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여성서사를 찾아서

편집위원 함함

by 문우편집위원회

※ 주의: 〈서브스턴스〉 등 일부 창작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과 본문에 첨부된 SNS 게시물 캡쳐본에 비속어 및 과격한 표현, 혐오발언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 읽을 때 참고해주세요.



그 여자는 ‘여성혐오’


사진1.jpg @masterofblt의 트윗 (https://x.com/masterofblt/status/1920424652100305156?s=46)


지난 5월 트위터(현 X)의 모 소위 유명 ‘페미니즘 스피커’[1]계정이 올린 트윗이다. 해당 트윗은 네이버 웹툰과 포스타입에서 연재 중인 가나바 작가의 〈30대 백수 외톨이 일기〉에 등장하는 일부 장면을 올리며 이를 여성혐오라고 지적하였다. 일은 안 하면서 쓸데없이 사치 부리고, 노력 없이 그저 놀기만 하는, 그런 여자 백수에 대한 고정관념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어 문제라는 이야기이다. 많은 인용[2]이 이 트윗에 동의했다. 역겹다는 감상부터 아무리 자전적인 이야기여도 여성 혐오적일 수 있다, 와중에 몸매 부각은 왜 하냐 등의 의견들이 주를 이루었다. 한편, 해당 트윗에 반대하는 의견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저 자신이 동의하지 않거나 보기 꺼려진다는 이유로 여성혐오라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부터 작품을 보긴 했는지, 그저 개인의 자전적인 이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까지, 동의하는 의견보다 적지만 어느 정도는 존재했다.


이래저래 의견이 갈리는 걸 보고 있다 보니, 도대체 어떤 만화인가 궁금해져서 한 번 찾아봤다. 캡처가 아닌 만화의 전체 맥락은…그냥 우울증을 겪는 작가의 일상과 그에 대한 자기 비하, 자조였다. 트윗에 올려진 장면들은 자기 일상을 이야기하며 “이래서 나는 안 되나보다~”하는 식으로 자기 비하와 혐오가 이어지는 컷들이었다. 3화 정도를 쭉 보고 난 후, 누군가에겐 불쾌하겠지만, 이 만화가 단순한 여성혐오 작품으로 라벨링 되기엔 복잡한 이야기라는 감상이 들었다. 분명히 작가가 자기 삶의 일부를 녹여냈을 이 이야기가 몇 컷의 묘사로 여성혐오 작품이라는 낙인이 찍힌 게 맞는 일일까? 다소 ‘트위터 주류 감성’(주체적이고 강한, 이상적인 여성상을 페미니즘으로 추구하는 경향)에서 벗어난 한심함은 그저 여성혐오에 불과한 것인지…. 내 감상이 트윗을 올린 계정과 그에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닿지는 않겠지만, 맥락에 분리된 묘사만 보고 여성혐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었다.


트위터 생태계에서는 이런 논쟁(이라기엔 진흙탕 싸움에 가깝지만)이 일상이다. 이것보다 더 일찍, 올해 초 아카데미에서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가 여우주연상에서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서브스턴스〉를 제치고, 후보작 중에서 작품상을 받은 것으로 논란이 되었다. 〈서브스턴스〉는 여자들이 겪는 ‘외모정병’[3]을 보여주는 좋은 페미니즘 사회 고발 물이지만, 〈아노라〉는 남자 감독이 여성 성노동자 소재로 만든 영화라며(이에 얽혀서 이런저런 비평과 논란이 있었지만) 아카데미와 〈아노라〉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웃기게도 〈서브스턴스〉 역시 이러한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 — 수가 괴물이 되어 파멸하는 원래의 결말부보다, 엘리자베스 — 수에게 모욕을 준 남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파멸하지 않는 게 더 페미니즘적이었을 거라는 의견이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매우 할 말이 많지만 참겠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성 서사 티어표’ 제작과 ‘빻장 제보봇’으로 대표되는 2018—2020년이 있다. 나는 이 모든 시기에 항상 인터넷에 있었고, 절기처럼 반복되는 ‘빻은 장르’, ‘여혐 작품’, ‘여성 서사’ 논쟁을 겪으면서 굉장히 지치고 화도 났지만 동시에 이 현상이 정말 흥미로웠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나며 그동안 정말 많은 여성 서사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나왔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작품들에서 ‘덜’ 페미니즘적인 부분을 찾아내고, 여전히 완벽한 여성 서사를 찾고 있다. 어떤 작품은 ‘코르셋[4] 투성이’고, 어떤 작품은 여자가 결국 죽고, 어떤 작품은 남자가 너무 많이 나오고, 이런 묘사는 여성 혐오적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여성 서사 작품들은 덜 여성(주의) 서사가 되거나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여성 서사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하는 건 좋다. 좋은 작품들을 새로 많이 알아가기도 하고, 내가 생각 못한 관점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논쟁의 목적이 결국 좋은/안 좋은 여성 서사를 가려내고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여성 서사 만들기에서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여성 서사에 대한 더 깊은 논의를 하고 싶은 마음에, 그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벌어진 ‘여성 서사’ 이슈를 되짚어보는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완벽한 여성서사는 어디에 있는가


사진2.jpg 이미지 출처 - 이세린, "여성 서사와 여성 창작자, 어떻게 지지할 것인가 - 토크쇼 '여성주의, 스토리텔링을 질문하다'", ACT!, 115호

알탕[5], 준여성서사, 여성 서사, 페미니즘…


위의 표는 2018—2019년도쯤 트위터에서 만들어져 널리 퍼진 ‘여성 서사 티어표’이다.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드라마 등 여러 작품 중에 빻은 작품은 거르고 여성 서사, 그중에서도 ‘진정한 여성 서사’를 가려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그런 믿음은 여전히 존재하고, 여성 서사에 관한 논쟁은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트윗 절기’로 남아있다. 우선 여성 서사가 왜 트위터의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트페미’라는 말과 함께 트위터가 온라인 페미니즘의 중심으로 뜨겁게 달궈진 2010년대 중후반의 상황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2010년대의 ‘페미니즘 리부트’ 시작 이후, 2010년대 중후반 ~ 2020년 초반 트위터를 주축으로 한 미러링[6]과 총공 운동[7], 여성혐오/범죄 공론화(스쿨미투, 페미니즘 사상 검증, N번방 사건 등), 청원 전단지 돌리기 등 실천 행동은 트위터와 여초 커뮤니티로 대표되는 주류 온라인 페미니즘 을 형성한 일들이었다.[8] 하나의 ‘여성’ 집단에 대한 강조(‘보지’[9] , ‘여성분들/여자들아’, ‘소녀들’이라는 지칭), 이론보다는 개인 경험의 공유, 각종 실천(탈코르셋[10] /4B 운동, 비혼여성 재테크[11] 등)에 방점을 둔 이 온라인 페미니즘은 당시 문제로 삼은 사회와 일상의 영역뿐만 아니라 문화 · 예술 영역에도 뻗어 나갔다. 온라인 페미니즘은 다른 집단에 비해 문화 · 예술 콘텐츠 소비 정도가 높은 편이라 일명, 오타쿠와 덕질의 성지로 불리던 트위터와 여초 커뮤니티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다. 그렇기에 문화 콘텐츠에 등장하는 여성혐오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온라인에서 발생하는 여성혐오, 폭력의 큰 주체 중 하나가 남성 오타쿠로 대표되는 DC 인사이드 등의 남초 커뮤니티였기 때문에, 문화 콘텐츠의 내용은 물론, 이를 소비하는 서브컬쳐 문화에서의 페미니즘적 시각과 실천은 당연했다. 이런 페미니즘 실천은 남성 창작자와 그 창작물에서 여성 혐오를 지적하고 고치길 요구하는 것을 넘어, 여성에게 모욕과 불쾌감을 주지 않는, 그리고 페미니즘적 의미를 담은 작품을 찾고 창작하는 행동으로 나아갔다.


페미니즘 예술과 여성 서사 작품 공유(여성 아티스트/페미니즘 작품을 추천하는 해시태그 및 후기)는 물론 글/그림 창작(‘디폴트 여캐’[12] 창작부터 에세이와 웹 만화까지)이 줄을 지었다. 공유, 창작과 함께 주를 이룬 것은 바로 비평이었다. 이는 기존 작품 속 여성 혐오적 요소를 찾아 비판하고, 그와 다른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작품들을 찾아 좋은 부분을 찾아 읽어내는 작업이었다. 이런 실천을 통해 여성 서사는 단순한 남성 서사의 반전, 가끔 찾아서 즐기는 독특한 무언가의 위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이자 좋은 작품이라 평가받는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여성 서사에 대한 주목은 온라인 페미니즘의 결과인 동시에 중요한 페미니즘적 실천이었다. 페미니스트라면 남성 제작자의 여성 혐오적인 작품, ‘알탕 서사’에서 벗어나 여성이 만든 여성 서사를 ‘소비’하는 게 당연해졌다. 이렇게 온라인 페미니즘 실천에 있어, ‘여성 서사 = 페미니즘’이라는 하나의 공식이 성립하였다.


이런 여성 서사 붐은 전통적 여성상에서 벗어난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 남성과의 로맨스와 현모양처를 넘어선 여성들의 복잡한 욕망을 보여주었다. 여성이 불쾌함과 모욕을 느끼지 않아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이야기는 온/오프라인을 막론한 여성혐오와 폭력에 지친 여성들에게 카타르시스와 즐거움을 주었고, 페미니즘의 동력이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성 서사 붐을 통해 문화·예술 영역에서 진정한 페미니즘을 향한 돌파구를 찾아낸 것만 같다. 하지만 2010년대 중후반에 불어온 여성/페미니즘 서사 열풍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2010년대의 온라인 페미니즘은 트위터 타임라인, 여초 카페 등 인터넷 공간을 여성이 폭력이나 반페미니즘적 비난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기능하기도 했다. 그에 따라 많은 온라인의 페미니스트들이 이 공간을 바깥세상과는 다른 안전한 곳으로 유지하려 했었고, 그 유지 전략 중 하나가 구분 짓기였다.[13] 한창 여성 서사에 관한 열띤 논쟁이 일어나던 2010년대 후반, 온라인 페미니즘은 단순히 ‘남성’을 배제하는 것 넘어 ‘진짜 여성’ 혹은 페미니스트를 구분하려고 시도했다: 1) 기준 세우기 — ‘바람직한’ 페미니스트의 기준 세우고, 페미니스트라면 반드시 그 기준에 맞추도록 했다. (대표적으로 4B — 비섹스, 비연애, 비혼, 비출산 —의 실천과 탈코르셋이 있다.) 2) 그리고 페미니스트가 아니거나, 앞에서 말한 바람직한 페미니스트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여성은 ‘흉자’, ‘명예 한남’, ‘남미새’[14] 라고 지칭했고, 3) 세력 나누기 — 바람직한 기준을 따르는 페미니즘을 ‘래디컬’로, 그와는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은 ‘쓰까’, ‘리버럴’[15] 등으로 부르며 세력을 나누었다. 페미니즘에서 일정한 도식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여성 서사를 소비하는 관행도 이런 기조를 따랐다. 여성 서사를 소비하는 것이 흉자/남미새와 페미를 가르는 구분이 되었고, 바람직한 페미니스트의 기준에 따라 어떤 작품은 훌륭한 여성 서사 작품으로, 어떤 작품은 ‘부족한 여성 서사’나 여성 서사가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여성 서사에 관한 도식화가 일어난 것이다. 글의 초반부에 등장한 ‘여성 서사 티어표’가 여성 서사의 기준이 도식화된 결과이다. 트위터는 단문 메시지로 이루어지는 분산적인 소통을 특징으로 하므로,[16] 논의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여성 서사를 둘러싼 다양한 의미가 단순화되기 쉽다. 또한 당시 온라인 페미니즘이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여성 서사에 일정한 기준을 만들어 실천(여기서는 여성 서사의 소비)과 쉽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흐름이 생겨났는데, 이는 더욱 즉각적인 여성 서사 기준의 도식화를 끌어냈다. (이 도식화된 조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사진3.jpg 소위 '알탕서사'를 소비하는 여자는 페미니즘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여성 서사에 대한 도식은 여성 서사 작품에 접근하는 것을 더 손쉽게 만들어 준 동시에, 어두운 측면도 있었다. 일례로 2010년대 중후반에는 ‘빻은[17] 장르 제보봇’, ‘여혐00 제보봇’ 등의 계정에서 알 수 있듯 여성혐오 없이 ‘클린한’ 작품을 찾고 ‘빻은’ 작품을 걸러내는 문화가 생겨났다. 기존 작품의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과 여성 서사 작품에 대한 비평이, 특정 계정에 어떤 작품이 ‘빻’았고 어떤 작품이 ‘클린’하고 바람직한 여성 서사인지 제보하고, 그 특정 계정은 이를 알리는 식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문제시되는 여성 혐오적 요소가 담긴 작품이나 좋은 여성 서사 작품이 소개되기도 했지만, 작품 표면에 드러난 특정 요소나 장면이 ‘완전한 여성 서사’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면(소위 ‘빻았다면’), ‘빻은 작품’ 혹은 바람직하지 못한 여성 서사로 라벨링 되기도 했다. 백합[18]계의 고전으로 불리며 기성 체제에 대한 반항을 소재로 삼은 작품 〈소녀혁명 우테나〉의 경우, ‘여혐 백합’, ‘좋지 못한 여성 서사’라는 평가 여론이 형성된 적이 있다. ‘코르셋을 찬 인형 같은’ 여성 캐릭터가 전사로 등장하고, 일본 남성이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여혐 백합으로 제보한 이와 그 제보를 게시한 계정은 해당 작품이 무엇을 다루고 어떤 내용인지에 대한 설명 없이 ‘주체적 코르셋’, ‘개말라 코르셋’, ‘일남’ 등으로 작품의 ‘빻은’ 부분을 언급하기만 한다. 즉 작품을 엄밀히 비판하기보다, 특정 요소의 유무, 특정 기준 도달 여부만으로 작품이 ‘빻았’는지 혹은 여성 서사인지 결정해 버린다. 이것은 작품에 대한 낙인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올해 개봉한 영화 〈검은 수녀들〉이 그런 문제를 겪었다. 남성 감독에 의해 자궁, 임신, 유산 등의 소재가 ‘구리게’ 등장한다는 후기 게시물이 트위터에서 많이 공유되면서, 이 영화에 ‘여혐 작품’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실제 영화를 본 많은 관람객이 해당 영화의 이야기가 좋은 여성 서사이며, 여성혐오라고 언급되었던 소재에 큰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평가 내렸음에도 말이다.


사진4.jpg 여혐 백합 제보 봇에 올라온 〈소녀혁명 우테나〉. '인형 같은' 캐릭터 조형이 주로 여성혐오로 지목되었다.


사진5.jpg 해당 트윗 말고도 〈검은 수녀들〉을 호평하는 트윗이 이어졌다.



이것이 '여성서사'다


잊을 만하면 꼬박꼬박 여성 서사에 관한 논쟁이 돌아옴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성 서사의 정확한 학술적 정의는 없다. 물론 여성 서사를 다루는 논문에서 ‘여성을 주체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그리며 여성 인물들의 다양한 면모를 그려내는 소재와 장르의 다양화에 기여하는 것’[19]으로 정의하기도 하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여성들이 주연인 것’이나 ‘여성 창작자가 만들어낸 것’ 등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온라인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는 이런 정의가 너무 포괄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런 정의 아래에서는 ‘여성 인권을 증진할 만한’, ‘충분히’ 페미니즘적이지 않은 작품도 여성 서사로 간주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여성 서사가 반드시 페미니즘 서사는 아니기에 여성 서사를 포괄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주류 의견 대다수는 여성 서사가 꼭 페미니즘적 의미를 내포하도록 세부적인 기준을 만들어 특정 작품이 여성 서사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평가했다. 앞선 장에서 등장한 여성 서사 티어표처럼 세부적인 기준을 덧붙여 안 좋은/부족한/좋은 여성 서사를 구분하는 식으로 말이다. 바로 밑에 제시된 4가지 조건이 트위터에서 ‘바람직한’ 여성 서사를 구성한다고 언급되는 것들이다. 타임라인의 성향(팔로우한 계정이 주로 온라인 래디컬 페미니스트 계정인지, 혹은 그냥 오타쿠인지 등)과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주로 이 4가지 조건의 범주 안에서 작품의 ‘여성 서사 정도’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다.


1.섹슈얼리티/로맨스 금지


여성영화의 척도가 된 벡델 테스트의 기준 중 하나가 ‘남성에 대한 것 이외에 다른 대화를 나눌 것’인 것처럼, 온라인 페미니즘의 여성 서사의 조건은 남성과의 연애적/섹슈얼적 관계가 등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티어표에 등장한 것처럼 ‘혐애’, ‘혐혼’[20]의 등장은 여성 서사 탈락이거나 아직 부족한 여성 서사로 취급되었다. 대체로 남성과의 로맨스가 지적의 대상이 되지만, (아래에 등장하는 ‘여혐 백합 제보봇’처럼) 여성 간 연애적/섹슈얼적 관계가 지적받는 경우도 있다.

사진6.png 여혐 백합 제보 봇이 만들어진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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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서 화제작이었던 〈정년이〉와 동시기에 방영된 〈정숙한 세일즈〉에 대한 호평. 퀴어 캐릭터와 여성서사 지우기 등으로 논란이 된 〈정년이〉와 다른 여성 서사를 보여주어 이를 호평하고, 트위터에 많이 화제가 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는 트윗들이 꽤 있었다. 한편으로 사진8의 트윗처럼 비판하는 의견도 종종 볼 수 있었다.


2.남자는 스쳐 지나갈 뿐


1번 조건과 이어지는 것으로, 여성 서사에서 남성에게 허락되는 역할은 오로지 스쳐 지나가는 조연이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남성의 비중이 너무 높으면 안 된다. 비록 키링남[21]이라 할지라도, 오롯이 여성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게 여성 서사의 포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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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메시지를 전한다고 해도,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남성 조연이 많이 나오는 경우, 혹은 남성과의 로맨스가 존재하면 좋지 못한 여성 서사로 평가받는다.


3.코르셋을 벗어라


2010년대 중후반, 탈코 운동이 온라인 페미니즘 행동주의의 중심이 되면서 창작물 속 여성의 조형과 꾸밈, 성적 물화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와 함께 바람직한 여성 캐릭터상으로 ‘탈코르셋’, ‘디폴트’, ‘탈성애 화’[22]등이 제시되었다. 다양한 체형과 모습의 여성 캐릭터들이 나오는 작품들이 주목받은 한편(웹툰 〈합법해적 파르페〉, 〈극락왕생〉 등), 코르셋을 차거나 성적 대상화될 여지가 있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은 ‘빻고 구린’ 작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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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여자들이여, (몰락 아닌) 성공하라


여성서사가 진정한 여성 서사로 평가받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여성이 ‘성공’한다는 데 있다. 여성이 그저 불행하고 고통받는 상황에 있으면 안 된다. 그런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꼭 벗어나서 정상까지 성장해야 한다. (그저 불행하기만 하면, 불행 포르노[23]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여기서 당연히 남자의 도움은 금물. 그런 것은 고리타분한 신데렐라 스토리에 불과하며, 반드시 주체적으로 여성이 성공해야 한다. 여기서 성공은 조건 1, 로맨스나 섹슈얼한 관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사진12.jpg 여성이 겪는 외모 강박을 바디호러로 풀어낸 〈서브스턴스〉는, 여성이 결국 망가지기만 할 뿐인 '불행포르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기준을 충족한다면, ‘완전한 여성 서사’가 될 수 있다! (창작 과정에서 다른 윤리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여성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여성 서사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 서사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서 여성 서사로 볼 수 있는 작품의 범위가 달라진다. 어떤 때는 ‘미소녀 동물원’[24]도 여성 서사에 해당할 수 있으며, 또 어떤 경우에는 〈캡틴 마블〉과 〈히든 피겨스〉만이 진정한 여성 서사가 된다. 이런 부분을 생각할 때, 온라인 페미니즘이 만든 여성 서사의 기준과 ‘완전한 여성 서사’를 찾아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으로 소비한 관행은 무엇이 여성 서사인지 빠르게 판단하고 사람들이 그러한 작품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끔 도왔다. 일종의 여과기 역할을 수행하여, 여성과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서사 작품을 탐색하는 데 쏟을 에너지와 비용을 줄이게끔 한 것이다. 하지만 앞 장에서 말한 것처럼, 맥락이 삭제된 상태에서 특정 요소에만 치중해 작품을 낙인찍어버리거나, 개별 작품의 해석보다 여성 서사 판별에 많은 에너지를 집중시켜 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여성 서사를 판단해 온 기준들은 깊은 논의나 성찰 없이 현재까지도 완전무결한 조건처럼 전해지고 있다.


다시금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한 때이다. 인터넷에서 여성 서사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시작한 지 대략 10년 가까이 흘렀다. (인터넷의 수많은 페미니스트가 완벽하다고 생각한) '완전한 여성 서사'라는 개념도, 그를 정의하는 기준도 생겼지만, 항상 인터넷에서는 '여성 서사'가 어디에 있는지 애타게 찾고 있다. 여성 서사를 둘러싼 수많은 논의, 점점 더 많이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가 등장함에도 결벽적으로 ‘여성 서사'를 부르짖어야 한다면, 지금까지의 여성 서사 담론을 다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온라인 페미니즘을 통해 구성된 '완전한 여성 서사'에 관한 믿음과 그 조건, 여성 서사 판별과 소비의 모든 관행을 뜯어보자. 지난 10년을 통해 완성된 것만 같은 '여성 서사' 개념이, 정말로 여성을 위한 것인가? 이 '완전하고 진정한 여성 서사'가 다른 모든 여성 서사가 지향해야 할 최종 목표이며, 여성 독자들이 현실을 이겨낼 힘을 쥐여주는가?



멋지고 당당하고 다 죽이고...아무튼 ‘다 함’


여성 서사의 정의가 어떻게 내려지든 간에,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여성 서사‘라 하면 멋지고 당당한, 그리고 성공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캡틴 마블〉, 〈블랙 위도우〉 같은 여성 영웅이나 〈미스 슬로운〉처럼 성공적인 여성 권력자, 또는 〈오션스8〉, 〈버즈 오브 프레이〉처럼 남성 악당을 처리하는 서사 말이다. 이런 작품들, 정말 재밌긴 하다. 경쟁에서 남자들을 전부 이기고, 못된 것들은 손 봐주고, 끝에 가서 승승장구하는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속이 시원하고 통쾌하다. (실제로 나는 여성이 남성을 향해 복수하는 내용의 작품들을 굉장히, 굉장히 사랑한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무례하고 나쁜 자들, 남성들을 전부 물리치는 여성 이야기가 있는 한편, 그 주변에는 그렇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다지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다. 인기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서 당당하게 잘 사는 타입은 아니다. 어떤 점에서는 찌질하고, 한심하고, 이상하다. 그런 ‘괴상망측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글에서 계속 언급한 〈30대 백수 외톨이 일기〉, 노골적이고 문제적이었던 만화 〈미지의 세계〉, 해외 시트콤 〈미란다〉와 〈데리 걸스〉, 영화 〈미쓰 홍당무〉, 〈레이디버드〉와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분명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이 서사들은 ‘덜 여성주의적’인, 시대에 뒤처진 작품으로 인식되거나 전자(당당하고 멋지고 아무튼 다 죽이는 여성 서사)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 등장한다. 여성 서사 티어표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준 여성 서사’ 작품인 것이다.


강하고 당당한 여성, 능력 좋고 멋진 여성 캐릭터가 페미니즘과 여성 서사를 대표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동안 너무 많은 미디어에서 여성은 수동적이고 아무것도 못 하는 캐릭터에 불과했다. 그저 남성에 의해 대상화되며 서사의 주변부에 남고, 언제나 여성 캐릭터의 끝은 남성에게 달려있었다. 실제 여성들에 대한 편견을 답습하기도 했고, 반대로 미디어에서 재현된 이미지가 현실의 여성들에게 다시 투영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현재 온라인 페미니즘이 주체적이고 당당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성 캐릭터, 그리고 그의 성공에 열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난 동시에, 여성들에게 훌륭한 롤모델이 될 수 있는 ‘완전한 여성’이니까.


그러나 완전한 여성 캐릭터의 등장만이 ‘완전한 여성 서사’이며, 그렇지 않은 여성 캐릭터의 등장을 불완전한 여성 서사, 나아가 여성혐오로 해석하는 현상을 단지 전통적인 여성 캐릭터에 대한 반항만으로 볼 수는 없다. 신자유주의적 자기 계발과 함께 한 2010년대 온라인 페미니즘 기조의 산물임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불평등한 젠더 권력관계와 그로 인한 여성혐오, 폭력에 거세게 분노한 온라인 페미니즘은 남성에 비해 부족한 여성의 권력을 어떻게 획득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자기 계발이다. 경제적/사회적 열위에 있는 여성이 남성과 같이 ‘정상’에 오르기 위한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훌륭한 여성이 되어 정상에 올라야 하며, 정상에 오른 여성이 많아지면 여성 인권도 높아진다는 게 온라인 페미니즘의 자기 계발 담론이다. 이들은 사회의 역할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이 사회를 바꿀 권력을 얻어야 한다는 뜻에서 자기 계발을 강조했다. 구직이나 재테크와 관련된 정보를 공유하는 것부터, 소비 습관에 대한 비판(이 과정에서 ‘탈오타쿠’[25] 운동이 함께 생겼다)과 여성들이 소위 ‘취업 안되는’ 문과나 미대가 아닌 이공계에 더 많이 가야 한다는 주장, ‘여성적’ 습관(‘핑크 택스’[26]가 붙는 소비와 재테크하지 않는 것 등)을 버리고 ‘남성들이 하던 것’(주식과 코인 등)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정상’에 오르는 다양한 방법들이 등장했다. 이런 담론이 체제 순응적이고, 여성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무시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지만, 일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다던가, 여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패배주의’라고 다시 반박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자기 계발 담론은 결국 개인의 능력, 그를 통해 사회의 차별과 구조를 극복해 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맥락에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그와 궤를 함께하는 능력주의가 결코 페미니즘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 세대 남성보다 경제적/사회적 열위에 다수 위치한 청년 여성들에게는 효과적인 운동 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온라인 페미니즘이 비슷한 시기에 구성한 ‘완전한 여성 서사’의 조건에는 당연하게도 이 담론의 요소가 함께 포함되었다. 바로 강하고 당당한 여성, 능력 좋고 멋진,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의 등장이다. 주변 억압과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여 성공하는 여성 캐릭터가 ‘완전한 여성 서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런 여성상(주체적이고 당당하며 멋지고 아무튼 다 하는 여성)은 기존 ‘여성’에서 벗어나 여성들에게 임파워링까지 하는 훌륭한 캐릭터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적 의미가 충만한 ‘완전한 여성 서사’라면, ‘주체적이고 당당하며 멋지고 아무튼 다 하는’ 여성 캐릭터가 필수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상, 한심하고 별로 능력도 없는, 좀 ‘짜치는’[27] 여성은 여성 인권을 올려주지 못할 만한 캐릭터이며, 전통적인 여성상(능력 없고 수동적인, 그리고 아무것도 못 하는 여성)에 가깝기에 완전한 여성 서사에 포함될 수 없었다. (만약 포함된다고 하면 기존의 모습에서 벗어나 성장해야만 했다) 사회에 의해 소진되어 버린 여성 청년의 이야기를 다루는 〈30대 백수 외톨이 일기〉가 그렇다. 성공하지 못한 한심한 여성의 모습은 누구에게도 비전이 되지 못하며, 전통적인 여성상과 비슷하기에, 도리어 여성 혐오적이다. 여성에게 유독 가혹한 아름다움의 잣대로 인해 미쳐 돌아가고, 그만큼 끝까지 질주해 버리는 〈서브스턴스〉도 마찬가지이다. 엘리자베스 – 수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외모정병’을 결국 극복하기보다 파멸했고, 심지어 자신을 시달리게 만든 이들을 향해 직접 복수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완전한 페미니즘, 바람직한 여성 서사는 되지 못한다.


성공하는 여성 서사만이 진정한 여성 서사라는 도식, 이 도식에 부합하지 않는 서사들은 여성의 것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여기서 성공은 신자유주의적 성공 자원을 두고 겨루는 경쟁에서 이긴 개인이다. 성공한 여성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여성 인권과 관련해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지만, 이것만이 여성을 위한 전부라고 하는 게 과연 페미니즘인가? 성공만이 바람직하고 훌륭한 여성 서사라고 한다면, 주변부의 여자들 — 실패하고 허무하고 고통과 함께하며, 다소 한심하고 짜치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그저 실패에 지나칠 뿐이고 부족한 여성 서사에 불과할까? 만약 그렇다면, 이는 분명히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어떤 일과 감정, 부당함의 근원을 축소하고, 삭제해 버린다. 그리고 동시에 페미니즘이란 명목으로 신자유주의 체제에 성공적인 복무자가 된다. 뛰어난 능력과 경쟁력이 있는, 바람직하고 멋진 모습의 개인은 칭송받고 중심에 서지만, 그렇지 못한 인간, 경쟁력 없고 한심한, 멋지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개인은 비난받고 배제된다. 여성 인권을 위한, 완벽한 여성 서사를 위한다는 이유에서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이 ‘왜 그런지’에 관한 설명은 삭제된 채, 개인의 능력만이 주목받는다. 어쨌거나 너의 능력과 노력이 여성혐오와 억압으로부터 너를 해방해 줄 거라고. 그렇지 못했다면 너의 능력과 노력이 부족하여, ‘여성 혐오적 여성’으로 존재하는 거라고.



어떤 여성혐오 . . .


이어서 더 이야기해 보자. 여성의 무엇까지 다룰 수 있는 게 페미니즘일까?


: 더 나은 비전 - 당연하다. 페미니즘의 주요한 목표가 여성 인권 증진인 만큼, 여성의 더 나은 비전은 페미니즘이 자주 말하는 것이다.

여성의 훌륭함 - 너무 당연한 소리. 기존의 남성중심적 체제에서 무시당하는 여성의 훌륭함, 훌륭한 여성들을 새로 보는 게 페미니즘이다.

사회의 부당함 -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 뒤집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비판부터 하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야기하자.

다소한심하고부끄러운,어떻게보면부족하고이상하고아무튼좀짜치는여성의면모 - ???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는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테다. 페미니즘을 단 한 번이라도 접해봤다면 들어본 이야기니까. 마지막은 좀 의아하다. 여성의 부정적인 모습까지 들춰내고 비추는 게 페미니즘? 여성의 좋은 점만 말하기도 바쁜데 나쁜 부분이라니, 오히려 여성혐오 아닌가?


여성혐오(misogyny)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뜻(구글에 검색해 보았다.)은 여성에 대한 혐오, 멸시와 뿌리 깊은 편견을 의미한다. 여성 혐오’라는 용어와 수많은 여성혐오 사례를 생각해 보았을 때, 여성을 미워하고, 그로 인해 여성을 모욕하며 차별하는 것이 여성혐오인 것 같다. 틀리지 않았다. 분명 여성혐오에는 이런 멸시와 폭력이 수반된다. 하지만 여성혐오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여성혐오가 가진 의미는 조금 더 복잡해진다. 단순히 여성을 미워하고 무시하는 것만이 여성혐오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학계에서는 여성을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객체화, 타자화”[28]를 여성혐오라 정의했는데, 이는 여성을 향한 단순 멸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것’, 즉 숭배를 포함한 대상화/타자화를 여성혐오로 정의한다. 그러니 여성을 사랑한다고 해도, 혹은 그들을 잘 대우해 준다고 해도 여성혐오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앞에서 나온 것과 연결 짓자면, 여성의 ‘부정적인 면모’만을 강조하고, 그를 멸시하며 욕하는 건 당연히 여성혐오이지만, 또 한편 여성이 지닌 모든 부정적 면모를 지워버리고 결벽적인 여성만을 보이고 숭배하는 것 역시 여성혐오라는 것이다. 오히려 여성이 지니는 ‘부정적인 면모’도 인간적으로, 새롭게 이야기하는 게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다.


훌륭한 여성상을 만들고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당연히 페미니즘이지만, 그것만이 페미니즘이고 여성 서사 속 ‘여성’이라고 하는 것, 그와 반대인 여성의 모습을 지우고 혐오로 치부하는 것은 페미니즘이라 할 수 없다.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수만 가지의 다양한 욕망과 성격, 감정, 행동과 배경을 지워낸 채, 바람직하고 멋진 여성, 향기롭고 느낌 좋은 여성을 극찬하기만 하는 건 ‘인간 여성’을 축소해 버린다.


‘완전한 여성상’이 축소한 인간 여성은, 여성혐오를 생산하기도 한다. 2024년 아카데미 시즌에 〈서브스턴스〉와 〈아노라〉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이 그러하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아노라〉의 마이키 매디슨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어서 작품상까지 받게 되었다. 당시 트위터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던 〈서브스턴스〉가 아닌 〈아노라〉가 여러 상을 받자 이를 두고 〈아노라〉를 향한 여러 의견과 비난이 튀어나왔다. 작품의 호불호는 개인의 영역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아노라〉가 받은 ‘의견’과 비난에는 혐오의 맥락이 포함되어 있었다. 성노동자인 아노라와 그가 겪는 ‘신데렐라적 일화’[29]에 대해 ‘성착취를 미화한다’거나 여성이 ‘벗고 성적 대상화 당해야’ 상을 받을 수 있다는 풍의 코멘트와 함께, ‘다수’ 여성이 보편적으로 겪는 외모 강박을 그려낸 〈서브스턴스〉가 더 페미니즘적이라는 평이 쏟아져 나왔다. 성노동자 주인공의 등장, 그가 겪는 불행이나 착취가 아닌 희로애락의 표현을 ‘미화’라고 일축하는 것, 그리고 마이키 매디슨이 수상한 이유가 그의 연기가 아닌 ‘성적 대상화’에 있을 것이라 이야기하는 데에서 성노동자 혐오와 여성 혐오적 맥락이 존재했다. ‘더 페미니즘적’인 여성 서사를 평가하고 그렇지 않은 서사를 비판하는 중에, 정상 혹은 다수 규범에 부합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고르고 그 이외는 탈락시키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여성혐오를 생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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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겪는 외모 강박을 주 소재로 다룬 〈서브스턴스〉가 성노동자 여성의 삶을 다룬 〈아노라〉보다 더 '페미니즘적'인 것으로 평가 받는다. 나아가 '성노동자 여성'이라는 소재는 여성혐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도 유사한 맥락에서 평가받았다. 90년대 유자녀 기혼 여성들의 ‘주체적인’ 성해방, 즉 남성과 관계된 성적 욕망과 남성과의 관계 —온라인 페미니즘 규범에서 벗어나는 욕망 — 을 다루었기에 비슷한 시기에 방영한 드라마 〈정년이〉보다 좋은 여성 서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드라마 〈정년이〉가 원작 속 퀴어 캐릭터를 등장시키지 않고, 각 캐릭터에 얽힌 퀴어/여성 서사를 지운 것으로 인해 상당한 비판을 받았음에도 말이다. 여성의 다소 ‘짜치는’ 욕망 — 남성과의 관계, 성해방과 성적 욕망을 다룬 것이, 아무리 흠이 있어도 ‘짜치지 않는’ 여성의 욕망 — 업계에서의 성공과 예술적 성취에 대한 욕망을 다룬 게 더 낫다는 것이다.


2010년대의 온라인 페미니즘은 탈코르셋과 ‘주체적 섹시’[30] 담론과 함께 여성이 ‘주체적으로 성’을 향유하는 것, 섹슈얼리티와 연결되는 것을 상당히 경계해 왔다. 강간 문화[31]에서 성적으로 개방되어 주체적으로 성을 향유하는 ‘쿨한’ 여성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많은 남성이 여성을 대상화하고, 성적으로 착취해 왔다. 그렇기에 ‘주체성’이라는 이름 아래 대상화되거나 성착취 당하지 않기 위해, ‘성해방’이란 단어에 속지 말자는 것이다. 이는 성적 대상화에 대한 경계를 넘어, 보수적인 성담론의 수용과 슬럿셰이밍[32]을 포함하였는데, 단순히 성적 물화와 강간 문화를 경계하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타인과 섹스하는 여성이 여성 인권을 낮춘다는 지적을 동반하였다. 여성 인권 하락의 원인을 부정확하게 지목한 것은 물론, ‘문란한’ 여성을 모욕주는 여성혐오(슬럿 셰이밍)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페미니즘은 이를 당연하게 수용했다. ‘완전한 여성 서사’의 조건에도 이것이 포함되었고, 〈아노라〉와 〈정숙한 세일즈〉가 받은 평이 이 맥락에 맞닿아 있다. 남성과의 연애와 섹스를 당당하게 이야기한 『쌍년의 미학』이 온라인 페미니스트로부터 비판받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경계와 비난—‘탈성애’가 남성중심적 성문화와 성적 물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고, 성적 대상 이상의 여성 캐릭터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섹슈얼리티와 관계되는 여성을 비난하는 문화, 여성 퀴어 간의 관계에서까지 성애를 배제해 버리는 것은, 가부장제—이성애 중심적 성 규범과 맞닿아 있어, 페미니즘의 실천으로 보기 어렵다. 여성의 성적 욕망과 관계, 이 모든 것을 단순히 남성적 시선과 욕망, 그 산물로 취급하는 것이 과연 페미니즘일까? 오히려 여성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면을 축소하는 것이 아닐까?



이상한 나라의 감상자(혹은 소비자?)


2010년대의 여성 서사 열풍을 일으킨 게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각종 미디어 콘텐츠를 향유하던 감상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그냥 감상자가 아니라 ‘여성’ 감상자, ‘페미니스트’ 감상자, 그리고 무엇보다 ‘소비자’인 감상자였다. 이들은 그저 여성 서사를 즐겁게 보고 감상하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미디어 속 수많은 여성혐오에 항의하며 혐오적 매체를 보이콧하고, ‘좋은’ 여성 서사를 찾아 모두가 함께 보기를 독려하고, 강조했다. 2016년의 ‘넥슨 보이콧 사태’[33]부터 2024년에서 지금까지 진행 중인 ‘네이버 웹툰 불매 운동’[34], 여성 서사 작품이 나오면 모두가 봐야 한다고 널리 알리는 수많은 트윗…더 이상 오락성과 작품성, 취향만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창작물이 가지는 윤리 — 여기서는 성인지 감수성 — 가 창작물을 쫄딱 망하게 하거나 흥하게 만드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여성을 존중하고 성인지 감수성을 갖춘 작품은 흥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은 망한다. 소비자인 여성, 페미니스트가 좋은 작품을 흥행시키고, 나쁜 작품은 비판할 것이니까. ‘소비자주의’는 이렇게 온라인 페미니즘의 핵심 중 하나로 중요하게 기능하였다.


‘돈쭐’[35]과 불매, 이 두 가지는 온라인 페미니즘 소비자 운동의 중심 전략이다. 여성 소비자가 좋은 것, 즉 페미니즘적인 것을 활발하게 소비함으로써 소비자(로서의 여성)가 이제는 페미니즘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표출하는 것이다. 반대로 좋지 못한 것(반페미니즘적, 여성 혐오적인 것)은 소비하지 않음으로써, 이제는 여성들이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는 걸 보여준다. 여성 서사에 관해서는, 문화 콘텐츠 소비의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여성이 여성 서사 작품을 활발하게 ‘소비’하고 비 여성 서사 작품에서 여성 혐오적 요소를 비판 · 보이콧하며, 더 이상 여성혐오를 원치 않는다는 걸 드러냈다. 이 두 가지는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 전략이었다. 창작자들과 콘텐츠 시장은 (아직 부족하지만) 여성들의 요구에 응하였다. 2024년 한국 영화 산업에서 여성 창작 인력이 모든 직종에서 상승했으며, 흥행 순위 30위 내 작품 중 16편이 벡델 테스트에 통과하였다(59.3).[36]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으나, 이전에 비해 상당히 개선되었다. 문학 분야에서는 더 두드러진다. 지난 몇 년 전부터, 여성 작가들의 SF가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젊은작가상 수상 역시 꾸준히 여성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왔다.[37] 물론 여성 창작자라고 해서 반드시 여성 서사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지만, 이렇게 주목받은 여성 창작자 다수가 여성 서사 작품을 내보였고, 여성 소비자들에게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 영화와 문학 말고도 만화, 드라마, 게임 등에서도 기존의 여성혐오와 차별을 대폭 개선하거나 여성서사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 굉장히 많이 늘어났다. 사회에서 남성보다 열위에 있던 여성이, 소비자의 지위에서 소비력이라는 하나의 권력을 획득한 듯했다.


여성 서사에 관한 온라인 페미니즘의 소비자 운동이 꽤 성과 있었던 것도 맞지만, 뚜렷한 한계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돈쭐과 불매가 주 전략인 소비자운동은, 결국 소비력이 보장되는 자본주의 체제와 시장 논리에 포섭되어, 그 안에서만 유효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소비력이 없는 소비자, 혹은 ‘소비자’가 아니라면 두 전략이 유효하게 먹히지 않는다. 2023년에 개봉한 영화 〈바비〉는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운 미국의 영화이다. 개봉 전부터 해외에서 비슷한 시기에 개봉, 프로모션을 한 〈오펜하이머〉와 함께 ‘바벤하이머(Barbenheimer)’ 등의 밈을 만들며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선풍적인 인기를 끈 페미니즘 영화 〈바비〉가, 우리나라에서는 8만여 명의 관객만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동 시기 개봉한 국내 영화 〈밀수〉가 여성들이 활약하는 여성 서사 작품이면서 100만 명 넘는 관객을 동원했음에도, 10만 명이 안 되는 관객만이 이 영화를 본 것이다. 〈바비〉의 소재인 바비 인형이 우리나라에 친숙하지 않다거나, 숨기지 않고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페미니즘 메시지가 반감을 산다든가 등의 분석이 있었지만, 이 영화를 관람했거나 관심을 가진 관객들 대부분은 상영관이 적었다는 걸 지적했다. (나도 이 영화를 볼 때, 다른 영화에 비해서 상영관이 많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어떤 지역에는 개봉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바비〉의 상영관이 2곳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개봉 3주 차쯤에는 아예 상영관이 없다는 곳도 있었다. 그러니 보고 싶다고 해도, 애초에 상영을 해주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여성 서사 영화가 많은 독립, 예술 영화 분야일수록 더 그러하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이름으로 ‘돈쭐’ 내고 싶어도, 내줄 방도가 없는 것이다. 불매 역시 문제가 있다. 여성이 소비자로서 여성 혐오적이고 반페미니즘적인 상품을 보이콧한다면, 매출이 줄어들면서 기업이 여성들의 메시지를 ‘알아먹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런 믿음으로 이루어진 불매가 효과를 낸 경우도 종종 있지만, 불매 전략이 먹히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클로저스 성우 교체 사건과 일명 ‘집게손가락’[38] 사태 로 불리는 페미니즘 사상 검증 사건이 일어난 게임 회사 ‘넥슨’의 경우, 많은 여성과 페미니스트들의 항의, 불매에도 불구하고 사측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 없이 사건을 흘려보냈다. 게임 〈림버스 컴퍼니〉의 제작사 ‘프로젝트 문’ 역시 남초 커뮤니티에서 일어난 페미니즘 사상 검증에 동조하는 사건으로 유저층의 다수였던 여성들이 불매를 선언하고 소비층에서 이탈하였다. 하지만 매출 감소에도 넥슨과 비슷하게 이에 대한 어떤 사과나 개선이 없었다. 불매가 장기화되고 있는 네이버 웹툰도 마찬가지이다. 기업은 합리적으로 수익을 좇기 때문에, 불매로 인해 수익이 줄어들고 타격을 입는다면 여성혐오를 개선하고 페미니즘에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이 깨진 것이다. 이들은 주 소비자층이었던 여성의 말을 듣지 않고, 본인들의 입맛에 맞는 반페미니즘 커뮤니티의 편에 서고 침묵했다. 이들은 여성을 ‘소비자’로 인식하고 대우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소비자’는 반페미니스트 이용자들이었다.

사진15.png 해당 트윗 외에도 〈바비〉 상영 당시에 상영관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트위터에서 많이 나왔다.

이렇게 소비자 여성의 소비력이 유효하게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소비 자체를 페미니즘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페미니즘이 소비주의에 기반한다면, 페미니즘에 도움되는 소비를 못 하는, ‘소비자’가 아닌 소비력 없는 여성이 배제된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는 시장 논리와 자본주의를 따르지 않는다. 시장 논리와 자본주의의 ‘합리성’과 별개로, 그리고 그와 공모하여 일어나는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타파하는 게 페미니즘의 목표이다. 사회 구조 속 뿌리 깊게 박힌 여성을 향한 부조리는 구조 자체가 변화함으로써 사라질 수 있다. 개인이 더 여성주의적인 상품을 소비하는 게 한 가지 수단이 될 수 있을지라도, 소비하는 선택 자체가 페미니즘이 될 수는 없다. 소비 자체가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결국 사회적 변화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개인적인 선택의 차원으로 내려오게 할 뿐이다. 여성 서사를 소비하는 것이 우리에게 불쾌함 없는 즐거움을 주고 임파워링을 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 자체만으로 여성 인권은 올라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성 서사를 소비하면 여성 인권이 올라가고, 비 여성 서사를 소비하면 여성 인권이 내려간다는 믿음은 이어지고 있다.


여성 서사에 대한 소비주의는 마치 소비가 곧 페미니즘이라는 인식을 강화하는 것만 하지 않았다. 감상자인 동시에 소비자인 온라인 페미니스트의 위치를 상당히 기묘하게 만들었다. 여성 서사 소비 = 페미니즘, 도식화된 여성 서사의 조건, 클린과 빻음을 걸러내는 필터, 낙인찍기…일련의 여성 서사를 둘러싼 관행은 ‘감상자이면서 소비자’인 사람들을 ‘소비자’로 바꿔갔다. 소비와 감상을 무 자르듯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두 가지로 구분하겠다. 소비는 작품을 일차적으로 보거나 듣거나 플레이하는…말 그대로 ‘소비’하는 것이고, 감상은 일차적으로 작품을 소비하며 온갖 감정과 생각을 떠올리고, 해석과 평가를 풀어내는 행위이다. 그러니 감상자인 동시에 소비자인 것은 작품을 보고 나서, 트위터든 영화 전문 잡지이든, 자기 폰 속의 메모장이든 어디든 그에 대한 후기와 자기 나름의 감상을 이야기하는 일이다. 여성 서사를 소비하고 감상한다는 것은 여성 서사 작품을 일단 소비하고, 그 이후 작품에 담긴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찾아 해석하고, 이를 비평하는 일이다. 한창 여성 서사에 관한 논쟁으로 인터넷이 후끈 달아올랐을 때, 여성 서사 작품을 소비한 후 트위터 등에 나름의 긴 후기를 남기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점점 더, 여성 서사의 소비 자체에 초점이 맞춰지고, 감상은 필수가 아닌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더 이상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직관적으로 페미니즘을 드러내는 작품(코르셋 없는 여성이 연애와 결혼 없이 남자들을 물리치며 주체적으로 행복해지는 이야기)을 찾고, 그것만이 유의미한 여성 서사/페미니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극단적으로) 메시지가 어떻게 되든, 여성이 불행하거나 성적 대상으로 등장하면 포르노이고, 그것이 사회 고발 작품이든 풍자하는 작품이든, 페미니즘적인 의도를 전하는 데 실패한 창작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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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고발과 풍자는 비판이 포함되지 않는 한 '포르노'로 수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의미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의견이 있었다. 그런 창작물과 관련된 비평을 의미없거나 수고스러운 것으로 보는 맥락과 연관되어 있다.


2022년에 발매된 여성 아이돌 그룹 ‘아이돌’의 곡 〈Nxde〉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남성주의적 시선을 비꼬는 메시지를 담았다. 노래와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자, 트위터에서는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독서광에 지적이었음에도 ‘금발 백치’ 섹스심벌 이미지로 대중에 각인된 마릴린 먼로를 오마주한 뮤비의 장면들, ‘변태는 너야’라고 풍자하는 직설적인 노래 가사 등에 호평을 내린 것이다. 물론 당시에 이를 결국 여성이 성적 대상화되는 ‘주체적 섹시’라고 지적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여성 아이돌로서 과감한 행보를 보인 아이들을 응원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의 평가와 여론이 꽤 달라졌다: 변태는 너라고 지적하며 노래를 부르더라도, 결국 뮤직비디오와 음악방송에서는 ‘성적 대상화’될 만한 의상을 입었다. 아무리 비꼬아도, 남자들은 결국 그들을 대상화할 뿐,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런 풍자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의견이 주류를 차지했다. 일본의 음악그룹 ‘아타라시 각코’(새로운 학교의 리더즈)의 곡 〈オトナブルー (오토나 블루)〉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미성년자를 성적 대상화하는 듯한 가사와 대비되는 분위기의 익살스러운 퍼포먼스로 원조교제 문제를 풍자하는 노래였지만, 이 역시 사람들은 결국 가사만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실패한 창작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서브스턴스〉도 그렇다. 남자 관객들은 엘리자베스 수가 외모 강박과 ‘서브스턴스’로 인해 망가지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할 테니, 결국 불행 포르노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결국 이런 평들은 창작자들이 이런 작품 겉보기에는 페미니즘 메시지를 담았지만, 사실 여성 혐오자들이 즐길 만한 작품을 창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대중이 작품을 표면 그대로 받아들일까 봐, 거부 페미니스트 남성들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즐기기만 할까 봐. 이런 우려가 이해되기도 한다. 사회를 고발하고 비꼬는 작품에서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는 뱉어내고, 입맛에 맞는 부분만 골라내어 즐기기만 하는 사람들이 널렸으니까. 문제는 그것을 온전히 창작자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일단 작품이 창작자의 손을 떠나고 나면, 감상자들에 의해 얼마든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심지어 창작자가 작품을 만들 때 의도한 바와 다른 방향으로도 말이다. 그런데 창작자가 전하는 의도와 다른 해석이 나오지 않을 만한 작품을 만들라는 요구는 창작자의 권한을 넘어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오로지 페미니즘적인 메시지만 도출할 수 있도록 ‘완전한 여성 서사’ 작품을 만든다면 그 작품은 굉장히 단순하고 직관적일 것이다. 담을 수 있는 내용도 완전한 여성 서사에 부합하게끔 한정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이 쉽게 소화되긴 하겠지만, 얼마나 즐거움을 더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작품이 만들어졌다 한들, 모두가(심지어 안티 페미니스트들까지)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일까? 글쎄…그들이 그런 여성 서사 작품들을 볼 때, PC가 망친 작품, 여성은 지운 채로 그냥 좋은 작품이라는 식으로 평가하며 페미니즘을 이리저리 피한다. 이는 결국 감상의 문제이다. 페미니즘 비평의 목소리가 더 커지고, 기존의 비평이 얼마나 남성 중심주의적이며 여성 혐오적인 맥락을 가지는지 지적해야 해결되는 문제이다. 그런데 감상자 측으로 향할 책임의 화살을 창작자에게 전부 돌려 ‘완전하고 불편하지 않은’ 여성 서사만을 창작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감상 과정은 지우고 그저 편한 ‘소비’를 하려는 소비자의 태도에 불과하다. 여성 서사를 위한다는 이유로 모든 불편함을 제거하고, 직관적인 해석만 남은 작품을 ‘완전한 여성 서사’로 추구한다면, 여성 서사와 페미니즘 비평의 폭은 좁아지고, 창작자에게 더 부담이 생긴다. 결국 온라인 페미니즘이 그동안 여성 서사를 추구해 온 바와 모순된다. 여성이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이야기에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온라인 페미니즘을 통해 여성들이 여성 서사를 그토록 원하고 부르짖었던 이유일 텐데, 정작 ‘여성’은 한 폭으로 좁혀졌다. 이전보다는 더 페미니즘적이고 덜 여성 혐오적일지라도, 결국 여성들의 이야기는 또 다른 주류에 승인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나가며: 나의 공수치 컬렉션들


나에게는 ‘공수치’[39] 컬렉션이라는 영화 컬렉션이 있다. 여기에는 〈레이디버드〉, 〈프란시스 하〉, 〈파니 핑크〉, 〈미쓰 홍당무〉,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이런 영화들이 있다. 나의 ‘공수치’ 컬렉션의 영화들은 전부 다 여성 서사 작품들인데, 대체로 쪽팔리고 한심한, 멋진 능력보다는 부끄러운 모습이 먼저 나오는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자꾸 정지 버튼을 누르고, 눈을 가리거나 극장을 나가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보는 내가 다 부끄러워서. 하지만 나는 이 영화들을 정말 좋아한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이 영화들이 지극히 ‘여성적’인 여성 서사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 거지?” 글 쓰는 내내 그동안의 ‘여성 서사’와 온라인 페미니즘을 많이도 까발리고 비판했지만, 결국 내가 여성 서사에 애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한두 가지 방향의 서사만을 향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또 여성 서사가 그저 페미니즘의 다른 표현이기만 한 것을 원치 않는 마음에서였다. 한편으로 여성 서사를 두고 벌어진 각종 논쟁과 온라인 페미니즘이 나름대로 쌓아 올린 의미를 전부 다 부정하고 싶은 것도, 여성 서사라는 범주를 해체하고 모든 조건을 없애길 원한 게 아니다. 여성 서사를 한 가지로 통합할 ‘완전한 여성 서사’란 개념을 해체하고 싶었다. 그래서 글을 쓰며 생각했다. “나에게 여성 서사란 무엇이지?” ‘완전한 여성 서사’에 대해 조목조목 따진 후 마지막에는, 새로운 방향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성적’인 여성 서사를 이야기한 것이다.

나에게 여성적인 여성 서사라는 것은, 여성의 시선과 생각, 마음으로 여성들의 온갖 삶을 담아내는 서사란 의미다. (쪽팔리고 이상한 게 곧 여성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 멋지고 끝내주는 여자가 아니어도 된다. 부끄럽고 한심하고, 능력이 없고 남자를 밝혀도, 여자를 밝혀도, 미치고 이상해도, 그럴 수 있다. 그런 여자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고, 어떻든 간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으니까. 세상에 무수히 많은 여성이 존재하는 만큼, 그들에게는 다양한 면모가 있고, 그래서 여성 서사로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무수히 많으니까. ‘완전하고 완벽한’ 여성 서사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등장해서 미디어를 지배하지 않길 원한다. 여성 서사가 다루는 온갖 여성의 삶이 실제 여성 인권을 올리고 내리는지, ‘페미니즘’에 부합하는지 판단하고 싶지 않다. ‘여성적’인 시선으로 포착하고 담아낸, ‘여성적’ 생각을 표현한 서사, 그래서 무수히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공수치’ 컬렉션을 좋아한다. 그들이 어떤 모습이든, 그들의 이야기가 페미니즘적이든 그렇지 않든, 여성이 그럴 수 있는, 그 자체로 이미 온전한 여성 서사니까.



[1] 2020년대에 들어 유행한 페미니즘 계정의 한 형태이다. 페미니즘 관련 이슈를 여성들을 대표해 이야기한다는 의미로 ‘페미니즘 스피커’라는 이름을 달았으며, 온라인 상에서 많은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주로 ‘여혐’ 사건을 제보 받거나 직접 온라인 커뮤니티 혹은 특정 인물의 여성혐오를 캐내어 올리는 활동을 하였다. 여성혐오와 폭력 사건을 공론화하였다는 점에서 열띤 지지를 받은 한편, 트랜스젠더와 성소수자, 장애인 등에 대한 혐오, 사이버 불링 유도, 개인 신상 전시, 극우커뮤니티와의 연결, 사실 확인 없이 제보 그대로 게시물을 올리는 등의 행동으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2] 인용 리트윗의 줄임말. 트위터(현 X)에서 제공하는 기능으로, 다른 이용자의 게시물에 바로 게시글을 덧붙일 수 있다. 인용 리트윗을 하게 되면 덧붙인 게시글 아래에 원 트윗의 미리보기가 생긴 채로 새로운 게시물이 생성된다.

[3] 외모 + 정병(정신병)이 합쳐진 말. 자신의 외모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가지는 상태를 이르는 말

[4] 본래는 과거 여성복식에 사용된 옷을 의미하지만, 온라인 페미니즘 커뮤니티에서는 여성이 스스로를 억압, 변형, 방해하도록 사용하는 물리적/정신적인 요소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성이 ‘여자답지 않다’, ‘여자가 그게 뭐냐’ 등 차별적인 발언을 피하기 위해, 혹은 특정한 외모 차림새만이 여성적인 것이라는 사회의 규범에 의해 스스로 사회적 여성성을 강화하는 것 – 화장을 하고 ‘여성스러운’ 옷을 입는 행위 –이 코르셋에 해당된다.

[5] ‘알탕 서사’의 줄임말. 알탕 서사란 남성 캐릭터들이 주연으로 등장하고 활약하는 서사를 남성 생식기와 연관 지은 커뮤니티 용어이다. 남성이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반면, 여성은 그를 보조하거나 극을 위해 희생되는, 혹은 눈요깃거리처럼 등장한다는 점을 비판하며, 이를 비하적으로 부르는 ‘알탕 서사’(혹은 알탕)가 사용도기 시작했다.

[6] 한국 페미니즘 커뮤니티에서 상대의 여성혐오적인 말과 행동을 반대로 뒤집어 보여줌으로써 그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페미니즘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 ‘메갈리아’에서 이를 많이 사용하여 화제가 되었다.

[7] 총공이란 ‘총공격’의 줄임말로, 개인들이 집단으로 모여 온라인상으로 집단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에서는 총공 운동을 통해 특정 키워드나 해시태그를 실시간 트렌드에 보내기, 메일, 문자 메시지 보내기 등으로 여성 혐오적 사건에 항의하거나 공론화하는 활동을 한다.

[8] 트위터를 중심으로 한 온라인 페미니스트 주류는 주로 래디컬 페미니즘(급진주의 페미니즘)/랟펨(래디컬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지칭하지만, 래디컬 페미니즘의 학술적 정의와의 차이/스스로를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하지 않거나, 그들을 비판하면서도 래디컬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온라인 페미니즘의 기조 따르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래디컬 페미니즘 대신 ‘온라인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9] 래디컬 페미니즘 커뮤니티(이 글에서는 온라인 페미니즘)에서 사용한 여성들의 호칭. ‘생물학적 여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성기를 지칭하는 이 단어가 쓰였다.

[10] 탈코르셋은 2015—2016년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페미니즘의 담론이자 운동을 뜻한다. 위에서 설명한 ‘코르셋’을 탈피한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주로 여성의 ‘꾸밈노동’을 문제시하며, 통상적인 여성의 꾸밈노동과 사회적 여성성 – 화장과 긴 머리, 마른 몸 등 – 을 거부하며, 이를 위해 온라인 페미니스트들은 숏컷 혹은 삭발을 하거나, 화장품을 전부 버리는 인증샷을 인터넷에 남기기도 했다.

[11] 4B 운동은 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를 의미하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표어이다. 남성에 대한 보이콧을 표명하는 운동. ‘비혼여성 재테크’는 이의 연장선으로, 비혼 여성의 경제력을 키우기 위해 경제 공부, 주식 투자, 부동산 등을 독려한 흐름이다.

[12] 래디컬 페미니즘에서 코르셋에서 벗어난 여성상을 의미하는 단어. ‘디폴트’ 여성상이 있으며, 사회가 생각하는 여성상은 그 디폴트 여성에 코르셋을 씌운 것이라고 본다.

[13] 허윤,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한겨레출판, 2024, 135—136.

[14] 세 단어 모두 페미니즘에 반하며, 안티 페미니즘 세력 – 주로 남성을 옹호하는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이다. 흉자는 ‘흉내자지’의 줄임말, 남미새는 ‘남자에 미친 새끼’의 줄임말이다. 단순히 안티 페미니즘 성향의 여성 혹은 ‘남자에 미친’ 여성에 대한 비난을 넘어, 주류 페미니즘 기조에 반대하거나 남성과 긴밀하게 엮이는, 혹은 헤테로 섹슈얼 여성에 대한 비난으로 쓰이기도 한다.

[15] 쓰까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낮잡아 부르는 단어로, 교차성 이론에 입각하여 ‘여성’ 외에 퀴어, 장애, 환경, 난민 등 ‘다른 인권 의제’를 페미니즘적으로 엮는 운동을, 여성인권에 다른 것을 ‘섞는다’는 의미에서 ‘쓰까’라는 단어가 쓰이게 되었다. 현재는 ‘래디컬’과 대비되는 ‘리버럴’로 대체되어 쓰이는데, 여기서 리버럴은 제 1물결 페미니즘을 의미하는 게 아닌 래디컬 페미니즘과 다른 노선을 가진 페미니즘을 지칭하는 말이다.

[16] 허상희, 「의사소통 도구로서의 트위터(Twitter)의 특징과 소통 구조에 관한 고찰」, 『우리말연구』, 28호, 2011, 274 — 277.

[17]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거나 비윤리적인 언행을 지적하는 데 쓰이는 속어. 특정 작품이 빻았다고 하는 것은, 인권 감수성이 낮거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인 묘사, 표현이 작품 속에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18] 여성 간 연애적/성애적 관계를 주요 소재로 삼는 장르. GL(Girl’s Love)로 부르기도 한다.

[19] 김수연, 「여성 서사와 퀴어 서사: <헤어질 결심〉을 통해 본 영화(비평)의 젠더화」, 『문학과 영상』, 24권 2호, 2023, 348.

[20] 각각 연애와 결혼에 극도로 싫어하고 꺼린다는 뜻의 ‘혐’을 붙여 연애와 결혼을 낮잡아 부르는 인터넷 커뮤니티 용어

[21] ‘키링’처럼 달고 다니기 좋은 과시용/전시용 남자를 의미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용어. 잘생긴 외모와 상대의 말을 잘 듣는 ‘조신한’ 성격의 남자를 이르는 것으로, ‘트로피녀’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된다.

[22] ‘탈+성애’로, (주로 남성과의) 성적 관계와 남성적 시선에 의한 성적 대상화, 그 외 성애(섹슈얼리티)와 관계된 것에서 벗어난다는 래디컬 페미니즘 커뮤니티의 용어. 주로 남성과 관련되어 쓰이지만, 여성 간 관계나 문화 전반에서도 탈성애가 주장되기도 했다.

[23] 캐릭터가 비현실적인 불행을 주입하거나, 불행을 부풀려서 보여주는 작품을 비하적으로 이르는 용어

[24] ‘미소녀’ 캐릭터들을 대거 등장시켜, 그들의 매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남성향 작품을 비하적으로 가리키는 용어. 주로 남성 캐릭터의 개입과 그들과의 연애 관계없이, 옴니버스/에피소드 구성으로 진행되는 일상물이 이에 해당된다.

[25] 과소비 조장과 성애 과몰입(쉬핑과 2차창작)을 오타쿠 문화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며 등장한 래디컬 페미니즘의 한 운동. 콘텐츠를 소비하더라도, ‘오타쿠’처럼 관련된 굿즈에 과한 돈을 쓰지 않거나 쉬핑(캐릭터들을 서로 커플로 엮는 것) 중심 2차 창작을 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

[26] 같은 상품 · 서비스임에도 남성용보다 여성용의 가격을 더 비싸게 책정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 처음에는 남성용과 비슷함에도 여성용일 때 더 비싼 커트 비용, 의류를 비판하기 위해 쓰였지만, 점차 여성의 소비 비중이 큰 디저트 · 디자인 문구류 등의 가격 역시 핑크택스라고 비판하는 이야기가 나와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27] 경상도 방언으로 ‘쪼들리다’, ‘궁핍하다’는 뜻이지만, 인터넷에서는 무언가 기대나 수준에 모자라고 별로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28] 우에노 지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2012.

[29] 성노동자인 아노라가 부자 남성과 충동적으로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신데렐라라고 표현했지만, 영화가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로 이어지지 않는다.

[30] 온라인 페미니즘에서 여성이 타의가 아닌 ‘자기 자신의 선택’으로 성애적인 매력을 어필할 때 이를 비꼬며 가리키는 단어. 온라인 페미니즘에서는 주체적인 선택이라고 해도, 그것이 여성이 성적 대상화되는 경향을 강화하기 때문에 이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31] 기본적으로 강간이 만연하고 정상화되는 문화를 가리키는 페미니즘의 학술 용어. 페미니즘 학자 리베카 솔닛은 “강간이 만연한 환경,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32] 슬럿은 정숙하지 않은, 문란한 여성을 가리키는 속어로, 슬럿 셰이밍이란 성과 관련된 사회적 규범, 통념과는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과 태도, 언행을 비난하고 망신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여성에게 “네가 문란해서 다른 여성에게 피해를 준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대표적이다.

[33] 2016년 7월, 넥슨의 게임 〈클로저스〉의 캐릭터 티나의 성우인 K 씨가 메갈리아 페이스북 페이지 소송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제작된 티셔츠의 인증샷을 SNS에 올리자, 게임과 온라인 커뮤니티의 일부 유저들이 이에 반발하며 성우 교체를 요구했고, 이에 넥슨은 하루만에 성우를 교체하기로 결정하였다. 트위터에서는 해당 사건을 여성혐오 사건으로 문제시하며, K 씨를 지지하고 넥슨을 보이콧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34] 2024년 네이버 지상최대공모전에 〈이세계 퐁퐁남〉이라는 작품이 1차 심사를 통과하자, ‘퐁퐁남’이 지닌 여성혐오적인 의미(정숙하지 못한 여성과의 결혼을 ‘설거지’로 표현하며, 이로 인해 남성 — ‘퐁퐁남’— 이 여성 대신 경제활동, 가사노동을 하며 손해본다는 뜻을 드러냄)와 여성혐오적인 내용으로 작품을 내려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네이버 웹툰은 이를 수용하지 않아 불매가 시작되었고, 불매운동이 진행되던 와중 네이버웹툰 트위터 공식계정이 다른 작품을 홍보하며 “불매합니다. 불티나게 매입하기”와 같은 문구를 올리자 불매운동을 조롱한다는 논란이 일어나며, 불매운동이 한층 거세졌다.

[35] ‘돈’+’혼쭐내다’의 합성어로, 사회적으로 선하고 옳은 행동을 한 사람 혹은 가게의 물건을 소비해준다는 소비문화의 신조어

[36] 진윤서, “[코픽뉴스] 2024년 스크린을 빛낸 여성들의 눈부신 활약! 2024년 성인지 결산 발표”, 영화진흥위원회, 2025.03.10, https://www.kofic.or.kr/kofic/business/noti/findNewsDetail.do?seqNo=55278

[37] 임인택, “2025년 ‘젊은작가상’ 대상에 백온유…수상자 7명 전원 여성”, 한겨레, 2025.02.04,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80702.html

[38] 지난 2023~2024년,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집게손가락’이 남성혐오를 상징한다며, GS25, BBQ 등 사기업부터 정부 관공서까지, 집게손가락 혹은 집게손가락과 유사한 이미지가 등장할 시 ‘남혐’이라고 하며 이미지 수정이나 그와 관계된 담당자 해고를 요구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넥슨의 경우,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캐릭터 홍보 영상에 집게 손가락 모양이 등장하자, 이를 제작한 애니메이션 업체 소속 애니메이터들의 SNS를 뒤지며, 그 중 페미니즘 게시물을 올린 한 직원을 범인으로 지목하며(해당 직원이 남혐으로 지적된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으로 나중에 드러났다), 신상털이와 사이버불링을 가한 사건이 일어났다.

[39] ‘공감성 수치’의 줄임말. 공감성 수치란 미디어 속의 등장인물이 창피 당하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혹은 부끄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언행을 할 때, 시청자가 마치 그 상황에 놓인 것처럼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권김현영 외, 『대한민국 넷페미史』, 나무연필, 2017.

허윤 외,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한겨레출판, 2024.

우에노 지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2012.

앤디 자이슬러, 『페미니즘을 팝니다』, 안진이 옮김, 세종서적, 2018.

김수연, 「여성 서사와 퀴어 서사: 〈헤어질 결심〉을 통해 본 영화(비평)의 젠더화」, 『문학과 영상』, 24권 2호, 2023, pp. 343—66.

윤서연,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 여성 영화 관객의 팬덤화 연구: 여성 서사 응원과 검열을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중앙대학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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