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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70호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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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Sep 23. 2024

선의의 함정

수습편집위원 산도

다문화 가정 자녀, 그리고 어설픈 동정


평소에 다문화 가정 친구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그들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어려움까지도 직접 대면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다문화 청소년은 다문화 배경이라는 이유로 출신 국가에 대한 편견 또는 선입견을 자주 직면했고 의도치 않게 다문화 가정 자녀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서 손찌검을 받는 등 부정적인 시선을 마주하곤 한다. 실제로 이러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그저 지켜만 보거나 사실은 동정에 가까웠던 정돈되지 않은 위로를 건넨 것이 그 친구에게 상처로만 남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다문화 가정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의 필요성을 느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중국 국적의 부모님을 두고 있다. 즉, 다문화 가정의 구성원이다. 친구의 거주 국가는 한국이었지만 그의 부모님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결혼 이주민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중국어로 소통했던 터라, 친구가 나와 같은 중학교로 전학 왔을 당시엔 인사말과 간단한 의사소통만 한국어로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친구의 부모님은 오직 중국어로만 소통이 가능했다. 그러던 중, 학기가 어느 정도 지나면서 담임 선생님과 학부모가 자녀에 관해 상담을 나누는 시기가 되었다. 나와 다른 친구들은 해당 친구가 한국어 실력이 부족하고, 부모님 또한 한국어로 소통이 어렵다는 걸 알았기에 한국인 담임선생님과 상담이 수월하게 진행될지 의문을 가졌다. 그렇게 오지랖 넓은 우리들은 이 의문점에 대해 당사자는 빼놓은 채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국 ‘한국어를 못하는데 왜 굳이 한국 학교에 와서 어려움을 감수하는 거지? 부모님 중 한 분도 중국인이니, 중국 현지 학교에 다니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등 온갖 섣부른 판단을 담은 결론에 도달했다. 마지막엔 이러한 의문도 나왔다. ‘솔직히 이 정도면 그냥 중국인 아니야?’


그 와중에 나는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해 보겠다고 친구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00아, 네가 한국어를 못하니까 학부모 상담 때 담임선생님 말고 중국어 선생님께 가서 상담을 부탁하는 게 어때?”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이 제안이 나름 도움이 되고 배려심 있는 제안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막상 친구는 당황스러워하고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말이다.


후에 중학생이 되었을 때쯤, 당시 내가 건넨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친구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가뜩이나 한국어가 서툴러 모든 시간을 한국어 공부에 할애하고 있는 와중에, 친구들은 자신의 한국어 실력을 지적하며 온갖 판단을 내리고, 본인의 부모님 상황까지 고려하여 떠들고 있는 상황이 자신에게 더욱 선을 긋는 것 같았다고 했다. 후에 아무리 한국어를 잘하게 되어도, 과연 내가 그 친구들과 같은 위치에서 어울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고 말했다. 언제나 나는 한국인, 중국인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머무르게 되고, 이 점이 다른 친구들에게는 차별점이 되어 결국 영원히 그들에게 완벽히 녹아들기는 어렵지 않을까, 라고 말이다.


내가 당시 건넸던 서툰 제안은 그 친구와 다른 친구들의 차이를 더욱 명확히 짚어내는, 친구에게 그저 좌절감을 주는 제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담임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는 것과 그저 많은 과목 중 하나인 중국어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게 같을 수 있겠는가. 한국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이라는 사소하고 당연한 기회마저 그 친구는 박탈당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해당 일이 있고 나서, 새로 만나게 된 다문화 가정의 친구들을 대할 때면 그 친구에게 내가 저질렀던 실수가 자꾸 떠올랐다. 최대한 ‘다문화 가정’이라는 키워드를 머릿속에서 아예 없애려 노력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당 단어가 자꾸만 나에게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한국어 실력이 다른 친구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사실이 ‘다문화 가정’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부족한 것이라 단순히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해야 더 이상 그들에게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의 다문화 가정, 그리고 모순


우리는 지금도 많은 다문화 가정을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당장 자신의 주변에는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자신의 지인이 아니더라도 TV나 SNS를 보면 최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조나단과 파트리샤 남매와 같은 사례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다문화 가정의 존재를 접할 수 있다. 특히 조나단은 현재 유튜브 채널 구독자가 90만을 넘기고 있어 예능 대세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인기는 우리와 동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졌던 다문화가정의 구성원들이 한국 사회에 공존하는 것에 많은 사회적 관심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정부는 본격적으로 외국인 유입이 시작된 1990년대 초부터 한국 사회의 저출생, 고령화로 인한 인구와 동력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외국인의 이주를 받아들이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 주로 동남아시아, 중국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이 증가하였고 이들과 이룬 가정을 ‘다문화가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2000년 이후 한국은 외국인 거주자 100만 명이 넘는, 이른바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다문화’ 개념은 ‘단일민족주의’, ‘순혈주의’ 등의 자민족 중심 이데올로기 등에 기반한 것이었다. ‘다문화가족지원법’과 ‘사회통합정책’을 통한 정부로부터의 ‘다문화’ 개념 도입은 문화적 차원에서의 충분한 준비 과정 없이 다문화라는 개념을 적용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과 모순을 가져왔다.


다문화 정책은 이주민의 시민권 문제와 가족 당사자의 문제를 배제한 채, 새로이 구성된 가족을 유지하는 것과 ‘출생률’에 기여하는 아동 양육만을 강조하는 성격이 강하다. 예를 들어 다문화 가정의 가족, 즉 타국에서 온 이주민의 부모나 가까운 친척을 한국으로 데려와 같이 거주하는 것이 법적으로 어려우며 엄격한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이에 따라 다문화 가정 속 타국에서 온 당사자는 본인의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만 하는데, 이들의 정서적 문제는 다문화 정책에서 충분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또한 이혼이 발생할 경우, 결혼이민자의 경우 법적 보호 없이 곧바로 체류 자격을 잃기도 하며, 이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 경우, 다문화 가정 당사자의 개인적인 권리나 안전보다는 결혼을 통한 가족 유지에만 초점을 맞춘 정책이 문제로 지적된다. 


즉, 한국 정부는 이들이 다른 시민들과 동등하게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강조하기보다, 그저 사회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만을 해결하기에 급급했다. 생계유지 지원이나 충분한 교육 제공, 특별 지원 등의 정책으로 말이다. 돈을 많이 주고, 교육의 권리 등만 충족 시켜주면, 그들이 사회에 통합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다문화 정책은 여전히 순혈주의에 근거한 것이며 그들이 ‘우리’에 ‘동화되기를’ 원한 결과였다. 결국 당사자인 결혼이주자와 다문화 가족은 정책 결정 및 주요 사회 담론에서 그저 주변인으로 남게 되었다.



다문화의 낙인 효과, 그리고 인식의 부재


한국에서는 이주민, 결혼이주여성 그리고 다문화가정에 속한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출신국의 소득 수준에 따라 각기 다른 편견과 차별이 드러난다. 특히 결혼이주여성과 이주노동자의 경우 비백인의 경우가 많으며, 한국보다 소득 수준이 낮은 나라에서 ‘결혼’과 ‘취업’을 위해 이주한 사람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차별적인 표현과 혐오 발언에 쉽게 노출되었다. 다문화가정은 ‘취약 계층’과 동일시되었고, 모든 ‘취약 계층’이 그러하듯 그 취약함이 그들을 차별할 구실을 제공했다. 그 과정에서 ‘다문화’라는 호칭은 ‘차별적인 측면’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에 대한 혐오는 사적인 공간을 넘어 공적인 공간에서도 심심찮게 자행되었다. 일례로, 2007년에는 ‘불법체류자 추방 운동 본부’ 단체가 만들어지고 불법 체류자 단속과 관련한 반(反)외국인 시위를 진행하였다.[1] 혐오는 산불처럼 번져, 정부의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지원 정책을 중단하고 한국 최초의 귀화 외국인 출신 국회 의원 이자스민의 의원직을 박탈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까지 등장했다. 온라인상에서는 다문화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는 반(反)다문화 커뮤니티도 생겨났다. 그 과정에서 다문화라는 용어는 “인종과 계층의 위계적 질서를 작동시키는 은밀한 기제”[2]로써 작동하며, 차별적인 사회적 낙인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주민, 다문화가정, 그리고 난민 등 타국 출신으로 한국에 이주, 정착한 자들에 대한 (혹은 새로운 소수자들에 대한) 새로운 유형의 혐오, 편견, 그리고 차별의 방식이 다양하게 생산되는 가운데, 한국 주류 사회는 자신이 인종차별과는 거리가 있으며, 심지어는 무관하다 주장하고 있다. 


“한국인은 인종차별의 피해자로만 자리매김 되었고 한국인이 외국인을 차별할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염운옥 2019: 4)


2000년대 이후 실시된 다문화 정책 및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형태의 가정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제도적인 지원이 이루어진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문화 1세대[3]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쉽게 개선되지 않아 다문화 가정의 자녀 또한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여겨지며, 일부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내면화되어 힘듦을 겪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매일 반복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표면적으로 비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선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인종주의의 일상성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한국 사회는 때때로 스스로를 인종차별의 피해자로 여기거나, 인종차별과는 무관한 사회로 여긴다. 또한 인종주의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부인하며 정치적 올바름을 과시하는 위선적인 태도라고 역으로 비난한다. 특히 (反)다문화 및 반(反)난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인종차별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하여 자신들의 판단은 국가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합리적인 판단이며,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때 이 차별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이것이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자의적인 믿음에 있다


“한국에서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쉽게 발견할 뿐이다.” (김지혜 2019: 11)



한국 사회의 고전적 인종주의, 그리고 신인종주의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에 대한 부인 및 역 비난의 논리는 고전적 인종주의에서 비롯된다. 고전적 인종주의는 이른바 피부색 등 생물학적 차이에 따라 인종을 구별하고, 이를 기반으로 구축한 서열에 뿌리를 둔 차별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는 고전적 인종주의의 논리-동양인은 ‘낮은’ 서열인-에 따라 한국인은 여전히 인종주의의 피해자라고 여기곤 한다. 혹은 ‘동일한 인종’으로 분류된 동남아 출신 다문화 가족 또는 조선족에 대한 차별은 인종주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피부색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므로 ‘담론적 탈 인종화’라는 논리로 한국 사회는 인종차별과는 무관하다는 환상을 유지한다.” (김현미 2020: 298)


그러나 인종주의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21세기의 인종주의는 고전적인 인종주의와 같은 극단적 형태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인종주의, 즉 ‘신인종주의’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신인종주의는 피부색이나 유전적인 차이보다도 문화적 특색과 차이에 주목하고, 문화적 특성을 기준으로 사회의 주 집단이 소수자를 차별하는 방식의 인종주의이다. 즉 신인종주의에서는 구별된 ‘인종’에 더해, 해당 나라에 대한 고정관념,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와 같은 개개인의 편견과 같은 문화적인 지표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이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혼혈인, 이주민, 난민의 삶에 외모, 말투, 옷차림의 문화적인 요인들이 더해져 그들을 위험집단으로 고착하는 데에 시민들 모두 동조자였음을 확인해 준다.


“인종 없는 인종주의라는 프레임” – (Balibar 1991: 17-28)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실천되며 제도화되는 한국 사회의 신인종주의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구성원으로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소수자’에 대한 고민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신인종주의는 일상적 인종주의의 틀로 분석할 수 있는데 일상적 인종주의가 발현 형식은 크게 애매한 소속감과 프레임, 지나친 조심성과 언짢은 칭찬, 행정적 차별과 불편함으로 나뉜다.



애매한 소속감, 그리고 언짢은 칭찬


위의 여러 발현 유형 중에서도, 특히나 애매한 소속감과 프레임, 지나친 조심성과 언짢은 칭찬은 의도되지 않은 인종주의, 의도하지 않은 선의의 모습을 한 채로 현실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는 다문화 가정의 자녀를 자연스럽게 한국인 집단에 소속되지 못하게 하고, 다르게 취급하고 진정한 한국인이 아니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이는 사회가 한국에서 태어난 국내 출생의 자녀라도 한국 사람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미묘하게 다르게 대하는 시선과 불편해하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이 다 되었네”와 같은 말은 겉으로는 한국어 실력이 늘었다거나, 한국 문화에 잘 녹아들었다는 칭찬 같아 보일지 몰라도, 이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포함하지 않고 한국인으로서 인식하지 않는 태도이다. 해당 말을 내뱉은 사람은 정말 좋은 의도로, 칭찬을 해주려고 말했을지라도 다문화 가정 청년들에게는 그저 ‘언짢은’ 칭찬 정도로 들릴 것이다.


아무리 다문화 가정 청년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문화에 익숙해지고, 이를 충분히 수용하더라도 여전히 비한국인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기에 그들은 계속해서 ‘애매한 소속감’을 지닌다. 분명 한국 국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외국인 취급을 당하며, 외국에서는 당연히 한국 국적을 지닌 외국인 취급을 당하니 말이다. 도대체 본인을 내국인으로 받아 줄 국가는 어디인가 고민하며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앞서 언급한 필자의 경험에서도, 분명 해당 친구는 한국인이며 후에는 한국어도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다른 친구들과 본인 사이에는 영원한 벽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도 이러한 애매한 소속감의 결과이다.


“언제나 나는 한국인, 중국인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머무르게 되고, 결국 영원히 그들에게 완벽히 녹아들기는 어렵지 않을까”


다문화 가정 구성원들이 경험하는 미묘한 차별에는 그들을 한국인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외부인으로 지각하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차별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무엇인가 어색해하고, 눈치를 보고, 거리를 두는 식의 비언어적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이는 내부인과 외부인을 구분하려는 한국 사람들의 태도가 그들의 내면에 내재하여 있음을 보여준다.



다문화라는 ‘꼬리표’, 그리고 글로벌 인재


다문화 가정 자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영어 외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거나 외국인 부모의 문화를 잘 알고 관련 음식을 먹을 것으로 가정하여 그들을 ‘외국인’ 범위로 떠미는 행위 또한 빈번하다. 이러한 경험은 다문화 청소년들에게 타자화시키는 고정관념으로 다가오고, 다양한 배경과 개인차가 존재함에도 다문화라는 단어가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지어 버리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다문화가정 자녀는 시작부터 ‘다문화’라는 호칭을 달고 세상에 등장하고, 사회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할 때마다 ‘다문화의 새로운 OO’로 불리게 된다. 한국 부모님 한 분, 그리고 외국인 부모님 한 분. 이 사이에 출생한 다문화 가정의 자녀는 한국에서 출생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국적을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다문화 출생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들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보통의 학생들과 다른 ‘다문화가정 학생’으로 불리며, 성장하여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군 복무를 할 때도 ‘다문화 장병’[4]이란 명칭을 얻는다.


또한 다문화가정 자녀들에게 외국인 부모의 출신 국가 및 언어를 중점으로 하여 이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인정하는 것은 언뜻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언어와 문화의 특징을 전체화하여 대상을 일종의 도구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인종주의라 할 수 있다.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은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학습할 수 있기 때문에 이중 언어라는 재능을 가진 그리고 사회발전에 도움이 될 아동, 청소년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언어능력 때문에 사람들, 또한 미디어 속에서 다문화 2세대를 타국 출신 부모 나라의 문화와 언어에 능통한 ‘글로벌 리더’, 어머니 나라와 한국을 이어주고 1세대의 문제를 해결할 ‘중재자’, ‘해결사’ 등으로 표현한다. 이렇듯 타국 출신과 언어를 강조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꼬리표를 다는 일이기에 차별 행위의 시작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언짢은 칭찬’, ‘애매한 소속감’과 같이 다문화가정의 자녀에게 ‘한국어를 잘한다.’, ‘어머니 나라의 언어를 잘하니?’와 같은 질문들은 표면적으로는 차별적인 의도를 내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그들을 ‘우리 한국인’의 주변적 위치에 두는 발언이다. 또한 그들의 한국어 구사 능력은 글로벌 인적자원을 위한 필수자원으로 여겨지지만, 그들의 한국어 구사 능력은 지속적으로 질문의 대상이 된다. 만약 이를 적절히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들을 다시 글로벌 인재로 적합하지 않은 대상으로 변환시킨다.  


다문화 가정 자녀의 한국어 구사 능력, 제2외국어 구사 능력이 필수자원으로 여겨지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시로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의 추진 사례가 있다. 이들은 다문화 가정 자녀를 글로벌 인재로 육성하고, 이중언어 역량을 키울 것을 강조한다.[5] 이는 외국어에 능통한 이민자와 이중언어가 능통한 다문화 2세대를 ‘국가경쟁력’에 이바지하는 조건에 한해서만 언제든지 환영하는 ‘유용한 이민자’라고 간주하는 서술이다. 또한 이는 한국 발전에 도움이 되고 정해진 영역에서만 활약할 때 한정적으로 주어지는 조건적 환대라고도 볼 수 있다. 일상적 인종주의 속에서 다문화가정 자녀의 글로벌, 인재, 자원 등으로 잠재력을 인정하지만, 그들의 잠재력은 여전히 다문화라는 한정된 틀 속에서만 인정되며, 개개인의 능력이 아닌 외국인 부모의 특성에 제한시킨다는 문제점이 있다.



‘다문화’, 그리고 모두의 태도


그러면 ‘다문화’라는 틀과 인종주의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문화’라는 단어의 폐지도 일종의 해결 방안으로 제안될 수 있다. 하지만 언어는 사회적인 약속이기에 많은 이들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용어와 표현을 단시간에 바꾸기는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새로운 호명만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디어에서 생산하는 다문화가족 등 특정 집단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와 함께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또한 지금 중요한 것은 누가 인종주의적인가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누구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인종주의적일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곳에서부터 변화할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다문화 당사자의 변화와 실천도 필수적이다. 다문화 또는 새로운 용어가 일상적 인종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문화 가정의 구성원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직접 실천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정체성을 드러내야 한다. 본인마저 일상적 인종주의를 수용하고 본인이 동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하면, 그것은 본인을 더더욱 외부인으로 만들 뿐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저 사소한 방안 하나가 제도 개선이나 용어 개편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진다고 믿는다. 사소한 방안이라 함은, 평소 일상에서 말하고, 듣는 과정을 거칠 때 농담처럼 던지는 사소한 말에도 차별과 혐오가 깃들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상대의 말에도 귀 기울여주는 행위이다. 앞서 필자의 경험에서도, 해당 다문화 가정의 친구와 조금의 대화라도 시도했더라면, 서로의 입장과 생각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여주는 행위를 했더라면, ‘중국어를 더 잘하니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 대신 중국어 선생님과 상담하는 게 더 좋을 거야’와 같은 섣부른 판단과 어설픈 제안은 하지 않았으리라. 당사자는 쏙 빼놓은 채 나눈 대화는 그저 우리를 인종주의와 한 발짝 가까워지게 할 뿐이었다. 어설픈 제안을 하기 전에 그 친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타인이 아니라 ‘우리’가 되기 위해 한국어는 또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이에 대해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어쨌든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였다면.



[1] 정용인. “불법체류자 추방운동은 외국인 혐오가 아니다?.” 주간경향, 2008.01.01, https://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_id=16441. 

[2] 황경아. 「반다문화 담론의 부상과 언론의 재현: ⟨조선일보⟩와 ⟨한겨례신문⟩의 반다문화 관련 기사에 대한 텍스트분석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 & 문화』, 32권, 4호, 2017, 143-1

[3] 다문화 가정 자녀의 부모님

[4] 박형윤 외. “2025년 ‘다문화 장병’ 1.5만명…한개 사단 책임진다.” 서울경제, 2023.5.17, https://www.sedaily.com/NewsView/29PM67DNQA. 

[5] 이지혜. “다문화자녀를 국제적 인재로… 여가부, 이중언어 학습지원 강화.” 코리아넷, 2023.8.04, https://www.kocis.go.kr/koreanet/view.do?seq=1045712. 


참고문헌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

김현미 외. 『어떻게 국민은 난민을 인종화하는가?』. 갈무리, 2020.

염운옥. 『낙인찍힌 몸: 흑인부터 난민까지, 인종화 된 몸의 역사』. 돌베개, 2019.

황경아. 「반다문화 담론의 부상과 언론의 재현: 와 의 반다문화 관련 기사에 대한 텍스트분석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 & 문화』, 32권, 4호, 2017.

박형윤 외. “2025년 ‘다문화 장병’ 1.5만명…한개 사단 책임진다.” 서울경제, 2023.5.17, https://www.sedaily.com/NewsView/29PM67DNQA.

이지혜. “다문화자녀를 국제적 인재로… 여가부, 이중언어 학습지원 강화.” 코리아넷, 2023.8.04, https://www.kocis.go.kr/koreanet/view.do?seq=1045712. 

정용인. “불법체류자 추방운동은 외국인 혐오가 아니다?.” 주간경향, 2008.01.01, https://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_id=16441. 

Balibar. Is There a ‘Neo-Racism’?. London & New York: Verso,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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