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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Oct 16. 2019

1979년 이란혁명은 어떻게 이란의 퇴보를 가져왔나

본 글은 전에 일하던 신문사 제출용으로 작성했던 것이나 고결하신 윗분들의 관심없음(특히 여성인권?)으로 사장된 글이다. 어차피 기사 발행도 안된 글이고 브런치야 내공간이니까 한번 올려본다.


내가 이란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11년 캐나다에서 이란 난민들을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되고 부터 였다.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과, 지금도 계속 떠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던 것은 내겐 정말 귀중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란혁명은 기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역사적 수식들을 굉장히 뒤틀어버린다는 점에서도 내 관심을 끌었다.




‘혁명’ 영어로는 Revolution 이 얼마나 멋진 단어인가.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 이야기를 들으며, 혁명가 체게바라의 얼굴을 문신으로 새기며 혁명에 전율한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후 태동한 혁명세력 자코뱅 당의 핏빛 독재 정치나 체게바라의 못말리는 롤렉스 시계 사랑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핵무기, 유조선 갈취, 드론 테러, 예멘 반란군 지원, 여성 억압, 이란 난민 5백만명 육박 등 셀 수 없는 사건 사고로 국제사회의 우려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란도 원래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모든 일은 1979년 이란 혁명 세력이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국가 건설을 선언한 ‘이란 혁명’후 벌어졌다.      


1925년부터 1979년 2월 11일까지 이란의 공식적 왕이었던 팔라비 왕조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들이다. 팔라비 왕조가 고리타분하고 수구적이었다고 넘겨짚으면 오산이다. 팔라비 왕조는 굉장한 개혁주의 왕조였다.      


팔라비 1세와 2세는 탈(脫)이슬람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팔라비 2세는 1963년 ‘백색혁명’을 통해 토지개혁과 여성 희잡 착용 의무 폐지, 여성참정권 부여라는 이슬람권 국가에는 가히 충격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1974년에는 테헤란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며 비이슬람 국가와의 교류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테헤란로’도 1977년 서울특별시와 이란의 수도 테헤란시가 자매결연을 맺으며 탄생했다.     


그러나 팔라비 왕조의 개혁개방 정책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이란 대학생들과 무슬림 시아파 반(反)서방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시아파 성직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필두로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1977년 호메이니의 장남이 심장마비로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팔라비 왕조와 반팔라비 세력간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팔라비 왕조가 일부러 호메이니의 장남을 암살했다는 괴담이 확산되며 이란 전역에 무장 봉기가 일어난다. 당황한 팔라비 왕조는 무장 봉기 세력을 강력하게 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연이어 발생하며 이란인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서방세력은 이때 그저 따뜻한 방구들에 앉아서 '거, 팔라비 왕조 너무하는것 아니오?'하는 정도였다. 결국 1979년 1월 팔라비 2세가 국외로 도피하며 호메이니가 이란의 실권을 장악한다. 이것이 바로 ‘이란 혁명’이다.

     

이란 혁명 후 이란은 180도 달라졌다. 팔라비 왕조의 폭력을 맹비난하던 호메이니는 실권을 장악하자마자 이란내 좌파 세력과 개혁개방 세력들을 재판 없이 공개 처형하기 시작한다. 여성 인권 상황은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보다 퇴보했다. 여성을 사형함에 있어 '처녀인 여성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이슬람 율법에 가로막히자 호메이니는 “그럼 죽이기 전에 강간해라. 그럼 처녀가 아니니까 죽여도 되겠네”라고 직접 지시하기까지 한다.

 

혁명가 호메이니는 서양과 동양 국가들을 골고루 자극해 국제사회가 이라크의 이란 침공을 묵인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기어이 핵개발에 착수해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를 받으며 이란인들은 굶주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이란인들이 살기위해 이란을 떠났고 이들의 후손들은 현재 유럽과 북미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내가 밴쿠버에서 만났던 친구도 할아버지가 정부 관료였다는 이유로 당시 혁명세력의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있었고 가족 전부가 살기위해 오스트리아로 도피한 끝에 캐나다에 정착했다.


1979년 이란 혁명 후부터 2010년까지 약 5백만 명의 이란인들이 난민으로 자국을 탈출한 것으로 집계된다. 국내에도 종교 박해 등을 이유로 지난해 이란 출신 소년이 난민 인정을 받았다.     


'혁명을 통해 이란인이 원하는 이란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던 이란 혁명의 결과는 수많은 이란인이 고통을 못 이겨 고향을 등지고 해외를 떠돌게 만들었다.

      

요즘 한국 사회에도 ‘혁명’이란 단어가 자주 들린다. 이것도 혁명 저것도 혁명 뭐든 사람만 모였다 하면 혁명이다. 하지만 혁명이라는 이 폼나는 단어의 끝이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점을 우리 모두 견지해야 하지 않을까.




최근 40년만에 이란 여성들의 축구 관람이 허용됐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너무도 당연한 이 스포츠 관람 하나를 위하여 한명의 이란 여성운동가가 목숨을 바쳐 분신 자살을 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https://www.essentiallysports.com/woman-self-immolates-after-being-found-guilty-of-illegally-entering-football-pitch/


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1910118671H 


사실 이란의 혁명가 호메이니는 축구도 금지했었다. 지나치게 서방적이고 종교에 맞지 않는다나. 그래도 사람이 재밌는건 포기 못하는지 은근슬쩍 축구는 허용했다. 남자들에게만. 여전히 이란 여성축구팀은 없다. 그리고 왜, 피의 댓가를 치르게 하는 것일까.




https://amnesty.or.kr/onlineaction/28440/

이건 뭐 할말이 없다. 채찍형 148대 라고 합니다.


캐나다의 내 직장동료들도 한국 드라마를 좋아했다. 문제는 내가 한국 드라마를 안봐서 대화가 안통했다는 것. 아무튼 그래서 제법 한국에 대해 알았는데 어느날은 한 동료가 슬픈 눈을 하고 내게 물었다.


"너는 왜 한국을 떠나서 살고 싶은거야?"


돌아갈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에 딱히 뭐라고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그냥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내가 너라면 나는 한국에 살겠어. 나는 사실 이란이 그리워. 못가본지가 20년이 넘었어. 그런데 그리우면서도 가고싶지 않아. 지금 가잖아? 그러면 히잡을 써야해. 어딜 가든. 난 못써. 그건 정말 싫어. 넌 써본적 없지? 정말 갑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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