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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Oct 22. 2019

유럽으로 떠났던 이유, 여행기를 시작한 이유


요즘은 매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틈틈이 번역 프리랜서 일도 하고 있고, 이번 주에 매우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있기에 오전부터 2~3시까지는 거의 그 회사 면접 준비로 공부를 하며 보낸다. 그러다가 생각이 나면 브런치에 충동적으로 이런저런 글들을 올린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서도 내 가슴속에 가장 남아있고, 가장 걸리는 글은 유럽 여행기에 관한 글이다. 기쁘게 다녀온 여행이면서도 아련해서 슬프기도 하고, 여행기가 브런치를 시작한 주요 이유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브런치 북으로 묶는 데까지 이제 생각해둔 글도 몇 개 남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여행을 시작한 이유와 여행기를 쓰기 시작한 사연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작년 12월 캐나다에서 귀국하며 더 이상의 외국행은 내게 당분간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젠 외국이라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만 했다. 쉬지도 않고. 하지만 무슨 탓인지 나는 일만 할 수도 없었다.


다니던 회사에서 폭력사건이 났다. 발단은 평기자가 받아오던 부당대우 탓이었다. 업무역량 평가에 있어 제법 냉정한 내가 봐도 그는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었고 그런 대우를 받을 직원이 아니었다. 작은 회사였기에 따로 HR팀도 없어서 그는 대표에게 몇 번이나 면담을 신청했지만 묵살당했다. 내가 처음 충격을 받은 것은 여기서 였다.

그 평기자는 부당대우 속에도 나와 주말에 자진 출근해 기사 마감을 했다. (당연히 우리가 주말 수당을 요구한 적은 없다.) 대표도 사무실에 있었다. 대표가 그 평기자에게 단 30분만 할애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줬더라면 종내 폭력사건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문제는 편집부장이었다. 그가 평기자 부당대우의 핵심축이자 마감 연기의 1등 공신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자리를 비웠고 할당 원고를 채우지 못한 이유를 나와 평기자에게 돌렸다. 우리 원고를 수정해주느라 자신의 원고를 작성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부장님, 부장님이 그렇게 자리만 안 비우셨어도, 원고 쓰실 시간은 있었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저희는 주말 동안 원고를 끝내 월요일에 드렸는데 수요일에야 보셨잖아요.' 물론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편집부장은 결국 마감을 며칠 앞두고 자기 원고 중 하나를 씩 웃으며 '이건 여기자(나)가 쓰자'며 내게 떠넘기는 것으로 한번 더 자신의 업무를 맛난 회 먹듯 날로 먹었다.


결국 작은 사무실 속 편집팀 분위기는 흉흉해졌고 대표님은 평기자 면담 대신 술자리를 제안하셨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문제가 있을 때 갖는 술자리다. 딱 586세대들이 좋아하는 것. '우리 술 한잔 하고 좋게 좋게 풀자' 정말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찌하랴. 윗분들이 가시자는데 가야지. 원래 술도 못 마시는 나지만 그래도 갔다. 독한 소맥 한잔을 겨우겨우 끊어마시며 그래도 술자리라고 나와 평기자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재롱부리느라 고생을 했다. 나는 평기자에게 정말 쓸데없는 자리니까, 정말 쓸데없는 얘기만 하고 파하자고, 그렇게 누차 얘기만 했다. 그러나 술이 원수였고 평기자도 자존심이 상할 대로 많이 상한 상태였다. 그는 결국 내내 낄낄대기만 하던 부장과 대표에게 말로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그리고 제법 술이 된 부장과 대표는 나와 다른 여직원 앞에서 자신들의 남성성을 증명하려는 유인원들처럼 독이 단단히 올랐다. 술병으로 테이블을 쾅! 치고는 평기자의 멱살을 잡았다. 나는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둘 사이에 끼어들어 둘을 떼어놓으려 했는데 대표는 "야! 너 나와!" 하며 내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무서웠다.


폭력은 술을 마시던 고깃집을 나온 뒤에도 계속됐다. 나와 다른 여직원은 이 두 남자의 폭력으로부터 평기자를 지키기 위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평기자는 맞고만 있었다. "때려봐! 때려봐! 니들 진짜 이따위로 하지 마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까지 폭력에 합세했다면 그날 우리는 나란히 경찰서로 향해야 했을 것이다. 평기자는 목까지 졸렸고 나는 안간힘을 쓰며 편집부장의 허리를 잡고 그를 떼어냈다. 그날 내가 본 건 야만이었다.


다음날 평기자는 사직서를 썼다. 나도 썼다. 직원을 이렇게 대우하는 회사는 다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사직서를 쓰던 그날 밤에 나는 참 많이 울었다.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하며.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사직서를 쓰고 있냐 하며. 내 커리어는 산산조각 났구나 하며.


그런데 그날 밤에 아는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언니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첫마디가 바로 "여느야 죽지 마"였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많이 힘들어 보이긴 했나 보다. 그래서 나는 망설이던 내 사직서를 마무리했다. 진짜로 더 일을 하다간 진짜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언니는 계속 나에게 죽지 말라고 했다. 나도 엉엉 울었다. 알겠어요 언니, 죽지 않을게요. 약속할게요, 안 죽기로.


출근해서 평기자가 먼저 사직서를 제출했다. 대표는 자신이 평기자를 폭행했던 건 까맣게 잊은 건지 잊은척하는 건지 평기자에게 사과부터 하라고 했단다. 당연히 평기자는 사과하지 않았고 그의 사표는 바로 수리되었다. 문제는 나였다. 내 사표가 수리되지 않은 것이다. 대표는 내게 내일 하루 휴가를 줄 테니 오늘은 일하고 내일 쉬고 앞으로 계속 일하라고 했다. 맙소사. 당신이 무슨 권리로. 그는 절대 내 사표를 받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러면 일단 오늘 쉬어야겠다고 했다. 어제 일이 기억나지 않느냐니까 하나도 안 난다고 했다. 평기자가 그만둔다고 너까지 그만둔다고 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당일에 쉬는 것으로 하고 일단 회사를 나왔다. 평기자는 내게 "여느 기자님은 이 일을 좋아하고, 굳이 나 때문에 그만둘 것 없어요"라며 나를 달랬다. 하지만 나는 그 때문에 그만두는 게 아니었다. 진정으로,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 회사는 다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 날이 목요일이었으면 나는 금요일에도 회사를 나가지 않았고, 다른 방법으로 다시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주말에 평기자와 가서 내 자리 짐을 다 정리해왔다. 여기서 잠시 말하자면 회사는 직원의 사표 수리를 거절할 권리가 없다. 거절한다면 그게 갑질이다. 대표도 뒤늦게 자신이 술 마시고 내게 행했던 폭력이 기억났는지 더 이상 나를 잡지 못했다.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면 생각도 좀 정리가 되고 인생도 리프레시가 되는 것은 분명 있다. 마침 독일에 보고 싶은 친구가 있었고, 아는 사진작가 오빠가 영국에서 프로젝트를 하러 떠날 참이었다. 거기에 친한 언니도 이미 영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출국 시기가 다 맞게 떨어지니, 나는 오빠 프로젝트도 도울 겸, 독일에서 친구도 만날 겸, 그리고 나의 미스권도 만날 겸 영국행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드디어 떠나는 날이 왔다. 친한 오빠가 잘 다녀오라는 의미로 고기도 사주고, 공항까지 나의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길동무가 있어서 그랬는지 여기까지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약간 설레는 정도. 그런데 문제는 비행기에 보딩하고 시작됐다.



갑자기 내리고 싶어 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실업자 상태였다. 저축한 돈 다 긁어모아 떠나는 여행. 다녀와서 또 언제 이 돈을 모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자꾸 생각나는 부모님. 남의 자식들은 부모님 효도관광을 보내드린다는데 나는 여태껏 그런 적도 없으면서 또 회사 그만두고 몇 백씩 써가며 해외로 나가고 있나. 가슴이 쿵쾅거리고 비행기에서 내리고 싶어 졌다. 이때 내가 가져갔던 노트에는 정말로 "내리고 싶다. 내리고 싶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무슨 짓을 하는 거야"라는 글이 빼곡히 적혀있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매드맥스도 한편 보고 레고무비도 한편 보며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왜 매드맥스와 레고무비가 나에게 안정을 줬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트렌스퍼 공항인 아부다비에 도착했을 땐 다시 내 가슴속에 여행을 떠난다는 설렘만이 가득 찼다. 이미 멀리 떠나와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는 무의식이 작용해서였을까.


아부다비 공항에서 영국으로 가는 비행편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10대로 보이는 영국인 소녀들이 진한 영국 악센트로 이런 말 저런 말하며 떠든다. 다시 한번 느꼈다. 내가 정말 떠나오긴 떠나왔구나.




그렇게 시작된 약 3주간의 유럽여행은 내게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게 했다. 유럽이나 북미나 다 똑같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무지가 부끄럽게 느껴질 만큼.


내가 참 보물처럼 읽은 책 중에 '총, 균, 쇠'라는 작품이 있다. 대학에서 국제학을 전공하며 가끔 친구들과 다분히 문화 상대주의적인 주제일지 모르지만 '왜 동양문명은 지금의 서양문명처럼 꽃 피우지 못했는가'에 대해 열띈 토론을 한적도 있다. '빛은 동방에서'라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현대 사회를 주름잡고 있는 것은 여전히 서구 문명이니까. 그래서 나는 관광지를 찾아다니기보다는 유럽 사람들을 관찰하고 될 수 있는 한 그들과 대화하고 역사적 장소나 내 시선을 끄는 장소에 오도카니 서있는 편을 주로 택했다. 그러다 보니 생각도 시각도 조금씩 바뀌었다.


아래의 내용은 브런치북에 따로 '글'이라는 공간을 할애해 실리지는 않을 내용이다. 다만 나의 짧은 단상들인데 글로 적기에는 짧지만 버리기는 아까워 책의 서론에 적어본다. 나의 변화에 대한 글들이기도 하고.




우리의 숙제 한국 홍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대영박물관이 '훔쳐간 보물'들로 가득한 박물관이라고 비하하기도 하지만 이 훔쳐간 보물들을 보기 위해 관람객들은 줄을 선다. 영국인들도 양심은 있는지 무료로 개방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훔쳐간 유물이지만 유지비는 어마 무시하다. 그런데도 무료개방이라는 것을 택한 점은 대단하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한국관도 있다. 위치가 아주 좋은데, 내용물이 매우 초라하다. 당연히 관람객들은 한국인들이 주를 이루고, '와 정말 초라하다'는 한국어를 들을 수 있다. 외국인들도 호기심에 들어왔다가 금방 나간다. 일본관도 있다. 위치는 아주 나쁜데, 내용물은 정말 가득하다. 외국인들이 지대한 관심을 쏟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관이 생긴 것도 그나마 한국 모 기업의 후원 덕이며, 일본관은 일본에서 문화재를 직접 가져다주는 수고까지 해가며 꾸몄단다. 어찌 보면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다. 뭐하러 우리 문화재를 남의 나라에 가져다주나. 그러나 하루 수십만의 관람객이 찾는 대영박물관에 우리 유물을 가져다 두면 그들이 한국을 KPOP의 나라만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나라로 인식하는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일본과 중국과 역사왜곡으로 앞으로 싸워나가는데 이들이 목격자가 되어줄 것이다. 나의 생각이 이렇게 바뀌었다.


전쟁과 여성 기념비

런던에는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여성들을 기리는 비가 있다. 직접 전투에서 싸운 여성들도 있지만 전화기 교환원, 소방대원, 군수물자원 등으로 후방에서 전투를 여성들이 있다. 한국도 한국전쟁 때 여군에 자원입대하여 비슷한 역할을 한 분들이 계시다. 우리도 이분들을 기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인을 기리는 것, 개인이 국가에 한 희생을 기리는 것, 이건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다. 진보정부로 유명한 캐나다에서도 매년 11월 전 국민이 가슴에 꽃을 달고 참전용사들을 기린다.


Free HongKong

독일과 영국에서 나는 계속 Free HongKong 운동과 마주했다. 비록 자국을 떠나 있음에도 자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 남의 나라의 일 같지 않았다. 한국도 일제에 강점을 당했을 때 해외 동포들도 그 자리에서 한국의 자유를 위해 나섰다. 아픈 역사들이 되풀이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또 이런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괜히 가슴이 아렸다.


독일인들의 철저한 반성

독일인들은 나치 행위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불쌍해 보일 정도로. 요즘 독일의 젊은이 세대들은 사실 나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세대들이다. 그럼에도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이 저지른 만행을 배우는데만 1년 이상을 할애한다고 한다. 일본의 모르쇠가 떠올라 슬퍼졌다.

나치의 만행 때문에 수많은 독일인들도 피해를 입었다. 그중 하나가 강간 피해를 입은 독일 여성들이다. 나치의 패망 이후 많은 독일 여성들이 연합군에 의해, 소련군에 의해 분풀이를 당했다. 이때 사생아들도 많이 태어났고 내 친구도 그 자손 중 하나다. 그러나 어느 하나 이때의 피해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독일 여성은 없다. 못 내는 거지.

국제학 박사과정의 굉장히 시니컬한 내 친구(캐네디언) 하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독일 말이야, 지금 난민들한테 수많은 여자들이 추행당하고 난민 범죄 때문에 골치 아픈데도 왜 계속 받아들이는 줄 알아? 걔네가 난민 수용 안 하겠다는 순간 '나치'소리 들을게 자명하거든. 걔넨 그게 평생 주홍글씨야. 불쌍한 새끼들. 반면에 벨기에를 봐. 걔네는 아프리카 식민 지배하는 동안 그 사람들 팔 자르고 다리 자르고 엄청 나쁜 짓 많이 했어. 그런데도 지금 누가 벨기에를 욕해? 그냥 초콜릿 먹고 하하 호호하지."

나치를 옹호하는 글은 절대 아니다. 다만 함께 생각할 거리를 하나 던져보는 것이다.


유럽, 이 망할 놈들의 문명은 정말 경이롭고 아름답고 정교하다.

정말 아무 기대 없이 갔던 마드리드에서 나는 입이 떡 벌어지는 경험을 하고 왔다. 마드리드의 에스꼬리아. 그래, 석회암이 많은 대륙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어쩜 이렇게 정교한 예술을 행해놨는지. 어쩜 이렇게 정교한 건물들을 세워놨는지. 1800년대에 이미 사물함의 개념도 생각해내서 도서관에서 공부도 했다.

물론, 이 문명 아래에는 식민지배당한 원주민들의 고혈이 묻어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했다. 그래도 스페인애들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원주민들과 동화되어 '히스패닉'이라는 인종까지 만들어버렸으니 이걸 잘했다고 해야 해 못했다고 해야 해. 그리고 이런 관광지를 찾아 전율을 느끼는 나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해야 해 없다고 해야 해.


광활함, 가진 자들의 여유

유로트레인을 타고 방랑하는 동안 유럽에서 내가 알던 단어 '광활하다'는 단어가 꼭 들어맞겠다는 평야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리고 이 평야들에는 태양광 시설이나 풍력발전 시설들이 자리한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독일과 스페인은 이미 탈원전을 시작했고 석유에너지 사용 역시 0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의 한 컨퍼런스에서 들었던 내용인데 그때만 해도 나는 속으로 '에이 그게 어떻게 가능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와서 보니 가능하겠더라. 땅이 이렇게 넓으니 마음껏 태양광 발전도 풍력 발전도 가능하겠지. 게다가 모기도 별로 없어서 여름밤 창문 열어놓고 에어컨 사용도 거의 안 하니까. 우리가 문제다. 여름은 더워지고 모기는 극성이니 에어컨 없인 살 수 없는데 국토의 70%가 산이라 태양광도 풍력발전도 마음대로 못하는걸. 매년 오는 태풍도 무시 못하고. 석유는 없어도 유럽은 정말 가진 자의 여유가 있는 땅이다.


'죽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던 만큼, 암스테르담에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털어내고 왔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털어내고 왔다. 무질서 속 질서가 공존하는 암스테르담을 보며 나도 헉헉대며 질서만 따라가겠노라고 자책하며 살 필요가 없겠다고 맘을 먹었다. 그나저나 저 사진 속 건물은 뭐냐구? 놀랍게도 부동산이다. 부동산조차 요상해서 찍어봤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뭘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해보다가 기자만이 아니라 다른 글도 쓸 수 있겠고, 그동안 아는 사람들 통해서 알음알음 해왔던 통번역도 경력 정리를 잘하면 전문적인 직업으로 도전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그동안은 용기가 없었을 뿐. 북미에 살 때야 그랬다 쳐도 유럽 어디를 가든 내 영어실력을 칭찬해주고 나를 미국인이라 오해해주는 유럽인들과의 만남도 자신감을 얻는데 한몫해주었다.

그리고 하나 더, 나도 회사의 결정권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부른다고 가서 소처럼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일중독인 나의 특성상 진짜 내가 쏟아부어 일할 가치가 있는 회사를 내가 찾아가야 한다는 것.


얘는 호스텔 고양이인데 시크하게 다가와서 갑자기 곁을 주었다. 우리 초면인데. 그런데 셀카를 찍느라고 내가 고개를 기울였다가 내 젖은 머리카락이 닿자 금방 달아나버렸다. 미안.


책을 내자

합성같다는 평을 듣는 사진이지만 놀랍게도 합성도 아니고 책 표지를 염두에 두고 찍은 사진도 아니다. 송도에 일이 있어 사진가 오빠와 방문했던 날, 그가 폰카로 기적을 만들었다.

인생에서 책은 꼭 한 권 내보고 싶었다. 늘 자신감 부족이던 내게 이번 여행 경험이 좋은 책의 소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버 블로그에 여행기를 연재하다가 친구의 추천으로 브런치 작가를 신청했고,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 브런치 작가 소리를 듣게 됐다. 아직도 부끄럽다. 내 브런치 글을 읽어주는 분들이 계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댓글에 대댓글을 달지 않는 건, 내가 거만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그렇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다. 특히 면대면이 아닌 인터넷 소통은 더 어렵다. 그러니까 이해 좀 부탁드려요. 죄송해요...




유럽 여행을 다녀오고, 나는 아직도 백수다. 영화처럼 장면 전환이 확 되며 인생이 바뀌지도 않았고 다녀온 뒤에도 나쁜 일들은 계속 있었다. 그러나 다녀오기 전과 후의 나는 분명 다르다. 많은 부분이 치유됐고 나는 더 나아졌다. 그때 비행기에서 악을 쓰고 내렸더라면(물론 그럴 용기도 없는 사람이지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여느라는 사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치유를 위해 떠났던 여행에서 치유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안고 돌아왔다. 고마웠던 여행이었다. 텅 빈 통장은 물론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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