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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Oct 31. 2019

조커에게 대실망했다. 폭력의 미화. 시대착오.

올해는 정말 영화 가뭄의 해구나


영화 '조커'가 그렇게 대단하다길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보러 갔다. 조커가 '웃는 병'에 걸렸다길래 궁금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도 좀 그런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굉장히 웃는 인상이고 화날 때도 슬플 때도 황당할 때도 그저 웃는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산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내가 감정표현이 서툴러서 그런 거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조커처럼 크게 터지지도 않고 듣기 나쁠 정도로 웃지도 않는다는 점. 그리고 여자라서 그런지 그냥 귀엽다고 넘어가 주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영화 조커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면 대실망했다. 끝까지 다 보기에는 영화에 가득 담긴 허세와 궤변을 견딜 내 항마력이 부족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어떻게 다 보고는 나왔다. 고생했다 여느.




초반부에는 조커에 빠져들어 봤다. 약자의 설움. 잘못한 것 없이 당하는 억울함, 아픔, 분노.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이룰 수 없는 꿈. 낫지 않는 병. "아서 당신은 이미 약을 7개나 복용하고 있어요." '죄송해요 제겐 병이 있어서 그래요.' 동료 아닌 동료. 잠시 올라왔다 이내 거두는 미소. 저 쇼의 주인공이 나일 수 있다는 망상. 저 불운의 주인공이 나일 수 있었다는 묘한 불안감과 안도. 가족에게 기쁨을 전해주지 못한다는 자책감.

조커의 망상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 였다. 도입부 이후부터 나는 조커에게 더 이상 공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막아 세우고 싶었고, 안아주고 싶었다가, 종내에는 그를 두들겨 패고 싶었다.



계급 최상위 포식자들이 계급 투쟁을 운운한다?


내가 뒤틀린 인물이라 그럴지도 모르지만 화려한 유럽과 미국의 영화계, 그리고 한국의 평단. 아마 그들의 고민거리라곤 내일 굴을 먹을지 스시를 먹을지 캐비어를 먹을지 정도일 것이다. 그런 그들의 심심한 세계에 조커라는 파격적이고 폭력적인 인물과 작품이 등장했으니 그들은 얼마나 신이 났을까. "우리에게도 자극이 필요했어!"라면서.


예전에 어느 재력가 어르신과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분은 그 나이대의 어르신들과는 다르게 대학교육까지 받은 엘리트셨다. 첫 만남이었지만 내가 당신과 같은 여성이고 똑똑하다는 이유로 나를 좋아해 주셨다. 그분은 내게 계급 투쟁과 저항정신의 아름다움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셨다. 나는 들으면서 이건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누가 봐도 계급 최상위 중의 최상위에 계신, '계급의 타도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른이 말할 때는 끼어들지 않는다. 그렇게 배웠으니까. 하지만 결국에는 나도 한마디 했다. 나도 저항하면 한 저항하고, 반골 하면 한 반골 한다.


선생님, 우리는 투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저항 정신 가득한 영국의 밴드 '섹스 피스톨즈'를 소재로 한 영화 '시드와 낸시'를 보면 첫 장면부터 부자에 대한 저항으로 롤스로이스를 때려 부수는 두 밴드의 멤버가 나옵니다. 선생님의 논리대로라면 저도 지금 나가서 여기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세워진 스포츠카부터 때려 부수고 올라오면 될까요?


차마 선생님의 외제차를 때려 부순다는 말은 못 했다.

그리고 나는 두 번 다시 그분의 댁에 초대받지 못 했다.



조커를 보는 내내 영화제의 평단과 그 선생님이 겹쳐서 떠올랐다. 이건 모순이다. 당신들이 밑바닥의 삶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싸구려 공감 같은 거 필요 없다. 그냥 먹던 비싼 랍스터나 먹어라. 소고기던지.



부자는 왜 두들겨 맞아도 안 불쌍한데?


앞의 내용과 상반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딱히 부자에게 악감정은 없다. 다만 모순적이고 이해하는 척하는 상위계급은 싫다는 거다. 그런데 조커는 무조건 계급을 나눠서 부자는 나쁜 놈, 빈자는 착한 사람으로 흑백논리를 펼쳤다. 2019년에도 미국사람은 짐승의 형상을 한 승냥이로 등장하는 북한 영화도 아니고 시대가 어느 땐데 흑백논리가 등장하는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영화 베트맨의 스토리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거니까 그냥 적겠다. 어린 브루스 웨인은 자신의 눈 앞에서 부모님 둘이 총에 맞아 사망하는 것을 목격한다. 조커에 편에선 분노한 누군가에 의해. 브루스 웨인은 부자니까 눈 앞에서 부모를 죽이는 광경을 보게 해도 되나? 나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어린 소년에게 얼마나 잔혹한 짓인가.



아서 이 사람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지.


아서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다. 그것도 그냥 코미디언 말고, 유우명한 코미디언. 그러나 그에겐 재능이 없었다. 대신 그에게 있는 건 정신병이었다. 그는 이런 가슴 아픈 말을 남겼다.


 The worst part of having a mental illness is people expect you to behave as if you don't.
정신병자의 가장 큰 단점은 사람들이 네게 병자와 같이 행동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 병까지 앓고 있는 아서에게 나도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세상 사람 모두가 각자의 사정으로 힘들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는가? 물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다. 하지만 100퍼센트의 상호 이해라는 것은 애초에 이 인간사회에서 발생할 수 없다.

다 아프다가, 견디고, 화도 냈다가, 풀고, 웃었다가, 울다가 그렇게 산다. 자기 자신도 자기에게 못되게 구는 동료를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하고 100퍼센트 용서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그런 관용을 요구한다는 것은 오히려 못된 짓이다. 아서, 너 말이다.


모두가 아서와 같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회라면 아서는 코미디언으로 대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 조커 속 사회에서 아서는 먹히지 않는 코미디언이었다. 그러면 빨리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애타심이 넘쳐 의사가 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다 정의감에 불타 판검사가 될 수 없듯이. 단 적인 예로 남미의 한 국가가 플랜 아(Plan A), 플랜 비(Plan B)라는 입시 경로를 통해 의사가 되고 싶으면 다 의사가 되게 해주었다. 그랬더니 발생한 것은 의료 수준의 퇴보였다. 환자들만 다치는 것이다.


나도 꿈을 포기해본 경험이 있다. 많이 아팠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꿈을 내가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두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받아들여야지. 이것도 삶의 한 조각이다. 그런데 아서는 그걸 놓을 줄을 몰라서 스스로를 더 괴롭게 만들었고, 가뜩이나 미쳐있는 그의 정신상태는 더 미쳐갔다. 어쩌면 그는 그냥 그대로 더 미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아이고 신나라



조커는 범죄자다. 잊으면 안 된다.


세상이 그를 미치게 만들어서 범죄자가 되었다고 변호한다 해도 그는 범죄자다. 그리고, 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며 그 때문에 소름이 끼쳤다.



바로 이 장면. 조커가 짝사랑하던 여자 집에 무작정 찾아들어간 장면. 그 집에는 어린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 단 둘만 살고 있었다. 원치 않는 사랑의 대상이 되어버린 불쌍한 소녀의 엄마는 불 꺼진 집에 무작정 들어온 남자를 보고 겁에 질려 벌벌 떨며 나가 달라고 간청한다. 이런 남자가 우상화의 대상인가? 이것도 사랑인가? 상대가 원치 않는 일방적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다.  




    

그래서 나는 조커를 때리고 싶다. 합성을 한번 해봤다. 친구들에게 보여줬더니 의견이 두 개로 갈린다:

1. 진짜 패러 가는 것 같다.

2. 패거리로 합류하러 가는 것 같다.


1번이 내 의도였다.


그리고, 어차피 조커랑 싸워도 내가 진다. 졌다. 끝.



차라리, 어둠의 복수자에 대한 영화를 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브레이브 원


운동나갔다가 정말 재수없게 갱단에게 습격당해서 약혼자를 잃고 병원 신세를 졌던 여자가 예의 없는 것들을 스스로 청소하고 다니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이게 정의일까' 영화는 관객을 고민하게 한다. 차라리 이걸 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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