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포들
"아나톨은 작은 냄비를 달그락달그락 끌고 다녀요. / 어느 날 갑자기 냄비가 머리 위로 떨어졌어요. 하지만 왜 그랬는지 아무도 몰라요. / 냄비 때문에 아나톨은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었어요.”
아나톨은 마음이 따듯하고 잘하는 것이 아주 많은 아이다. 하지만 이런 멋진 점들은 아나톨을 따라다니는 작은 냄비에 가려져버린다. 달그락거리고 성가신 냄비, 냄비는 아나톨을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아나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도록 만든다.
이 그림책은 이자벨 카리에의 『아나톨의 작은 냄비』다. 작가의 딸이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냄비가 의미하는 바를 쉽게 짐작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책을 펼친 모든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냄비는 무엇인가요?” 이 냄비는 신체적·정신적 장애일 수도 있고,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일 수도 있으며, 트라우마, 성격 등등 사회가 정한 정상성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냄비를 가지고 살아가며, 누군가는 하나 이상의 냄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냄비 때문에 아나톨은 힘들어요.
자꾸 걸려서
앞으로 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요.”
책이 던진 질문을 마주했을 때 나는 아주 쉽게 답할 수 있었다. 나는 왼쪽 귀의 청력이 없다. (달팽이관이 덜 자랐다고 한다.) 선천적인 것이고, 청력이 약한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이기 때문에 치료도, 보청기도 소용이 없다. 이런 몸을 가지고 살아가며 크고 작은 불편에 부딪혔지만 나는 아직까지 이에 대해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아나톨의 냄비』는 내가 당연한 것으로 지워버렸던 나의 불편함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했다.
“사람들은 잘 몰라요. / 아나톨이 평범한 아이가 되려면 남들보다 두 배나 더 노력해야 한다는 걸요.”
책을 읽을수록 들리지 않는 왼쪽 귀와 함께 살아온 시간들이 떠올랐다. 학년이 올라가고 담임선생님이 바뀔 때마다 선생님께 편지를 쓰던 엄마도 생각났고,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해 친구들에게 거듭 사과를 해야 했던 날들과 술자리에서 왼쪽 끝에 앉기 위해 눈치를 살피던 새내기 시절도 떠올랐다. 하지만 분명한 신체적 장애로 인한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정체화하지 않았다. 이 책을 곱씹어 읽으며 나의 경험과 장애에 대해 고민이 이어졌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장애인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캡션 - 그래서 ‘장애등급판정기준’이라는 것을 찾아보았다. 이 표에 따르면 나는 ‘한 귀의 청력 손실이 80dB 이상, 다른 귀의 청력 손실이 40dB 이상’이라는 청각장애 6급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청각 장애인이 아니다.)
내가 청각장애인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했을 때 느낀 감정은 안도도, 실망도 아닌 불쾌함이었다. 이 불쾌함이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그 실체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분명히 신체 기능상의 문제로 살아가는 데 불편을 겪고 있지만, 나의 이런 불편함은 국가가 정한 기준에 의해 지워진다. 내가 장애인인지 아닌지, 나의 불편함이 심각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무엇인지 모를 찝찝함을 남겼다. 하지만 장애 여부를 당사자가 아닌 남이, 또는 국가가 판단하는 것이 옳지 않다면 애초에 ‘장애’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장애인이라는 이름이 이 사회에서 가지는 무게를 생각하면 과연 그 여부를 표 한 장으로 간단히 판단할 수 있는 걸까?
- 손상(impairment): 심리적, 생리적, 해부학적 구조나 기능의 손실(loss) 또는 비정상(abnormality)
- 장애(disability): 인간에게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범위 내에서 또는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방법으로 어떤 활동을 수행하는 능력의 제약(restriction)이나 결손(lack)
- 핸디캡(handicap): 손상이나 장애로 인해 개인에게 주어진 불이익으로서 나이, 성별, 사회문화적 요인에 맞는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방해받는 것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보편적인 장애의 정의를 찾아보았다. UN은 손상, 장애, 그리고 핸디캡을 위와 같이 정의한다. 손상이 의학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손실 또는 비정상을 가리킨다면 장애는 그로 인해 생기는 수행 능력의 제약 또는 결손이며, 핸디캡은 그러한 수행능력의 제약으로 사회에서 받게 되는 불이익이다. 핸디캡의 정의가 ‘사회문화적 요인’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장애로 인한 불편이 오로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라는 전제를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장애의 형성에 사회의 영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정의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바로 ‘인간에게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범위 또는 방식’이 존재한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걷고,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기준을 과연 누가 세운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언급하겠다.
핸디캡의 정의에서 ‘나이, 성별, 사회문화적 요인에 맞는 정상적인 역할’이라는 표현에도 함정이 있다. 같은 신체적 손상을 입은 사람도 처한 사회문화적 환경에 따라 장애인으로 정의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걸어서 이동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에서 이 사람은 장애를 가진 것이기도 하고, 핸디캡을 가진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사람이 여성이고, 그 사회에 여성은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관례가 있다면 어떨까? 걷지 못하는 신체적 손상은 여성은 집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성별에 맞는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데 큰 지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 이 여성은 장애는 있지만 핸디캡을 가진 것으로는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외에도 나이에 따라 부여된 역할 또는 인종에 따른 차별 등으로 많은 소수자들이 이와 같은 관습에 희생되어온 역사가 있다.
“아나톨은 냄비가 없어졌으면 정말 좋겠어요.
하지만 냄비는 떨어지지 않아요.
작은 냄비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국제적으로 합의된 정의에조차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며 우리 사회의 장애는 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판단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위에서도 보았듯이 한국은 행정규칙의 장애등급판정기준에 따라 장애를 등급으로 나누고 이에 따라 복지를 제공하고 있다. 숫자로 기준을 정하여 등급을 매기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지만, 유독 이 표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대상이 누군가의 노력으로 바뀔 수 없는 것, 바로 나의 ‘몸’이기 때문이다. 온전하지 못하거나 기능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몸을 평생 동안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애인의 ‘노오력’을 기대한다. 장애를 극복하고 성취를 이루는 장애인 영웅의 모습은 미디어의 감동 플롯으로 꾸준히 소비되어 왔다. 하지만 실제로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경제적 자원과 여유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장애등급제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장애의 등급을 나누는 주체와 목적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 주체는 국가였고 그 목표는 한정된 복지 예산을 편리하게 배분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편리함이란 말 그대로 국가가 가진 돈을 계산하기 편리한 것을 의미한다. 효율성이라는 이름 앞에서 장애를 가진 개인들의 요구와 특수성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거동이 불편한 두 사람이 있다. 둘 다 걷는 속도도 느리고, 금방 지치기 때문에 오래 걷지 못한다. 하지만 A가 살고 있는 동네는 인도가 잘 포장되어 있고 대중교통도 편리한 반면, B는 집 밖으로 나오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고 위험한 차도를 건너야 한다. 그들이 처한 환경을 보지 않은 채 과연 그들의 냄비의 크기를 알 수 있을까? A와 B의 몸이 같다고 해서 그들의 냄비도 똑같은 크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장애인에게 접근성을 보장하지 않는 환경에서 냄비는 훨씬 더 커진다. 하지만 현재의 장애등급제와 복지체계는 이러한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국가는 오직 의학적인 기준만으로 장애인에게 제공될 복지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이 예시에서는 단순히 주거환경만 바꾸어보았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여건, 보살핌을 제공할 수 있는 혈육의 유무 등등 훨씬 더 많은 변수들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 냄비만 쳐다봐요.
냄비가 이상하대요.
무섭나 봐요.”
신체 기능으로 한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발상의 이면에는 평범함, 즉 ‘정상성’을 기본으로 삼는 전제가 깔려있다. 학교에서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인재’를 가려내기 위해 성적으로 등급을 매기듯이, 장애등급제는 이 사회가 정해놓은 구조 속에서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노동력을 가려내기 위해 우리의 몸에 등급을 매긴다. 이 나무 상자가 우리 사회를 이루는 구조이고, 상자에 뚫린 구멍이 사회가 상정한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해보자. 저 구멍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나무 블록만 상자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공적 공간에 속하도록 기대되는 개인의 모습은 ‘건강한 육체를 가진 젊은 성인 남성’이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공장에서 찍어져 나오는 나무 블록이 아니다. 사회가 정한 정상인의 이미지는 동시에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늙고, 아프고, 어딘가 부족한 개인들을 사적영역으로 몰아낸다. 실제로 존재하는 많은 삶들을 지우게 되더라도,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율을 얻는다는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이용 가능한 노동력으로서 인간의 디폴트값을 정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공적 영역 밖으로 추방된 장애인의 삶은 낯설고 두려운 대상이 된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진 냄비는 신체적 손상이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따라온 사회적 낙인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3월 ‘내년 7월부터 장애등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제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을 발표했다.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은 장애인들의 개별적 욕구와 환경을 고려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발표에 대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지난 5월 ‘CVID’ 장애등급제 단계적 완전폐지라는 목표를 내놓았다. ‘CVID’란 장애등급제의 폐지가 ‘장애인의 지역사회의 완전한(Complete) 통합을 위해, 지역사회 통합에 대한 검증가능(Verifiable) 하며, 다시 장애인수용시설로 돌아가지 않는 불역적인(Irreversible) 방식으로 장애등급제를 단계적으로 완전 폐지(Dismantlement)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동향에 따르면 정부의 정책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효율성과 경제 논리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에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이 언제 다시 정부의 편리를 위해 뒤편으로 밀려날지 모르는 일이다. ‘맞춤형 서비스’라는 말만으로는 과연 그들이 모든 개인들의 접근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사회를 큰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궁극적인 해결책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장애를 치유해서 비장애, 즉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애에 대한 이미지와 개념은 차라리 환상에 가깝다. 그에 대응하는 ‘정상’이라는 기준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의 구조에 들어맞도록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세워졌다. 만약 당신의 지인이 장애를 가지고 있어 거동이 불편하다면 당신은 그가 겪는 어려움을 보며 어떤 해결책을 먼저 떠올리겠는가? 의료기술이 발달해서 그가 꾸준한 의지를 가지고 장애를 극복하는 것? 아니면 장애를 가진 사람도 어디든 어려움 없이 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세우는 것? 우리 모두 후자가 더 이상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가진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겠어, 너무 현실성이 없잖아. 그 정도 불편함은 감내해야지.” 사회적 비용을 걱정하는 대신 그런 노력이 가져올 수 있는 장기적인 삶의 변화를 생각해야하지 않을까? 우리는 장애는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먼저 가져야 한다. 물론 신체적 손상을 치료할 수 있도록 의학적으로도 노력해야 하지만, ‘장애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에 대한 더욱 정확한 해답은 치유가 아닌 사회적 기반의 구축과 인식의 변화이다.
(캡션 - "Buggy users please make space for wheelchair users. (유모차는 휠체어에 자리를 양보해주세요.)" 영국 런던의 시내버스에 붙어있는 광고 문구. 대부분의 버스에 유모차나 휠체어가 두 대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필자는 해외여행 중인데, 이곳에서는 버스를 타고 대여섯 정거장 정도를 가는 동안 휠체어를 탄 사람과 유모차나 장보기용 손수레를 끄는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것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 시내를 도는 모든 버스가 저상버스이기 때문이다. 장애에 대한 철학을 담은 책 『거부당한 몸』의 저자 수전 웬델은 장애가 없는 사회란 모든 신체적·정신적 ‘결함’이나 ‘비정상성’이 치료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완전한 ‘접근성’을 갖춘 사회라고 말한다. 장애등급제는 언젠가 완전히 폐지되어야 하겠지만, 장애가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부터 노력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 접근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회 곳곳에서 세심한 배려와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예로는 대학 축제에서 장애인 좌석과 수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휠체어가 출입할 수 있도록 건물을 설계하고, 장애인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이동수단과 도로를 정비하고, 장애인이 자신의 능력을 계발할 수 있는 직업을 구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등 장애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길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아나톨은 예전과 똑같은 아나톨이랍니다.”
아나톨의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나톨은 또 다른 냄비를 가진 어떤 사람을 만나 냄비를 가지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고, 냄비를 넣을 수 있는 가방도 선물 받는다. 냄비는 여전히 달그락거리지만 예전만큼 거추장스럽지 않다. 아나톨은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되고 사람들도 아나톨이 무엇을 잘 하는지 알아차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나톨은 예전과 똑같은 아나톨이라는 사실이다. 이 그림책은 장애인권에 대한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동시에 우리가 어떠한 해결책을 그려나가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제시한다. 아나톨은 냄비를 떼어내지 않고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가방’이라는 사회적 보조장치를 통한 접근성의 개선과 사람들의 시선, 즉 사회문화적 측면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애는 치유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 사회가 세운 정상성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러한 변화의 첫걸음이다. 익숙했던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새로운 생각의 틀을 필요로 한다. 기존의 사회가 정해진 구멍을 통과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무 상자였다면, 냄비가 그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속 좁은 꼬불꼬불한 모양의 구멍이 아니라 입이 아주 커서 무엇이든 모두 담을 수 있는 그런 냄비 말이다. 이자벨 카리에는 세상에는 많은 냄비가 있고, 냄비에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달그락거리며 귀찮게 구는 작은 냄비까지도 모두 담을 수 있는, 그런 커다란 냄비가 아닐까.
<에필로그>
문우 60호의 마감 작업이 마무리되어 가던 8월 22일, 보건복지부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발표했다. 2019년 7월부터 장애인의 의학적 상태에 따라 1급부터 6급까지 등급을 부여하던 기존의 방식 대신 개별 장애인의 서비스 필요도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를 도입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일부개정안’에 따르면 여전히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기존 1~3급)’과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장애인(기존 4~6급)’의 구분이 존재한다. 단계적 완전 폐지를 위한 첫걸음을 내딛은 것은 기쁜 일이지만, 정부의 ‘맞춤형 서비스’가 과연 개개인의 목소리를 모두 귀담아 들을 수 있는지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이다.
참고문헌
- 이자벨 카리에 『아나톨의 작은 냄비』 씨드북, 2014
-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그린비,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