으로 대표되는 ‘국민’들의 손에 넘겨버린 것이다. 결국 지난 10월, 반대 측의 간절한 바람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재개가 결정되었다.



착한 핵도 나쁜 핵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스웨덴의 노벨상 수상자인 알벤Hannes Alfvén은 핵무기와 핵발전은 한 줄기에서 뻗어 나온 샴쌍둥이와 같다고 말했다. 핵기술이 인류의 손에 쥐어지고 그 파괴력을 실현한 순간부터 착한 핵과 나쁜 핵이라는 구분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아무리 ‘착하게’만 사용한다고 해도 핵발전소는 그 자체로 언제든지 우리의 일상을 파괴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닌다. 더욱이 핵에너지가 더 이상 ‘안전하고 값싼 미래의 에너지’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지금, ‘착한 핵’이라는 이름은 권력과 자본을 향한 욕망을 숨기기 위한 허울 좋은 포장에 불과하다. 핵무기가 있는 세상에는 언제나 핵발전소가 있고, 핵발전소가 있는 세상에는 언제나 핵무기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핵발전소가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말할 수 없다.


핵은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글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자. 밀양의 주민들은 핵발전소와 송전탑의 건설과 그 뒤의 비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규탄하며 13년 째 투쟁하고 있다. ‘핵에너지는 필요하다는, 핵에너지와 핵무기는 전혀 다른 기술’이라는 억지 주장 뒤에 핵무기를 향한 군사적 욕망이 숨어 있음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스리마일, 체르노빌, 그리고 후쿠시마를 겪고도 핵발전을 계속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고리를 끊어낼 방법은 핵을 포기하는 것뿐이다. “원자력은 안전한 그린 에너지”라는 일상적으로 주어진 프레임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평화와 탈핵은 한 길 위에 있다.


[참고문헌]

찰스 D. 퍼거슨 지음, 주홍렬 옮김 『원자력 재난을 막아라』 생각의힘, 2014

- 천주교창조보전연대 엮음 『한 권으로 꿰뚫는 탈핵: 핵 없는 세상을 위해 함께 만든 교과서』 무명인, 2014

캠팩트 지음, 김하락 옮김 『폐쇄하라!: 원자력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와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한얼미디어, 2012

김명진 외 지음 『탈핵: 포스트 후쿠시마와 에너지 전환 시대의 논리』 이매진, 2011

한겨레 신문 관련 기사


[1] 2017년 9월 24일 밀양 탈탈원정대 토크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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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책자는 신청을 통해 무료로 배포 중이다. 밀양 765kV송전탑 반대대책위 홈페이지: http://my765kvout.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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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탈핵 책자 24쪽.

[4]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나자 아랍 산유국은 석유를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하여 석유가격을 대폭적으로 상승시키는데(약 4배), 이를 오일 쇼크라 한다. 이로 인해 세계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고도성장을 멈추고 정전과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진행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시대에 진입하였다. (참고: 21세기 정치학대사전)

[5] 다음 링크로 들어가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핵발전소 현황을 실시간으로 체크할 수 있다.

원전안전운영정보시스템 홈페이지: http://opis.kins.re.kr/

한국수력원자력 홈페이지: http://www.khnp.co.kr/

[6] 대북포용에 기조를 둔 온건정책. 정책목표로는 ‘현상유지를 통한 평화체제구축, 북한체제 안정을 통한 점진적 변화 촉구, 한반도 평화와 남북교류협력의 병행’이 있다. 무력도발불용, 흡수통일배제, 남북화해협력을 3원칙으로 삼고 있으며, 6개 정책 기조는 안보와 화해협력의 병행, 평화공존과 평화 교류의 우선 실현, 화해협력으로 북한변화여건 조성, 남북 간 상호이익도모, 남북당사자 해결원칙에 의한 국제지지확보,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대북정책의 추진이다.

[7] 정책기조는 북한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한반도 평화정착, 동북아공동번영의 실현이며, 전략목표는 남북화해협력 제도화, 남북경제협력확대, 동북아 경제중심추구, 동북아다자안보 추진 등이다.

[8] 「에너지비전 2030」이란 석유문제를 자주개발과 에너지 효율의 확대를 통해 극복한다는 전략으로, 에너지 안보, 에너지 효율, 친환경의 3대 기본 방향과 5대 비전·9대 이행과제를 제시했다.

[9] 비핵 개방 3000 구상이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의 길을 택하면 한국정부가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10년 안에 북한주민의 소득이 3천 달러에 이르도록 돕겠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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