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필명이 여느 인데는 '보통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사실 내 성(姓, 姓氏, Last name)이 여씨(呂氏)라는데서도 기인한다. (본격 성밍아웃)
희귀 성씨라 어릴 적엔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김이박이 점령한 한국에서 이만하면 선방한 성씨라 생각해 만족한다. 오죽하면 한국인 좀 만나본 외국인들도 "야, 내가 Kim, Lee, Park은 많이 봤어도 Yeo는 처음 본다"라고 했을까. 물론 영어권 화자들에겐 여와 요의 발음 구분이 잘 안돼 해외 생활 중에는 Hey Yo, What's up Yo라고도 장난스럽게 많이 불렸다. 그래서 영어 필명은 Yonu다.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당시 만화 '궁(宮)'이 유행했었다. 후에는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지금은 삼십 줄에 접어든 배우 주지훈이 이 드라마로 데뷔했다면 10대 친구들은 믿을까?
그런데 집 궁, 궁궐 궁의 한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눈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지붕(宀) 밑의 여(呂) 자. 내 성이 아닌가.
게다가 '진한 이후부터 왕의 거처라는 뜻으로 굳어졌다'는 기록에 초딩 여느의 가슴은 뛰었다. 진한이라면 그 유명한 진시황제의 시절. 진시황제라면 아버지가 여불위(呂不韋) 일수도 있어 나랑 일족일지도 모른다는 그 황제.
잠깐 역사의 야화를 설명하자면 진시황제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지금도 역사적 가십거리다. 그의 어머니가 초희 임은 확실한데 초희가 여불위와도 관계를 했고 영정초와도 관계를 했기 때문에 진시황이 공식적으로는 영정초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정확한 아버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왔다 갔다 한다. 사기에는 아예 초희가 자기 아들을 임신한 것을 알고 있던 여불위가 일부러 영정초에게 초희를 보냈고, 그 아들이 자라 진시황이 됐다고 기록되어있다. 덕분에 여불위는 본래도 권력자였지만 어린 진시황이 즉위했을 때는 섭정을 맡아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고 후에는 재상의 자리에서 왕 둘째 가는 권력을 누렸다. 물론 여불위나 진시황이나 과도한 욕심은 비참한 말로로 그들을 이끌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당연히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 믿고 있었기에 궁(宮) 자를 들여다보다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당장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아빠, 궁궐 궁(宮) 자에 보면 지붕(宀) 밑에 여(呂) 자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여(呂)씨가 사는 집이 궁궐(宮)이란 뜻이에요!
초등학생 여느가 세웠던 제법 말 되는 가설. 그러나 어린 나 자신에겐 미안하지만 이 가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일단 呂자는 많은 뜻이 있지만 등뼈나 척추를 의미하는 뜻이 있다.
이 등뼈와 척추가 지붕에 들어가서 사니까 궁궐이 된 것이다. 아마 평범한 사람(人)이 들어가서 사는 것보단 등뼈와 척추가 산다고 하는 게 신분제 사회상 더 폼 났겠지. 예끼, 무엄한지고.
둘,
여(呂) 자가 들어가서 궁(宮)이라면 진시황이 여불위를 가만뒀을 리 없다.
진시황의 공식성은 영(嬴)이다. 진시황의 어머니이자 여성 초희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진시황 재위 중에도 여러 번 권력형 성스캔들을 일으켰다. 열 받은 진시황은 엄마의 남자 친구들을 거세시키는 것으로 화답했고. 이런 진시황이 명색이 황제인데 생전에 '뻐꾸기 자손'이란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당장 여불위를 쳐 죽였겠지. 백번 양보해 친아버지에 대한 예의로 그를 살려두고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呂) 자가 들어가서 궁(宮)이라면 당장 자기 성 영(嬴) 자를 넣어 한자를 다시 만들었을 것이다. 분서갱유까지 일으켰던 인물인데 이 정도 못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