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미는 손, 붙잡는 손

수습편집위원 여백

by 문우편집위원회



이름이 지닌 힘은 꽤 크다. 이름은 대상에 대한 정의이며, 각인이고 또 기억이다. 이름은 단순히 주민등록부에 올라가 있는 짧은 글자 몇 개가 아니다. 나를 정의하고, 너에게 기억되며, 타인에게 각인되는 것. 그렇게 내가 나로 불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이름’이다. 그리고 여기 잊을 수 없고, 잊히지 않을 이름이 있다. 태일. 전태일. 어쩌면 ‘전태일 열사’, 이 다섯 글자로 우리에게 더 익숙할 그 이름. 이 글의 시작은 그 이름을 조금 다르게 불러 보는 데에서 시작한다. 바로 음악극 〈태일〉이다.


우리는 전태일 열사를 어떻게 알고 또 기억하고 있는가? 그의 이름을 처음이자 가장 자주 접한 공간은 분명 교과서일 것이다. 경제 발전에만 사회적 관심이 치중되어 있던 시기에 노동운동가로서 자신의 그 한 몸을 불사른 사람.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열사’, 우리가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위인’. 그에 대한 이러한 정의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음악극 〈태일〉도 그 정의를 지적하지 않는다. 감히 누가 그를 부정할까. 다만, 음악극 〈태일〉은 위인, 열사 전태일이 아닌 인간 전태일의 삶을 조명한다. 그의 성장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비극적 생애를 강조하는 대신 그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평범한 사람이었는지를 담백하게 전달한다. 음악극 〈태일〉의 각본을 쓴 장우성 작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여러분, 이런 삶이 있었어요. 한번 들어봐 주실래요? 사실 저는 절대로 태일이처럼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가끔은, 조금은 그런 용기를 내보고 싶어요.”라고 조금은 담담하고 조근조근한 어조로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이 태일을 무대에 올리며 목표한 것이라고.


이러한 점에서 나에게도 음악극 〈태일〉은,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평범한 태일의 삶과 갈등, 투쟁을 보여줌으로써, 무심코 그를 열사이자 위인으로, 일종의 철인처럼 인식하고 있던 나의 시선을 반성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소극장 무대라는, 가까운 거리에서 눈앞의 사람을 온전히 ‘태일’로 바라볼 수 있는 소극장 무대라는 환경이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마음의 거리도 좁혀 주었다. 그래서인지 비극적 결말이 예정된 인물이 평범한 일상 속의 순간을 즐기며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이 더욱 마음에 짙게 남았다. 그리고 그가 제 앞에 주어진 참혹한 현실과 변하지 않는 기득권에게 분노하며 ‘나라도 가야만 한다.’ 결심하는 순간에서, 조금 솔직하게, 내 마음의 소리는 태일에게 외치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그가 가기로 결심한 이유를 눈으로 보면서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외로운 투쟁을 벌이던 그가 맨몸으로 저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방안이었음을 인지하면서도, 나는 그를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기에, 극이 끝난 후에도 끝까지 극을 보고 나온 후 오래도록 고민했던 것 같다. 지금 이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태일’을 향한 일시적인 연민으로 멈추는 것이 아닌,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수많은 또 다른 ‘평화시장’들, 부조리와 고달픈 투쟁에 대한 연대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다양한 노동 외의 투쟁들이 계속되는 시간 속에서, 음악극 〈태일〉이 아직 시의적인 극인 것처럼, 극 속의 태일이 던지는 “나는 기억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기꺼이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그런 연대가 보다 강화되길 바랐다. 최근, 우리는 ‘함께’와 ‘연대’가 주는 거대한 힘과 성과를 체험한 적이 있지 않은가.


사실 사회문제와 연대에 대해서, 나는 2024년 겨울 전까지의 나는 줄곧 시선을 돌려 왔던 것 같다. 불편한 것들을 눈앞에서 잠시 멀리하면서, 저것은 내 일이 아니라는 그런 마음을 가지곤 했다. 그저 나서서 행동하는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 데에서, 그들이 평온한 제 일상을 방해한다며 볼멘소리하는 타인에게서 저들을 두둔하는 데에서 그쳤을 뿐이다. 종종 정부와 공권력의 무능과 병폐를 지적하고, 나 자신을 나름의 ‘깨어있는 민주 시민’이라고 자위하면서, 그저 방관자의 위치에 서 있었다. 눈에 생생하게 보이는 그 수많은 부조리를 목격하면서도,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저 혼자 중얼거리거나 머릿속으로 생각하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어쩌면 저 뜨거운 저항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행동하는 것은 저기 저 특별한, 타오르는 이들에게 맡겨 두자며(부조리에 맞서 투쟁하는 이들이 전혀 특별히 더 정의롭고 대단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평범을 방패로 하여 현실의 연대에서 무심코 선을 긋고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태원 참사, 채상병 특검, 동덕여대 강제 공학 전환, 그리고 기타 정부와 그 비선에 대한 비리와 부조리의 해명과 사죄 등을 외친 수많은 투쟁을 흘려보냈다. 그들의 행동을 지지하면서도, 저 사이에서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무섭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렇게 내가 겁쟁이처럼 외면한 대표적인 투쟁이 바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이동권 시위였다. 대학로의 공연을 좋아하는 나는 매주 몇 번씩 혜화에 방문하는 편인데도, 문우에서 관련 이야기를 다루기 전까지는 전장연 시위가 혜화역과 마로니에 공원에서 자주 열린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서울교통공사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하면서도, 부끄럽게도 그 일이 나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처지도, 그들의 편에서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는 처지도 아니었기에 그 일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더 말을 얹지 않고 싶었다.


추측하건대, 아마 나와 같은 어중간한 입장을 공유하는, 소위 ‘평범한’ 이들도 분명 적지 않게 존재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런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회의 시의적인 의제에 대해 나름 진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들과 함께 부조리한 공권력과 기득권 따위에 저항하고 투쟁하기엔 용기가 없는 이들. 자신이 그 부조리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한 걸음 뒤에서 소심한 분노를 토해내기만 하는 그런 이들. 혹은 마음만큼은 연대하고 싶지만 내가 낄 자리가 아닌 것만 같아 겁을 내고 여전히 지켜보기만 하는 이들. 그렇게 내 일은 아니라는 가장 커다란 변명 뒤에 숨어있던 이들을 ―, 우리를 연대의 광장으로 이끈 것은 바로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는 당사자성이었다.


계엄이 포고되던 날 밤을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 아마 많은 국민이 아직 그 밤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2024년 12월 3일, 오후 11시경. 혜화역에서 국제캠퍼스로 돌아가던 그 4호선의 지하철 안에서 모두가 똑같은 뉴스 화면을 마주했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영상. 언제 찍었는지 정확한 시간조차 알 수 없는 기계적인 영상 안에서(물론 보도는 실시간으로 나왔지만) 들리는 단어들의 조합은 순간적으로 내가 과거를 살고 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책이나, 영화에서만 보았던 비현실적인 단어들의 연속이었다. 북한 공산 세력, 종북 반국가 세력, 그리고 비상계엄.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4호선 선바위역에서 인천행 버스로 환승해야 했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하늘에선 축축한 눈이 내렸다. 손이 시렸지만, 끊임없이 실시간 뉴스가 재생되는 유튜브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헬기 소리가 들린다는 말들, 국회로 군인들이 진입하고 있다는 보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계엄, 계엄, 계엄.


이날 역사를 바꾼 것은 곧장 국회로 달려가 몸으로 군대를 가로막은 시민들이었다. 한 시민의 “계엄 소식을 듣자마자 국회로 달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한 어느 시민의 인터뷰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또한 당시 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의 국회로 모여달라는 라이브 방송도. 긴급한 순간에도 누군가는 불의를 막고자 몸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행동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나는 뒤로 물러나 겁에 질릴 수 있었다. 초조히 상황을 지켜보고 계엄이 해소되는 순간,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상황이 종료된 후에야, 뛰쳐나간 이들이 전혀 특별한 무언가를 지닌 이들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동료 시민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 상황이 종료된 후에야 차차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행동하는 이들에 대한 마음속 거리감이 한 발짝 크게 좁혀진 순간이었다.


그 후 광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행동만큼이나 중요한 연대의 가치를 느끼게 되는 일이 생겼다. 바로 ‘남태령 대첩’이다. 음악극 〈태일〉에서도 나타났듯이, 행동하는 이들을 좌절시키는 것은 기득권의 탄압, 그리고 사람들의 무관심이다. 그러나 여전한 기득권의 탄압 속에서도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 함께하고 싶은 마음과 행동. 이 모든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연대는 거대한 힘과 의미를 지니게 되며, 그렇게 마음이 모여 기득권에 맞선 민중의 승리를 이끌어 낸다. 이를 보여준 것이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 대행진과 남태령의 밤이었다. 집회 및 시위는 정당한 국민의 권리임에도, 트랙터를 이끌고 상경한 전봉준 투쟁단에게 서울시는 교통 통제라는 허울뿐인 명분을 실어 강압적인 제재를 가하였다. 이 소식은 SNS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고, 시민들은 서울시의 이러한 불의와 부조리에 저항하며 늦은 밤 한달음에 남태령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몸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은 물자를 보내거나 전화로 항의하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뜻을 함께하며 연대하였다. 이튿날 경찰의 차벽이 풀리고, 끝내 남태령 고개를 트랙터가 넘어선 순간. 춥고 배고팠던 시간 속에서 온기를 나누고 역무원의 작은 다정이 더 커다란 위로로 연대로 다가왔던 순간. 그 순간들 속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그저 함께하고 있다는 마음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고 힘이 되는 일인지 남태령의 밤을 지켜보며 알게 되었다. 당장 달려 나가 현장에서 저들과 합류하지는 못하더라도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마음을 보태는 것도 분명한 연대이며, 그렇게 쌓인 목소리와 마음이 모여 세상을 조금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무엇보다 그날 남태령으로 달려간 이들이, 자신이 여기 있는 이유를 외치던 당당한 시민들이 그 순간만큼은 성별, 나이, 직업이나 신분, 정체성에 따라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그저 동료 연대자로서 그 공간에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에서 연대의 순간, 개인이 외치는 각자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지고, 동시에 각자의 의미를 담아 거대한 강과 같은 흐름을 만들어 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으로 달려온 이유에 대해 서로가 귀를 기울여주며, 차벽으로 그들을 가로막은 저 공권력의 탄압에 함께 맞서며, 다양한 소리가 공명을 이루어 더 큰 파동으로 퍼져 나가는 모습 말이다. 계엄이 선포되던 날, 그저 퇴근 후 저녁 시간을 누리고 있던 평범한 시민들이 국회의 문을 맨몸으로 가로막았다는 것. 남태령으로 향한 시민들이 함께 모여 온기를 나누고 부조리한 공권력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내 옆에 있는 이가 누구여도 괜찮았다고 느낀 것.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때때로 함께 외치며 그저 다 함께, 따로 또 같이, 동지라는 이름으로 묶여 투쟁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일상적으로 써 왔던 평범한 소시민이라는 단어는 연대에 있어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동지’가 된 이상, 연대는 더 큰 연대로 확장된다는 것을 이후의 수많은 광장에서 직접 볼 수 있었다.


내란 수괴의 탄핵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이루어진 후에도, 광장에서 함께 외치며 형성된 그 라포(rapport)가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함께 투쟁했던 동지’라는 유대 아래, 훨씬 많고 다양한 이들의 관심이 사회 각 의제로 쏟아져 내렸다. 탄핵 선고 전, 광화문 집회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이 남태령 대첩의 감사를 표하며 무지개떡 1만 개를 돌린 일이 있었다. 왜 하필 무지개떡이었을까. 공식적으로 발표한 입장은 없지만, 많은 이들이 그 무지개떡을 보고 성소수자를 떠올린 것에서 연대의 확장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당사자성과 무관하게, 마냥 멀게만 느껴졌던 타인의 말을 새삼 귀 기울여 듣게 된 후 느낄 수 있었던 공감과 이해 그리고 뜨겁게 달아오른 광장의 열기가 전도되어 함께 타오르는 수많은 의제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연대의 기회 말이다. 광장의 열기가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그저 이 경험을 통해 사회적 의제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몇 초라도 더 머무르는 것, 그 정도의 변화와 발전은 우리가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런 흐름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니 테고 말이다.


나 역시 그렇지만, 또한 마찬가지지만 탄핵 집회 이후 사회적 의제에 대한 연대의 시선이 많이 늘어났음을 종종 실감하곤 한다. 개인적으로 인 이야기지만 SNS 등지에서 발견하는 예상치 못한 친구들의 노동운동 서명 요청이나, 퀴어페스티벌 참가 게시글과 같은 것들 말이다. 특히 이번 퀴어페스티벌의 경우, 역대 최다 인원이 참석했다고 한다. 광장에서 우리는 서로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뜨거운 외침을 들었다. 그 짙은 유대의 기억으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관심을 가지며 커다란 연대에 마음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견 작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시선이 한데 모였을 때, 우리가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더 나은 세상을 정의할 때, 누군가가 스스로를 불사르지 않아도 마음속 불꽃이 하나, 둘씩 타오르지 않을까. 일상이 회복되고 사회가 새로운 걸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그저 특정 시점으로 그저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눈비를 맞고 굳어진 단단한 땅처럼 더 안정적으로 디딜 수 있는 새로운 모습의 사회로 나아가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광장의 기억이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연대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했으나 거창한 결론은 끝까지 내리지 못했다. 당장 나조차도 지금 제대로 된 연대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부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광장에서 만난 이들을 보고 새로이 배우고 함께하고자 마음먹은 이들이 있다. ‘태일’은, 광장은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함께 했던 그 시간의 기억은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지난 투쟁의 이들을 동지로, 먼저 앞서나간 선배로 기억하자고 말한다. 그렇게 한 발짝씩 거리를 좁혀 나간다. 내밀고 있는 동지의 손을 맞잡기 위해. 연대가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달려나가는 그 등을 지켜보고 박수를, 응원을, 지지를 보내고 싶기에 말이다.



참고문헌

아떼오드, 「음악극 태일」 프로그램 북, 아떼오드, 2025

강광석, 「28시간의 남태령」, 시민언론 민들레, 2024.12.25.

김세희, 「탄핵 시위에 왜 이렇게 무지개 깃발이 많냐구요?」, 오마이뉴스, 202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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