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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66호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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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Feb 24. 2024

해피 엔딩이 아닐지라도

편집위원 검은

※ 이 글은 우울과 불안과 함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다루니 글을 읽으실 때 참고 바랍니다.     



#1


  2022년 3월. 뉴스에서는 울진에서 발발한 산불이 근처 동해까지 번져갔다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검은은 뉴스를 보며 어서 불이 진압되길 기도한다.

  2022년 4월. 야외 온도판이 현재 기온 30℃에 육박했음을 알린다. 검은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더운 몸을 식히기 위해 손으로 부채질한다.

  2022년 6월. SNS 타임라인에 인도와 파키스탄, 최근에는 유럽에서 40~50℃에 다다르는 폭염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뜬다. 핸드폰을 끈 후 검은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요즈음, 우리는 매 순간 날씨의 ‘이상함’을 마주한다. 항상 ‘기록을 달성하는’ 이례적인 날씨는 이미 우리에게 친숙해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날씨가 이전과 다름을 느끼더라도, 고개만 갸우뚱할 뿐 다시 각자의 감정과 일에 집중한다. 어쩌면 전혀 이상함을 체감하지 못한 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달라진 날씨와 주변 환경은 나에게 공포와 우울로 다가온다.     


  내가 이전부터 기후 위기로 인해 우울감을 느낀 것은 아니다. 어릴 때는, 아니 고등학생 때까지도 나는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공교육과 미디어에서는 통칭 ‘지구 온난화’, ‘환경 오염’ 등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해 왔고, 나도 역시 이를 경청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그들이 가르쳐준 대응책은 모두가 알다시피 다음과 같았다. 쓰레기를 잘 분리 배출하기, 가정에서 물과 전기를 절약하기, 일회용품의 사용을 줄이기, 친환경 제품을 사용하기 등. 기후 위기는 모두의 문제이지만, 각자의 일상생활 영역에서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는 포장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기억나는 대로 환경에 도움 되는 행동을 실천하였다. 기후 위기에 있어 내게 그 이상 다가오는 것은 없었다. 나의 10대 시절은 그저 (한국 사회에 산다면 응당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입시 제도에 치여 살기에 바빴다. 기후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른 채로 그렇게 살아왔다.

  

  2020년 1월이었다. 입시가 끝나고 대학 입학을 기다리던 때였다. 할 일 없이 유튜브를 보다가 추천 목록으로 한 영상이 떴다.          


  솔직하게 말하면 영상의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영상을 보는 내내 공포와 두려움을 감각한 순간만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동안 내가 인식했던 환경 문제보다, 인류를 포함하여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처한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2030년을 기점으로, 지구의 온도가 1.5℃ 더 오른다면 “세상이 망할지도 모른다.” 내가 막연하게라도 꿈꿔 온 미래가 통째로 상실되고,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다음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한 점은 내가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영상을 본 해는, 여름에는 유독 장마가 길었고 겨울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했으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창궐하기 시작했다. 영상을 본 이후 나의 일상은 (물론 계속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때 눈과 귀로 배운 기후 위기와 그에 따른 충격을 현실에서 끊임없이 마주해야만 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기후 위기를 실감하면서 느끼는 충격,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난 불안과 우울은 그동안 내가 죽음에 대해 가져온 공포를 더 크게 일으켰다. 어릴 때부터 나는 죽음이 무서웠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를 잃었을 때 죽음에 대한 슬픔과 공포를 마주하는 것과 별개로, 일상에서도 죽음을 떠올리면 두려움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모든 것이 사라지거나 죽는 것이 당연하고, 영원함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아직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숨을 쉬지 않고, 의식이 더 이상 남지 않아 생각과 상상이 멈추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떤 모습으로 남을 수 있는 걸까? 어쩌면 나는 변화가 무서워서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나는 심해진 우울증 탓에,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고 죽을지를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나는 누구도 예측하거나 진술하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어떤 조언도 들을 수 없는, 필연적인 변화인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후 위기 역시 나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이다. 기후의 급속한 변화로 내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들이 바뀌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죽음을 생각하며 느끼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더 부풀렸다. 정말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커다란 해일에 휩쓸려서, 아니면 갑작스럽게 빙하기가 찾아와 한순간에 얼어붙어서, 아니면 이전 시대처럼 운석이 날아와 다 죽어서 없어져 버리는 건 아닐까. 내가 알지도, 예상하지도 못하는 방향으로 나를 포함해 내 주변 사람들, 동식물, 땅, 날씨, 내가 마주하는 것들이 다 사라지고 변할 것을 상상하면 늘 무섭고 괴롭다. 그동안의 안온했던 일상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고, 내가 살아가는 세계와 날씨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는 와중에 해내야 할 생존이 두렵다.          



#2


  검은의 집. 검은은 자신의 방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다. 거실에서 소리가 언뜻 들려온다. TV에서는 해일이 밀려온다는 설정의 재난 영화 광고가 흘러나온다. 곧이어 가족들의 이야기 소리가 검은의 귀에 명확하게 들린다.

  △△△: 현실에서 저러면 어떻게 사냐.

  ○○○: 어차피 2030년엔 지구 온도가 1.5℃ 올라가서 망한다며. 그때까지 돈이나 많이 벌어놔야겠다.

  검은은 당장 방에서 나와 가족들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와 말재주가 없어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저을 뿐이다.     

  2018년, IPCC 제5차 보고서에서는 2030년까지 지구의 기온이 1.5℃ 더 상승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을 다뤘다. 이를 기점으로, 내 일상에서는 다시 종말론적인 언어들이 불쑥불쑥 나타나기 시작했다.     

  “10년 후에 인류는 멸종한다.” 

  “지구의 온도가 1.5℃ 더 넘어가면 끝장난다.”

  “지구 멸망은 이미 시작되었다.”

  …     


  기후 위기의 소용돌이에 살아가는 지금, 우리는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의 심각성에 대해 이전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재난과 종말을 너무도 쉽게 소비하고 있다. 기후 위기를 부정하든, 혹은 기후 위기의 현실을 깨달았든 어떻든 간에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죽음’, ‘멸망’, ‘멸종’, ‘종말’은 단지 “끝”과 “망(亡)함”을 표현하기 위해 온갖 맥락에 뒤섞이면서 남용되고 있다. 그 발화마저도 대부분은 엄숙하고 진중한 분위기 속에서, 명확한 언어를 통한 것이 아니다. 재난을 오락으로 즐길 수 있는 환경에서 우리는 미디어의 언어로 “끝”을 너무나도 쉽게 접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남발된 말은 무엇을 낳을까. 어쩌면 이 인류가, 세계가,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쉽게 이야기하는 현상은 그만큼 앞으로 나타날 미래의 상실을 열심히 회피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겠다.     


  재난 영화에서의 ‘우리’는 참 다양하고 많은 위기 앞에 놓인다. 거대한 화산이 폭발한다든지, 큰 해일이 온 세상을 덮친다든지, 갑작스러운 빙하기로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든지. 재난을 다루는 콘텐츠는 실재하는 가능성을 다룰지라도 반드시 판타지의 요소가 가미된다. 콘텐츠의 시나리오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거대한 재난이 닥친 지구를 보여주며 실제 세계를 은폐하고, 편하게 미디어를 즐기는 ‘우리’를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게 만든다. 스크린 속의 인물이 아닌 현실의 나는, 편하게 자리에 앉거나 누워서 재난을 구경하고 있는 존재니까. 현재 나의 삶이 영화 속의 주인공이 처한 시련보다는 안온하니까.     


  그러나 우리는 재난 영화 속 장면처럼 그리 쉽고 간단하게 종말을 맞이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더욱더 열기로 가득 찬 세계에서 숨을 쉬며 살아야 하고, 식량이나 살 보금자리가 없다는 압박감에 눌려서 지금보다 더 고통스럽게 살고 죽어갈 뿐이다. 우리가 알던 세상이 무너지고 변해가도 우리는 최소한의 생존 조건만 갖추어 있다면 살아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용어의 남용과 오락화는 기후 위기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기후 위기에 대한 충격과 경각심, 조그마한 실천의 의지는커녕 오히려 반감만을 일으킨다. 그들은 몇십 년 전, 21세기에 다다르기 전에 잠깐 유행했던 종말론처럼, 기후 위기를 그저 또 하나의 허황된 이야기로만 여기게 된다. 반대로, 기후 위기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거나 기후 위기에 우울과 불안을 느끼는 이들에게 이는 언어폭력으로 작용한다. 우리 앞에 놓인 미래의 모습은 처참할 것임을 이미 알기에, 회의론은 “어차피 우리는 망해버릴 텐데 지금 뭐 하고 있지?”라는 생각의 허무함만을 낳는다.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작은 실천도 아닌 공포와 허무함뿐이다. 극단적이고 공포를 일으키는 발화는 개인이 겪는 우울함의 감정을 악화시키고, “어차피 망할 테니까.”라는 생각에 잠겨서 누구도 행동으로 선뜻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절망과 비소가 교차하고, 재난과 위기가 하나의 오락거리로 전락한 시기에, 비교적 안전하고 온전한 일상을 누려온 이들에게 기후 위기는 또 다른 유흥거리이자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말했듯, 우리는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돈을 먹을 수 없다.”     


  그렇기에 공포의 감정을 포함한 메시지는 나와 나의 주변인, 나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이름 모를 누군가 모두의 생명들이 겪는, 그리고 겪어야 할 미래를 상상하고 행동하는 길을 막는다. 그리고, 사회적인 재난을 목도하면서 마주한 수많은 감정들이 오로지 개인의 병리적 현상으로 치환될 때, 실제 누군가가 위험에 빠지고 목숨을 잃는 재난을 오락과 기회로 삼을 때, 기후 위기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결과와 삶들은 은폐된다.   


        

#3


  마주보고 앉아 있는 의사와 검은. 검은은 단정한 자세로 앉았지만 긴장한 내색을 보인다.

  의사: 불안함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건가요?

  검은: (망설이며) 음… 그냥 사고의 흐름이… 다 기후 위기로 이어져요. 당장 폭염 뉴스를 접하면서 불안해지고… 이대로 다 죽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생각에 더 무기력해지는 것 같아요.

  의사: (잠시 침묵. 그러나 평온한 표정으로) 항우울제를 효과가 더 센 것으로 처방해 드릴게요. 낮에도 불안하다 싶으시면 (하얀 약을 가리키며) 이 약도 추가로 더 드시고요.

  검은: …네.

  검은은 떨떠름하고 실망한 표정으로 대답하지만, 표정은 마스크에 가려져 의사에게 보이지 않는다.     


  끝을 회피하거나 오락으로 소비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기후 위기는 불안을 비롯한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다. 다시 말해 의사에게 내 불안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그 원천인 기후 위기를 말할 수밖에 없다. 용기를 내서 내 심정을 말한 후 들려온 대답은 더 효과가 좋은 항우울제를 처방하겠다는 말이었다. 기후 위기로 인해 생긴 나의 우울한 감정은 정신과 의사에게는 오로지 더 많은, 더 강력한 약이 필요한 개인적인 우울증―병(病)으로 환원된 셈이었다. 그러나 내가 겪는 우울은 단순한 생화학적 불균형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일까. 폭염, 산불, 홍수, 비정상적인 해빙이라는 수많은 재앙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에 커진 우울과 불안, 수많은 감정들은 오로지 나만의 병리적인 현상일까.     


  기후 우울증(Climate Depression)이라는 학술적 용어가 등장할 만큼, 나—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하고 단발적인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망가지고 어긋난 세상에서 경험되는 사회 현상이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위기가 곧 감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기후 위기가 더 이상 ‘위기’가 아닌 일상이 되고, ‘위기’로도 취급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의 불안을 회피하는 대신, 자신의 감정을 대면하는 것일 수 있겠다. 이 때문에 나는 기후 우울증을 겪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나의 감정을 샅샅이 파헤치면서 다시금 느끼고 있는, 기후 위기를 마주하면서 겪는 감정의 결은 곱지 않다. 당장 나의 경우, 기후 위기에 대한 감정은 죽음 공포의 형태로 불쑥 내 머릿속에 등장한다. 아무리 그런 생각을 억눌러도, 기후 위기를 마주할 때 드는 감정들을 하나하나 골라내다 보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섞인 외로움과, 거침과, 젖음을 느끼게 된다.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고통스럽게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눈앞의 기후 위기를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무너져가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고 죽을지도 전혀 모를 앞으로의 상황이 두렵다.     


  물론 기후 위기에 걱정하는 만큼 나 역시 친환경 행동을 조금씩, 더 많이 실천하기 시작했다. 되도록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기회가 되면 육류 대신 채식 식단으로 식사하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옷이나 물건은 사지 않으려는 등… 물론 실천하면 작게나마 뿌듯함을 느끼지만, 가끔씩은(어쩌면 자주) 위의 행동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행동을 똑바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대한 죄책감과 강박감이 든다. 기후 위기로 사람을 비롯한 많은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는 허무함도 함께 몰려온다. 이 행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미 늦은 것 아닐까.      


  다른 사람들에게 기후 위기의 소식과 내 심정을 알리는 과정에서도 좌절을 겪는다. 재난과 위기에 무던해진 사람들에게 현재 상황의 심각함, 그렇기에 행동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설파하는 것은 (성과 여부와 관련 없이) 하나의 크고 고된 도전에 가깝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돌아오는 반응은 야유와 부정이다.     

  “환경 문제가 심각한 건 알겠는데, 왜 그렇게까지 걱정해? 그냥 편하게 살아.”

  “기후 위기? 그런 건 없어. 그냥 너는 우울한 상태인 거야.”     

  큰마음을 먹고 목소리를 내도 나—우리가 감각하는 기후 변화에 대한 감정은 당장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임에도 다른 일에 밀려 ‘사소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내가 느끼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기후 위기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말을 들을 때면, 어느 때는 차라리 나도 이들처럼 생각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속 편하게, 그저 내게 놓인 사소하고 평범한 일에만 신경 쓴 채 큰 걱정과 고민 없이 지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목소리를 내고 행동한다. 아니, 행동으로 나서지 않을 수가 없다.          



#n


  검은의 시나리오가 비어 있다. 검은의 종이는, 앞으로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까.     


  내가 행동으로 나서는 이유는 기후 위기를 더 이상 외면한 채로, 아니면 위기가 아예 없는 것처럼 일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도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재난을 기회처럼 생각할 때, 누군가는 편하게 ‘망해가는 세상’을 상상하며 자신의 일상에 안주할 때, 나는 그 망해가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우리, 그리고 어딘가에서 더 고통스럽게 살아갈/죽어갈 사람들이 걱정된다.     


  또 언젠가 읽은 기후 위기 뉴스에서 “늙어 죽고 싶다”는 청소년 활동가의 목소리가 떠올라서였다. 비록 나는 상상하지 못할지라도, 누군가는 조금이라도 편하고 안온한 세상에서 늙어 죽을 수 있는 미래를 열렬히 꿈꾸고 있다. 이들의 소망을 지나칠 수 없었다.     


  올해 함께 참여한 행진과 시위를 떠올린다. 시위에서 열심히 구호를 외치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차별과 아픔이 없어지기 전에 이 세상이 무너져 버리면 어떡하지?” 기후 변화가 생을 덮칠지라도,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로 고통받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차별로부터 해방된 사회에서 숨 쉴 수 있기를 바란다.

 

  ...     


  이런 생각을 품고 있어도 여전히 나는 기후 위기로 불안함과 무서움을 겪는다. 흔히 쓸데없는 감정으로 여겨지는 우울함과 절망을 일상에서 체화하며 말하고, 움직인다.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느끼는 이 우울함과 좌절, 절망, 분노는 단지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개인의 감정으로만 치부되는 우울함은 실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으로써, 사회의 부조리하고 망가진 면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우울을 겪음으로써, 나 스스로가 망가짐과 어긋남의 증인이 되어 살아가는 삶은 나와 타인의 삶과 미래를 어떠한 변화로 이끌어준다.     


  막막하고, 무섭고, 화가 나고, 슬프고, 서러운 감정은 결코 잘라낼 수도, 풀어낼 수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비록 이 모든 실들은 하나하나 뜯어내고 집어낼수록 나를 다치게 하고 울게 하지만, 오히려 촘촘하게 묶이면서 나를 살아가도록 지탱하는 구명줄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좀 더 나은 미래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작고 사소한 행동이라도 실천하면 조금이라도 변화가 늦춰져서, 내가 바라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와 희망을 통해 묶인 구명줄은 이렇게 살아도 되나 끊임없이 고민하고, 기후 위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세상과 사람들에 욕하며 절망감을 느껴도, 결코 지금까지의 행동들을 멈추거나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게 만들어준다. 결국 내가 죽지 않고 움직일 수 있도록 지탱한다. 그렇기에 사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치부될지라도, 나의, 우리의 작은 감정들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때로는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내며 나를 다독이고, 때로는 타인과 나의 감정을 진솔하게 나누며 기후 위기에 대한 내 마음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은 변화하는 일상에 대처하고 적응하도록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도 나처럼 기후 위기에 대해 우울을 겪고 있음을 이해하고 서로 이야기함으로써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솔한 감정과, 소망과,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늦었지만, 모든 것을 살려낼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건 분명 아직 남아있을 테니 말이다.     

  기후 위기는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안전하고 안온한 방식으로 두지 않을 것이다. 기후 위기가 지속되는 한 나의 우울함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할 우울함에 잠식되기보다, 우리 삶의 끝이 해피 엔딩이 아닐지라도, 우울함을 창과 방패로 삼아 할 수 있는 한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참고 문헌

전혜은. 『퀴어 이론 산책하기』. 도서출판 여이연, 2021.

조효제.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창비, 2022.

헌틀리, 리베카. 『기후변화, 이제는 감정적으로 이야기할 때』. 이민희 옮김, 양철북, 2022.     

씨리얼, “과학자들이 아무리 말해도 당신이 현실부정하는 10년 후 팩트 | 씨리얼 사회탐구” 2019.8.26.,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H-SJ3eKdhSA&t=2s (접속일자: 202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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