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루
인간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누가 들으면 내면의 결핍과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는 연애관계를 가져야만 하고 언제나 현재의 연인에게 죽고 못 사는 대단한 로맨티스트의 이미지를 떠오를지 모르겠다. 왜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서 제일 먼저 연애를 떠올리는 걸까? 왜 ‘사랑’이란 종종 단편적인 연애 개념에 갇혀 편협하게만 받아들여지는 것일까? 규범적 연애는 반드시 일정한 감정이나 수행 양식[1]을 요구한다. 그 속에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형태에서 벗어난 감정이나 수행에 기반한 사랑은 쉽게 지워지거나 매도되기 마련이다. 나는 ‘사랑’의 의미를 좀 더 넓은 측면에서 논할 수 있는 담론장을 원한다. 앞서 언급한 납작한 기존 연애 담론 속에서 놓치게 되는, 혹은 놓아야만 한다고 요구받는 소중한 관계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자. 우선 나의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한다.
나에게 사랑은 깊은 애정과 유대감, 그리고 헌신을 모두 포함하는 감정이다. 나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분명히 사용할 수 있는 (친구 사이에 미안함이나 감사함을 표현할 때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사랑해!’와는 구별됨을 미리 밝힌다.) 친구들이 있고 그것은 통용되는 우정의 의미와는 다소 다르다. 이는 차라리 애인에게 느끼는 감정과 더 유사하다. 다만 나에게 애인은 사랑하는 친구들 가운데 가장 헌신하고 1순위로 두고 싶으며 또한 상대도 나에게 그래주었으면 좋겠다는 일련을 기대를 걸게 되기에 그에 따른 약속으로써 서로를 구속하는 인간이다. 수행의 측면에서 다른 친구들과 분명히 구분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근원적 감정의 결이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나는 연애관계를 약속한 애인도, 연애관계를 따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매우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부 친구들도 모두 ‘사랑’한다고 표현한다. 합의한 수행의 방식에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서로의 개인적 특성에 맞춰지는 뿐 관계의 이름이 그것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사랑하기에 친구와 할 수 있는 것은 애인과도 모두 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일 것이다. “애인과 다른 친구의 차이가 별로 없다고? 그게 정말 사랑하는 거라고 할 수 있는 거야?” 대답은 물론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고 폄하하지 말자. 내가 경험한 적 없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삶이고 이것이 나의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이라고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까? 내 삶을 스쳐 지나간 많은 사랑을 떠올려본다. 연애라는 이름의 무게에 떠밀려 잃게 된 많은 사랑을 떠올려본다. 우리는 왜 사랑을 느껴지는 그대로 내버려두질 못하나. 사랑은 종종 결혼 제도로 대표되는 사회 유지의 의무를 주렁주렁 매달고 나타나기도 한다. 로맨스 영화에서 보이듯 특정한 이상적 모습으로 설정되어 사람들에게 규범 행동양식을 알려주는 지표로 기능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의 형태는 결코 단일하지 않다.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경험하게 되면서도 모두가 다르게 주고받고 해석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겠는가. 사랑을 연애와 결혼에만 결부시켜, 연애와 결혼 상대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편협한 시선을 이제는 뒤집어도 되지 않을까.
Love wins 라는 유명한 퀴어운동 구절이 있다. 이는 최근에 에이로맨틱 배제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지금껏 사랑이라는 단어가 줄곧 연애와 결혼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이용되어왔고 특히 에이로맨틱 당사자들이 그 담론장에서 얼마나 지워져 왔는지를 생각해보면 퀴어계 내의 고질적인 유성애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좋은 지점이었다고 생각한다.[2] 그렇다면 저 문구는 이제 더 이상 그 의미를 잃는 것일까?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를 거부하기보다 더욱 확장해 나가는 것은 어떨지 제안하고 싶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규범적 연애형태와 로맨스 코드에 국한시키지 않고 그 의미를 넓혀가고자 하는 유연한 상상력은 이 땅의 더 많은 사랑에 힘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에 유의미한 시작점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좀 더 다양한 형태의 사랑 이야기가 필요하다. 앞서 사랑은 깊은 애정과 유대감, 그리고 헌신이라고 설명했다. 서로에 대한 긍정적인 애착과 건강한 교류는 결국 모두 사랑이라 불릴 수 있다. 기존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오던 사랑의 개념과 연애규범에 저항하는 의미로,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지 크게 소리칠 수 있다. 규범적 연애 틀 밖에 얼마나 다양하고 재미있는 관계가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 일례로, 퀴어플라토닉 관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전통적인 로맨틱 커플이나 친구의 모델에 들어맞지 않으며, 흔히 우정이라고 간주되는 것 이상으로 더 강렬하고 친밀한 감정을 관계 수행자 간에 느끼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 관계 내에서의 언약 수준은 로맨틱 관계에서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볼 수 있다. 누구보다 친밀한 동반자 관계는 모두가 한 번씩 상상해본 적이 없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퀴어라고 정체화하지 않는다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특정 로맨틱/섹슈얼 지향이거나 퀴어 정체성이 강한 사람들만 퀴어플라토닉 관계 수행이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퀴어플라토닉이라는 개념 또한 모든 사랑에 대한 최선의 표현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대안 연애 형태에 대해 더 많이 상상해봄으로써 전통 연애규범에서 벗어나고 견고한 이 보편연애중심체제에 작은 균열을 가하는 한 걸음을 시작해볼 수 있다. 로맨틱 끌림을 느끼지 않아서, 친구나 애인이라는 언어의 벽에 부딪혀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관계수행들을 생각해보자. 인간의 사회적 자아는 전통적 연애관계 이외에도 건강한 교류가 가능한 인간관계를 종종, 아니 꽤 자주, 어쩌면 늘 필요로 한다. 그러한 관계는 넓은 의미의 사랑으로 표상된다. 이때 우리는 누구나 자유로운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모두를 위한 것이며 특정한 틀에 갇혀서는 안된다. 모든 형태의 행복한 애착관계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그날을 위해 계속 유연하고 아름답게 사랑하는 인간이 되자.
* 대안 연애와 사랑의 새로운 개념에 대해서는 Elizabeth Brake 의 저서 『Minimizing Marriage: Marriage, Morality, and the Law』 을 가장 추천한다. 혹 스스로를 새로이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나누는 데에 편집위원 루가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것 같다면 문우를 통한 연락을 언제든 환영한다. 이번 학기 말부터 위의 책 원전을 함께 읽고 번역하면서 이야기 나누는 활동으로 시작할 작은 퀴어플라토닉 모임도 기획 중이니 이에 관심 있는 분들도 연락 바란다!
[1] 보편적으로 ‘연애’라는 개념과 함께 따라오는 이미지, 그러한 형태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특정한 결의 감정과 그것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일련의 행동들, 그리고 로맨틱 코드라는 틀 안의 과정에서 연인들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특수한 언행을 의미한다.
[2] Love wins와 함께 놓이는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문제지점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성으로 패싱되는 커플이 밝은 배경을 뒤로 하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듯이 미소지으며 키스하는 등의, 완벽하게 이상적으로 그려진 로맨스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헤테로나 호모나 다를 것이 하나 없다는 정상성을 어필하고자 하는 의도가 투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