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편집위원
나는 남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여자인 것도 아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래도 꼭 성별을 밝혀 보라는 물음이 따라온다. 사람이 꼭 남자나 여자일 필요는 없다고 답한다. 지금 서있는 이 사람은 ‘나’일 뿐이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 3의 정체성을 가지고, 굳이 성별을 구분 하지 않고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왜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료한 정답을 요구하는 세상에 맞추는 것보다 내 자신을 어렵게라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더 편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어떻게 사람의 속내를 단순하게 설명해낼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나는 ‘남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번째 숫자는 당연히 ‘1’이었고, 거울에 비친 몸은 교과서나 책에 나오는 남자의 신체와 일치했다. 학교에서도, 병원에서도, 누구나 나를 남자로 대했다. 미용실에 가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짧은 커트 머리를 해주었고, 옷가게에서 때로 옷을 들춰보다 ‘거기는 여자 옷이다’라는 말을 들으며 다른 곳으로 이끌려갔다.
하지만 나에게 ‘남자다움’은 맞지 않는 틀이었다. 나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앞뒤 걱정 없이 대범하고 터프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여자’에게 끌림을 느끼지 않았다. 늘 남자다워야 한다는 주변의 시선이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그 불편함을 꺼내 보이지는 못했다. 사회는 남자답지 않은 법적 남성을 ‘비정상’으로 낙인찍고 혐오했다. 그것은 일상에서, 매체를 통해서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퀴어 혐오적인 발언들이 흘러 넘쳤다. 가족들은 성소수자의 이야기에 동떨어진 세계의 괴상한 종족을 바라보는 태도를 취했다. 어느 날 나의 짝사랑은 <쌍화점>의 동성 베드신에 대해 ‘남자끼리 어떻게 그러냐? 더럽게.’라고 평했다. 미디어는 퀴어스러운 순간들을 지저분한 웃음거리로 사용했다. 신문이나 뉴스에서도 법으로부터 소외받는 성소수자들, 그리고 그들을 욕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인간이 온전히 존중받는 사회를 상상하고 외친다. 폭력적인 사회에서 숨어있기만 하던 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성적 지향을 드러내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는 문우 사람들은 ‘나’를 밖으로 꺼내어도 괜찮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젠더 구조에 대해 함께 고민하며 ‘나’를 찾아가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다시 바라본 세상에는 수많은 젠더들이 존재했다. 개인의 젠더는 사회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내어 표현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곧 이전까지 내가 품어왔던 성적 지향 또한 이분법적인 젠더 구조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통념적으로 동성애를 구성하는 ‘남성’도 사실 기존의 폭력적인 분류를 따르고 있었다. 그 ‘남성’이라는 범주 안에도 분명 사회가 규정한 남성성에 들어맞지 않는 수많은 개인의 스펙트럼이 있을 것이었다. 즉 ‘동성애자’라는 나의 정체성도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결국 젠더를 구분하는 것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인간의 젠더를 ‘종류’로 나누고 공식화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한 사람이 주어진 공식에 들어맞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사회가(또는 공동체가) 객관식의 젠더 규범을 제시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떻게든 누군가를 소외시킬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젠더는 개인이 스스로 찾아내어 맞는 틀로 표현해야했다.[1] 그래서 나는 ‘나’ 자신부터 다시 돌아보았다. 나는 남성적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여성적이지도 않았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떠나서 ‘나’의 특성이 온전히 존재했다. 성적 지향의 대상을 남성, 또는 남성적인 사람으로만 설정하는 것도 나의 마음을 속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굳이 내가 좋아하는 ‘유형’을 규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끌림이 가는 대상은 ‘남성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는 ‘경향’을 보일 수는 있지만, 어쨌든 그 ‘사람’ 자체로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특성을 가장 가깝게 설명할 수 있는 개념들을 찾았고, ‘논바이너리(성별이분법을 기준으로 교차된 성별로서 본인을 정체화하지 않는 사람), 뉴트로이스(남성/여성이 아닌 제 3의 성별 정체성), 폴리 로맨틱(여러 젠더에게 로맨틱 끌림을 느낄 수 있음), 폴리 섹슈얼(여러 젠더에게 성적 끌림을 느낄 수 있음)’이라는 말들을 선택했다.
자신의 젠더가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는 과정은 나를 온전히 존중하는 첫걸음이었다. 이제 나는 지정 성별에 대한 억압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나’만의 젠더도 존중되는 사회를 왜곡 없이 상상해 볼 수 있다. 젠더라는 것은 그렇게 해야 맞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즉 주체적인 정체화 과정은 ‘어떻게 하면 온전히 ‘나’로 존중받는 세상이 올까?’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의 주춧돌 같은 것이기도 하다. 모두가 각자의 색을 존중받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색을 발견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진짜 ‘나’를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고, 진짜 ‘너’도 이해하고 존중하며 대화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젠더 규범을 고칠 수 있을 지 확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각자의 색을 찾아가기 위해 개인의 젠더를 직접 고민하고 언어의 틀을 선택하는 과정을 보편화하는 것이 우선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정체성을 재고할 기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나’의 젠더를 스스로 규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부터 알리고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존재한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나의 젠더에 대해 고민하고, 나의 색깔을 찾아나갈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당신만의 색을 찾아 함께 완전한 스펙트럼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트랜스젠더의 역사』, 수잔 스트라이커, 제이·루인 옮김, 이매진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개념들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젠더 규범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트랜스젠더 해방운동의 역사도 살펴볼 수 있어요. 혹여나 ‘트랜스젠더’하면 ‘하리수’씨만 떠오르신다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2]
『혐오의 시대에 맞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12가지 질문』, 한국성소수자연구회 (비매품으로, 신촌 중앙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퀴어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다룬 얇은 책입니다. 퀴어에 대한 고민을 많이 접해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가볍게 읽어보기에 좋습니다.
『후천성 인권결핍 사회를 아웃팅하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지승호, 시대의 창
퀴어 당사자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동성애’만을 주로 다루지만, ‘비정상적’ 젠더에 대한 현실적인 억압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임, 여행자’ 블로그 (https://blog.naver.com/gender_voyager)
블로그에 실린 ‘젠더 관련 용어’라는 글을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뉴트로이스’, ‘젠더플루이드’, ‘안드로진’ 같은 정체화에 필요한 개념들이 자세히 나와 있어요.
[1] 젠더의 종류를 언어화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온다면 가장 좋겠지만, 남성과 여성 이외의 젠더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않는 현실에 지금 당장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언어화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젠더를 자세하게 나누어 분류한다 해도 개인을 완벽히 설명해낼 수 없죠. 따라서 이 글에서는 현존하는 퀴어 용어를 활용한 정체화 과정을 ‘‘나’에 가장 가깝게 표현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2] 이 글에, 또는 아래의 책들에 등장하는 고민들을 해보지 않고 있었다고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정규 교육과정에서도 이런 고민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