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틀막의 역학 – 캔슬 컬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수습편집위원 에멜무지로

by 문우편집위원회



여는 말


현대 사회에서 캔슬 컬처(Cancel culture)는 더 이상 단순히 취소나 배제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경제적 역학이 작동하는 복잡한 시스템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표면적으로 캔슬 컬처에서는 ‘도덕적 정의’, ‘사회적 합의’라는 명분이 등장하지만, 사실 이를 통해 캔슬 컬처 수행자는 ‘권력 관계 재편’, ‘집단 정체성 수호’ 등의 이권을 수호하고자 한다. 따라서 캔슬 컬처를 비평함에 있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두 집단의 충돌에 대한 이익형량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다만, 캔슬 컬처에 대한 분석이 이익형량과 주장에 대한 비평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의 주장을 ‘왜 공론장에서 지워버리려 하는지’, 그 결론을 내리게 된 배경과 사회적 이해관계 또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캔슬 컬처에 대해 한영인 문학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캔슬 컬처는 국가권력이 명시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자율적인 시민사회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현상이다. 시민불북종 운동이나 반정부 활동이 부당한 정치권력에 맞선다면 ‘캔슬 컬처’는 정치적/윤리적/문화적/역사적/풍속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창작물이나 창작자 개인을 겨냥한다. 여기서 ‘캔슬’은 미리 잡아 둔 식당 예약 같은 걸 ‘취소’한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어떤 창작물이나 창작자의 흔적을 깨끗이 제거하고 말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띈다.”


따라서 이 글은 캔슬 컬처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확산되고 정당화되며, 그 과정에서 어떤 논리구조 및 방법론이 동원되는지에 주목하려 한다. 각각의 집단이 어떻게 ‘캔슬’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지, 공론장에 참여한 자들이 어떻게 각각의 이해와 목적을 가지고 서로의 목소리를 지우려고 하는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캔슬 컬처가 침묵시키려는 타인의 자유와 존엄이 무엇인지 조금 더 다가서려고 한다. 소수자와 비주류의 존엄을 침해하고, 공론장을 권력자와 다수자의 잣대로 획일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캔슬 컬처는 앉아서 지켜볼 수만은 없는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허구에 기반한 캔슬 컬처, 인지부조화, 프레이밍 등 캔슬 컬처를 위시한 주장들이 갖고 있는 특징과, 캔슬 컬처가 발현하게 된 복합적 배경과 비선형적인 요소를 분석하는 데에 집중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텍스트마이닝과 카오스 이론 등의 방법론은 집단 행동의 양태와 예측불가능한 사회적 행동의 궤적을 가시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할 것이다.



금기와 사회적 합의는 어떻게 캔슬 컬처가 되는가? - 도서관 민원폭탄과 차별금지법 입법 논의


법학의 영역에서 고의와 과실은 구분된다. 고의는 행위자가 결과 발생을 인식하고, 그것을 의도하고 용인한 경우다. 하지만 과실은 결과 발생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인식이 있었더라도 그것을 회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경우이다. 고의와 과실 모두 특정 행위로 인한 결과는 존재하지만, 그것에 의도가 담겨있는지 여부에 따라서 두 개념은 명확히 구분된다. 그래서 형법은 과실범보다는 고의범을 처벌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금기와 불문율은 고의일까 과실일까? 금기는 공동체 내에서 절대로 어겨서는 안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규범이며, 불문율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지키려고 하는 규범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개념은 ‘공동체 구성원이 금기와 불문율을 알고 있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이를 위반하는 것은 행위자의 단순한 부주의라기보다는. 규범의 존재를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어기려는 ‘고의’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이렇게 불문율과 금기를 위반함으로써 금기에 의문을 제기한 행위자를 공동체에서 집단적으로 배제하려는 시도가 곧 캔슬 컬처의 중요한 역학으로 작동한다. 이처럼 금기와 불문율에 기반한 캔슬 컬처는 대놓고 수면 위에서 벌어지는 취소 요구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라는 명분 아래에서 금기와 불문율을 통해 은밀하고 조직적으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갖는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최근 몇년간 전국 공공도서관에 이어지고 있는 특정 학부모단체와 종교단체의 민원 릴레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성적 내용’을 담고 있거나 ‘동성애 코드’를 포함한 도서들의 리스트를 만들어서 전국 공공도서관에 해당 도서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해당 도서를 제거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아동들로부터 유해 출판물을 보호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들의 도덕적 기준과 종교적 가치관을 공동체의 불문율로 강제하려는 ‘고의’가 숨어있다. 반복적인 민원과 집단적 압박을 통해 공공도서관의 서가에서 자신들이 자의적으로 선정한 ‘유해 도서’를 빼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헌법이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출판물에 대한 검열’의 새 지평을 여는 신박한 시도이자,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민원폭탄은 공무원들의 피로를 증가시키고 도서관의 다양성을 억압하며 이용자의 읽을 권리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캔슬 컬처의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적 합의와 금기가 어떻게 캔슬 컬처로 이어질 수 있는지 조금 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김민석 총리는 국무총리 후보자 시절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차별금지법을 본인의 인권과 관련해 절박하게 요구하는 목소리가 하나 있고, 자신의 개인적인 또는 종교적인 신념에 기초해서 차별금지법을 비판할 때 (해당 입법으로) 자신이 처벌받는 것 아닌가 하는 절박한 반대의 목소리가 있다”며 “이 두 가지 본질적인, 헌법적 목소리에 대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즉 두 가지 목소리가 상충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를 통한 이익형량이 실현되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한 것인데, 얼핏 보기에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정합성을 띄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발언에서 차별금지법 도입 논의 진전 의지를 살펴볼 수는 없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 조치나 다짐보다는 여전히 사회적 합의라는 명분 아래 문제해결을 회피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이다. 혐오발언과 차별을 막으려는 실질적 진전이 없다면, 혐오발언들이 가진 캔슬 컬처의 요소를 전혀 억누르지 못한 채로 여전히 수많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캔슬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법리적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모호성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입법기관에서의 논의를 통해 해결할 문제이다. 더군다나 이 발언의 주체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 국무총리 후보자이다. 아무리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지언정 국무총리의 발언은 분명 아득한 높이의 기득권에서 발화되어 아래로 흘러 내려올 수밖에 없는 무거운 발언이다.


김민석 총리의 발언이 더욱 개탄스러운 이유는 김민석 총리가 주장한 ‘처벌받는 것 아닌가 하는 절박한 반대의 목소리’가 허구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논의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지난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안에서, ‘차별적 발언을 한 사람을 처벌하는’ 내용을 담은 입법안은 없다. 오히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미처 규정하지 못하는 차별을 당했을 때, 그 피해를 국가기관이 적극적으로 구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수동적인 법률안에 가깝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논의는 새로운 금기와 역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기존의 금기와 불문율로부터 차별받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시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금지되는데, 이는 표현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주장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 동성애를 하지 말라는 주장 자체에 이미 다른 인격체의 자유권을 말살하려는 방향성이 잔뜩 담겨있는데, 해당 주장을 하는 사람의 자유만 존중되어야 하고, 차별받는 사람의 자유는 틀린 것이니까 가르치려 들고 억압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들의 주장처럼 성소수자들이 다른 이에게 동성애를 강요할 수는 없듯이,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이 성소수자에게 동성애를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두 가지 방향—소수자와 다수자 모두—를 품고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안은 차별을 행한 사람을 처벌하는 조항조차 존재하지 않는데, 반-차별금지법론자들은 사회적 합의와 자유권 침해를 명분으로 허수아비 때리기까지 행하고 있지 않은가.


김민석 총리는 과거에 이렇게 말했다. “인류가 동성애만 하면 지속 불가능”해진다고. 개인의 행복이 진정 번식을 통해서만 달성되는 가치인가? 모든 사람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번식 해야만 하는 의무가 주어진 존재인가? 번식과 재생산이 현대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지켜야만 하는’ 불문율의 지위를 잃었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처절한 출산율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창이 아니라 방패에 가깝다. 무의식 속에 담겨 있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 차별을 억제하고, 차별당한 이들을 구제하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줄기차게 반대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논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이들은 ‘동성애를 반대할 권리’, 즉 ‘창을 들 권리’를 억압하는 것이 자유권의 억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성별/인종/국적/출신지역 등을 바탕으로 상대의 인격을 공격하는 주장들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이 시점에서, ‘내’가 하는 말은 자유에 근거해 존중받아야 하고 ‘상대’가 하는 말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중성을 언제까지 용인해야 하는가.



캔슬 컬처와 인지부조화 - 대선 3차 토론


나와 다른 주장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때로는 인지구조의 왜곡이 필요하기도 하다. 없는 사실을 있다고 판단하거나, 그 반대를 행함으로써 억지스러운 캔슬 컬처를 유도하는 것이다. 긴 말 할 필요없이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


21대 대선 3차 TV토론 당시 이준석 후보는 문제가 된 ‘젓가락 발언’ 이후, 진보 진영의 위선을 비판하기 위해 해당 발언을 동원했다고 해명하였다. 하지만 권영국 후보는 분명 발언이 끝나기 전에 이준석 후보가 언급한 사례가 ‘민주노동당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라고 부정했으며, 따라서 권영국 후보의 발언에서 위선임을 확인할 수 있는 언어/비언어적 행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 영상의 유튜브 댓글에서는 ‘이재명의 눈치를 봤다’, ‘좌파의 위선이 드러났다’ 등의 여론이 지배적이었는데, 토론을 시청한 사람의 입장에는 다소 의아한 반응이었다. 토론을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1. 저 발언이 이재명 자녀가 온라인에서 했던 발언인지 몰랐으며 2. 권영국 후보가 해당 발언의 맥락을 모두 알고 있다고 단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으로 이해했는데, 온라인 댓글은 이미 ‘회피=위선’이라고 결론내리고 맹폭하는 단계로 접어들어 있었다.


권영국 후보의 대답과, 토론 이후 사후 대처는 분명 이준석 후보가 원한 것처럼 ‘위선적 행태’로 정의 내리기에 다소 취약한 정황 근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준석 후보가 원하는 답을 권영국 후보가 직접 언급 했었다는 점에서, 위선이 아니라 이준석 후보의 토론 전략에 말려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댓글창은 권영국 후보를 위선적 인간으로 결론내렸을까. 일단, 댓글창과 토론 전문 사이에서 실제로 어떠한 간극이 발생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방법론으로 ‘대선 3차토론에서 이슈에 따라 지지자들의 인지부조화가 확인되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먼저, 대선 3차토론에서 ‘젓가락’ 발언을 담은 언론사의 유튜브 영상과, ‘법인카드’ 발언을 담은 언론사의 유튜브 영상에서 각 후보들의 멘트를 텍스트로 따온다. (해당 영상은 ‘이재명 이준석 젓가락’, ‘이재명 이준석 법인카드’ 두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가장 상위에 노출되며 조회수가 가장 높은 두 영상을 선정한 것이다. 각각의 댓글 수는 17000개 이상을 확보하여, 최대한 많은 양의 텍스트를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각각의 영상들에 달린 댓글들을 긁어와서, TF-IDF 기법을 통해 영상에서 추출한 텍스트와, 댓글 텍스트 사이의 코사인 유사도를 측정한다. 이 기법은 서로 다른 두 텍스트 뭉치가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다루는 단어, 의미 집합의 중첩도를 수치화해서 두 텍스트 뭉치의 유사도를 직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양적 접근법이다. 가령, ‘법인카드’를 후보들이 이야기했고, 댓글에서도 ‘법인카드’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면, 두 텍스트 뭉치의 코사인 유사도는 가깝게 산출될 것이다. 반면, ‘법인카드’를 언급했는데, 이재명 후보의 다른 정치적 이야깃거리, 혹은 다른 정치적 프레임이 더 많이 언급된다면, 영상과 댓글 사이의 코사인 유사도가 크게 측정될 것이며, 따라서 댓글이 해당 영상이 가진 정치적 논쟁보단 다른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댓글들이 많은 집단적 인지부조화 상태에 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1.png JTBC, 조회수 141만, 댓글 수 17668개
사진 2.png 채널A, 조회수 225만, 댓글 수 19553개
사진 3.png



두 영상에서, 전체 댓글과 토론 전문 사이의 코사인 유사도, 자주 노출되는 상위 50개 댓글과 토론 전문 사이의 코사인 유사도를 측정한 결과는 위 그래프와 같다. 흥미로운 것은 두 영상 모두에서 상위 50개 댓글과 토론 전문 사이의 거리가 전체 댓글과 토론 전문 사이의 거리보다 크게 측정되었는데. 이를 통해 두 가지를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자주 노출되는 댓글에 의해 인지부조화는 재생산된다고 볼 여지가 있다. 둘째, 추천을 많이 받은 댓글은 의도적으로 인지부조화를 유도하기 위한 정치 고관여층에 의해 작성된다고 볼 여지가 있다.


따라서 댓글창에서의 논쟁은 토론에서의 논쟁과 그 내용 면에서 상당한 괴리가 있으며, 이는 토론 영상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실에 대한 논의를 피하는 인지부조화로부터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토론 영상이 시사하고 있는 사회정치적 사실에 대한 논의보다는 상대 진영 후보를 깎아내리면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캔슬 컬처가 댓글창에서 벌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객관적 토론 맥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신념과 불일치할 때, 이 불일치에서 오는 불편함을 실제 정보를 왜곡하거나 선입견에 부합하는 방향의 댓글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해소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지적 왜곡을 기반으로 쓰여진 댓글은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의 주장을 더욱 공고화하고, 다른 정치인의 논리적 정합성을 약화시키려는 온라인 공론장 캔슬 컬처로 작동한다 볼 수 있다. 또한 존재하는 사실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공론장의 다양성을 뭉개버린다. 이런 인지부조화에 의한 캔슬 컬처는 캔슬을 시도한 사람의 논리적 정합성을 담보하지도 않고, 감정적 표현에 기댄 조롱과 비생산적 논의로 이어짐으로써 공론장의 황폐화를 가속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다만 이러한 코사인 유사도 분석만으로 '인지부조화'라는 심리학적 개념을 단정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유사도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은 인지부조화 외에도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분석은 댓글과 토론 내용 사이의 '괴리'를 수치적으로 확인한 것에 의의가 있으며, 이러한 괴리 현상이 온라인 공론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해석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괴리 자체가 공론장의 건전성에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주목할 만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프레임과 캔슬 컬처 - 이대남 극우론


이대남 극우론은 목적론적 오류에 기반한 캔슬 컬처의 전형적 예시다. 엘리트 이대남/저학력 이대남의 박리, 언어적 과격화, 오프라인 행동(서부지법 폭동 등), 기타 혐오 논란은 그저 ‘극우=이대남’의 프레임으로 결론내릴 수 없는 복잡한 현상이다. 엘리트 이대남의 정치적 과대대표, 메시지의 미디어 중심 이동, 그리고 비수도권 기반 이대남의 실질적 기회 박탈과 불만, 지역/계층마다 완전히 분리된 이해관계. 이 모든 층위를 무시하고 단순히 이대남을 ‘극우화’라고 포장해버리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또다른 캔슬 컬처이자 카오스의 증폭이다.


박권일 사회학자는 “극우화는 주로 엘리트들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퇴행”(박선경, ‘한국 정치 엘리트와 민주주의 퇴행’)이긴 하지만, 디지털 플랫폼을 중심으로 혐오·차별적 ‘밈’을 폭발적으로 생산·소비하는 주체들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퇴행’도 분명히 존재한다. 한국의 극우화는 그렇게 위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퇴행이 동시발현하고 상호작용한 결과” 라고 밝히며, 극우화의 복잡한 서사를 단순화하는 것이 어려움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사회조사를 통해 드러난 한국사회 극우의 실체는 어떨까. 연세대학교 복지국가 연구센터와 한국리서치 <여론 속의 여론>팀이 협력한 “수면 위로 떠오른 극우 – 한국 사회 극우의 현주소” 조사에 따르면, 한국사회에서 극좌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은 0.2%인데, 극우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은 21%에 달했다. 해당 조사에서는 ‘극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체제의 기득권층에 대한 불신을 기반으로, 권위적 리더십과 급진적인 수단을 통해 기존 질서를 재편하려는 정치적 정서를 의미하며, 이들은 기득권에 대한 반감을 가지면서도 외국인과 같은 외부 집단에 대해 배타적이다. 또한, 불평등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지고 자연스럽다고 여기며, 약육강식 사고에 익숙하다. 동시에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가치도 중시한다. 한국의 맥락에서는 반공주의도 중요한 속성이 된다.”


이런 기준을 토대로 조사한 결과, 남성 중 24%, 여성 중 19%가 극우 성향을 띠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70세 이상 고령층이 29%, 20대 청년층에서 28%가 극우로 분류됨으로써 극우성향은 청년과 고령층에 집중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20대 남성이 20대 여성에 비해 1.5배 이상 극우 비중이 높으며(20대 남성의 33%, 20대 여성의 22%), 30대도 극우 남성이 극우 여성에 비해 2배 많은 비율을 차지함이 확인되었다(30대 남성의 20%, 30대 여성의 10%). 또한 젊은 여성의 극우 성향 비율 또한 고령층 여성의 극우 성향 비율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도 주목해 볼 만하다.

이 결과는 단순히 ‘극우’라는 학문적 정의를 사용할 수 있는 공동체 집단이 세대와 성별을 불문하고 분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권위적 리더십과 불평등의 선천성, 약육강식과 외부 집단에 대한 배타성을 모두 띄고 있는 한국사회의 극우는 어느 세대, 어느 성별이든 존재하는 것이지 ‘이대남’에 국한된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집단에 ‘극우’ 딱지를 붙여서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 극우 성향을 갖게 되는지 그 기원을 추적하는 데에 있다.


고령층이 극우적 성향을 띄게 된 이유를 추론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결에서 전쟁에서 비롯한 반공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한 의식은 다른 세대들의 그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상대적으로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단정적인 추론은 위험하다.) 하지만 20대 극우화의 이유는 단편적이지 않다. 몇 가지 추론은 가능하다. 커뮤니티에서의 권위주의 추종, 군대에서 경험한 선입견, SNS와 유튜브 필터버블에의 노출 등 여러 원인이 떠오르긴 한다. 하지만 명시적으로 이들이 왜 극단성을 갖게 됐는지 몇 가지 원인으로 단정해버리기엔 지금의 젊은 층이 겪은 사회적 서사가 노년층의 그것과는 너무 상이하다. 어떤 근거를 들이대든 선언적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다만 이에 관해 조귀동 칼럼니스트는 한 가지 흥미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부울경 2030 남성 중 윤 전 대통령 탄핵 인용에 동의한다는 응답이 56%인데, 이는 대구/경북지역의 윤 전 대통령 탄핵 찬성 여론보다도 더 낮게 집계된 것이 특이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귀동 씨는 두 가지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이 지역의 극우 성향이 급증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제조업 위축에 따른 청년 취업난이다. 둘째, 청년 여성들의 대규모 수도권 이주에 따른 극단적 성비 불균형이다. 시도별 성비는 경북이 여성 100명당 남성 135명으로 가장 높고, 울산(133명)과 경남(129명) 순이다. 연애-결혼-출산으로 이어지는 생애주기 과업에서 탈락한 젊은 남성이 이곳에 집중돼 있는 것이다.”


또한 옛 동독 지역이 청년 여성의 유출로 인해 극단적 남초 사회가 되었는데, 이것이 급진우파가 성장하는 강력한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두 지역 사이의 사회인구적 맥락이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런 사회인구적 유사성이 극우로 이어진다고 인과관계를 단정짓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배경에서 유사한 정치성향이 발현된다는 것은 이대남의 극단화가 어떠한 지리적,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한 폐쇄와 기회 단절에 의해 가속화될 수 있다는 점을 추론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또한 동남권 청년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짚었다. 그는 IMF 이후 외벌이 모델이 깨지고, 2015-2016년 동남권 주력산업인 조선업과 자동차 산업의 부진(대우조선해양 법정관리)으로 인해 정규직 대신 사내 하청을 고용하는 것으로 인력구조가 변화하면서 ‘남성 생계 부양자 경제’가 완전히 무너지게 됐음을 지적한다. 양 교수는 “청년들은 조선업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업 하청 노동을 기피하고 있다”고 밝히며, 숙련 현장 노동자의 수도권 사업장으로의 이탈, 붕괴된 산업가부장적 외벌이 체제, 양질의 여성 일자리가 교사와 공무원을 제외하곤 전멸해버린 지방의 현실 등 동남권 청년이 마주하고 있는 끔찍한 사회경제적 상황을 정확히 보여준다.


따라서, 이대남을 극우로 프레이밍하면서 벌어지는 캔슬 컬처는 되려 고학력-수도권-엘리트 청년 위주로 작동하는 청년정치 서사를 강화시키며, 정확히 계층적으로 반대에 위치해 있는 지방 청년들의 목소리를 ‘캔슬’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선 이후 여러 뉴스 기사에서는 ‘20대 남성이 이준석을 많이 지지했다’라는 출구조사 결과만을 바탕으로 이대남의 보수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언급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준석 후보의 목소리가 모든 젊은 남성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준석 후보가 진정 청년친화적인 후보였다고 하려면 상세 공약집에서 지역 청년에 대한 구체적인 공약을 제시해야 했을 것이지만, 상세 공약집에서는 지역 청년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이준석 후보가 대선 기간 띄웠던 어젠다들은 모든 청년을 아우른 것이라기보다는 고학력-수도권-엘리트 남성 청년들에게 높은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의 일환이었다고 보인다. 달리 말하면, 고학력-수도권-엘리트 청년의 서사가 정치적으로 과대대표될수록, 지방 청년들이 겪는 문제는 더더욱 엘리트 이대남의 그림자에 숨겨진 채로 ‘캔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나긴 서사들과 복잡한 역학들을 어떻게 도식화할 수 있을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카오스이론을 활용한 접근법이었다. 카오스이론의 핵심은 ‘초기 조건의 아주 미세한 차이가 시간이 흐를수록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비정형적 파동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있다. 수많은 사회경제적 변수들과 이슈들을 하나하나 짚어내기조차 버거운 이 사안에서, 카오스 이론은 이 문제를 ‘도식화’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맞춤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카오스 이론은 선형성과 인과성을 최대한 배제한 채로 이대남 담론의 다변수방정식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


V1: 경제적 요인 - 취업난, 빈부격차 등 ‘돈 벌 기회 상실’
V2: 인구학적 요인 - 지역별/세대별 성비 불균형, 지방 여성 청년의 수도권 유출
V3: 온라인 환경 - 익명성에 기반한 커뮤니티의 언어적 과격화, 필터버블로 인한 확증편향
V4: 정치적 요인 -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 특정 정치인에 과하게 의존해버리는 프레임
V5: 문화적 요인 - 전통적 가치관과 가부장성의 붕괴, 젠더 의식의 변화


산업사이클로 인한 인력구조조정과 고용불안이 V1 경제적 변수를 변화시키며, 이로 인해 청년 여성이 유출됨으로써 V2 인구학적 변수가 흔들린다. V3 온라인 환경 변수는 V2로 인해 발생한 파동을 증폭하며, V4를 통해 거시적 현상으로 표출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모든 변수들은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변수가 변수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변수, 가령 분노와 반감에 기반한 극단성 등으로 이어지며 사회 전반에 카오스를 불러오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도식을 더 발전시켜 수치해석에 기반한 실제 모델을 구현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닫는 말


점증하는 혐오와 배타성 앞에서 서서히 무기력해지는 기분을 느끼는 나날이다. 그렇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어떻게든 낙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위선과 정치적 올바름을 지적하는 이들은 주장의 정합성보단 말하는 이의 일관성을 비판하는 것에 천착해버린다. 반면에,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구조를 견뎌내야만 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과도하다’, ‘언더도그마’, ‘분열을 조장한다’는 프레임 아래 손쉽게 무시된다.


캔슬 컬처의 역학은 명분의 진위, 논리적 정합성을 따지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누가 발언권을 획득할 것이며, 누가 영원히 침묵해야 하는지의 문제, 즉 권력의 구조적 배분이 논쟁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렇기에 공론장은 결코 평등할 수 없으며, 첨예한 이해관계 속에서 ‘합의’라는 이름 아래 폭력은 은폐된다. 따라서 오늘도 누군가의 발언은 ‘캔슬’된다. “모두가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이 허상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그렇기에 “누구의 목소리만 공론장에서 허용되고 있는지”를 추적하는 것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공론장에서 어느 한 쪽을 선 혹은 악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캔슬 컬처의 역학이 소수자와 비주류의 목소리를 조직적으로 침묵시키려는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캔슬 컬처에 동원되는 논리와 감정보다는 캔슬 컬처가 만들어낸 소외와 배제의 현장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해와 포용이 아니다. 오히려 불편한 현실을 끝까지 응시하는 시선, 강요된 침묵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비대칭성이 갖고 있는 결점을 구조적으로 비판하는 힘이다.

그것이 무기력 앞에서 우리가 놓지 않아야 할 최소한의 희망이고 책임일 것이다.



무차별적인 금서 지정 요구로 고통받는 전 세계의 사서들과 연대하며 이 글을 맺습니다.




참고문헌


한영인. “자유주의, ‘캔슬 컬처’, 윤리”, 민음사 문학잡지 릿터 33호, 2021-12-07.

김도연, “ ‘산업 가부장제’의 몰락, 이대남들이 분노하는 이유 들어 봤나”, 슬로우뉴스, 2025-06-20, https://slownews.kr/139090

리차드 김, “차별금지법: 17년째 국회서 쳇바퀴… 제정되지 않는 진짜 이유”, BBC 뉴스 코리아, 2023-08-02, https://www.bbc.com/korean/news-66065811

박광연, “[단독] 김민석 “모든 인간이 동성애 택하면 인류 지속 못해” 과거 차별금지법 반대 발언”, 경향신문, 2025-06-16, https://www.khan.co.kr/article/202506160600111

박권일, “ ‘이대남’ 극우화보다 중요하다…한국의 극우화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한겨레, 2025-07-04,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06238.html

이재훈, “김민석 “차별금지법… 처벌 받을까 절박한 목소리 있다”, 한겨레21, 2025-06-18,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7510.html

이용규, “이대남 기자가 본 ‘이대남 극우론'의 실체”, 주간조선, 2025-06-28, 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42903

조귀동, “연애 못하는 불만, 부·울·경 '이대남'의 윤석열 지지 토양됐다”, 한국일보, 2025-06-30,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2509570000611

최영준, 한지은, ““[기획] 수면 위로 떠오른 극우 – 한국 사회 극우의 현주소”, 한국리서치, 2025-05-28, https://hrcopinion.co.kr/archives/32972

JTBC News, “[현장영상] "젓가락을" 이준석 돌발 질문, 분위기 점점 싸해지더니.. #대선토론 / JTBC News”, 2025-05-27, https://www.youtube.com/watch?v=aW9kuxEIptc

채널A News, “이준석, 이재명 '법카' 거론하며 "집에 코끼리 키우세요?" [대선현장] / 채널A”, 2025-05-27, https://www.youtube.com/watch?v=dT_vS6oAJ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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