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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Sep 10. 2020

네이비씰, 의사, 그리고 곧 우주로 갈 지구인, 조니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 사람은 문자 그대로 우리를 죽였다가, 다시 살릴 수 있다. 그것도 우주에서!

 미 공화당 의원 테드 크루즈가 한국계 미국인 조니 킴을 두고 한 찬사이다.


 올해로 서른 다섯 밖에 되지 않는 조니 킴은 총 세 가지 직업을 가졌다. 하나는 미국 최정예 부대 네이비 씰 대원, 두 번째는 하버드 출신의 외과 의사, 세 번째는 나사 소속의 우주인. 이쯤 되니 테드 크루즈의 찬사가 이해가 된다. 미국인들도 조니 킴의 커리어에 놀라서 밈Meme까지 만들어진 지경이다.


좌- 조니 킴과 포르노 배우 조니 신을 매칭 한 밈 / 우- 아들아, 네이비씰도 했고 우주인도 했고 의사도 했는데 변호사는 언제 될 거니?


 조니 킴 Jonathan Kim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저런 위치에 오를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의 조니 킴


 조니 킴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한인 부부의 첫아들로 미국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도 겨우 마쳤을 정도로 가난했던 그의 아버지는 리커스토어 Liqour Store(북미에는 술을 따로 판매하는 상점이 존재한다)를 운영했고 어머니는 보조 교사로 근무했다. 비교적 중산층의 삶을 살았지만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어머니를 학대했고 조니 킴과 동생 역시 아버지의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한다.


 내성적인 성격이던 조니 킴은 고등학교에서 공부도 잘했고 수영이나 워터폴로와 같은 운동에서도 뛰어났지만 친구 사귀는 법은 잘 몰라서 점심시간이면 홀로 학교 로비를 서성이곤 했다. 그의 회상에 따르면 가장 싫어했던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다고.


 계속되는 아버지의 가정 폭력과 학교에서도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싫었던 16세의 조니 킴은 스스로 모험을 하기로 결심한다. 해군에 입대하여 가족과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 어머니는 반대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군인이 되고 싶으면 대학을 졸업 후에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며 졸업 후 군인이 될 수 있는 대학교들을 손수 찾아 조니 킴에게 권유했다. 어머니도 대졸자와 비대졸자의 대우가 군내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니 킴은 '가장 아래에서부터 시작하고 싶다'라고 말하며 어머니를 다독였다.


 조니 킴이 18세가 되어 입대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집안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머니가 조니 킴을 붙잡고 공포에 질린 얼굴로 "아버지가 총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뒤이어 아버지가 나타났고 어머니는 도망쳤다.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는 "미안하다" 한 마디를 남기고 조니 킴의 얼굴에 최루가스를 뿌린 뒤 천장에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총소리에 곧 경찰이 출동했다. 그리고 그 날, 총을 든 아버지는 경찰에게 사살당했다.


 조니 킴이 해군에 입대하던 날, 그를 차로 태워다 준 어머니는 울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가족과 일하자..." 조니 킴은 그 짧은 순간 잠시 흔들렸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조니 킴은 돌아가지 않았다. 여기서 조니 킴을 매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만약 돌아섰다면 수많은 전장과 병동에서 생명을 구하고 이제는 어린아이들의 꿈을 위해 우주로 향하는 조니 킴은 사라졌을 것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인 자신을 미워하며 동네에서 술을 파는 아저씨 조니 킴만 남았을 것이다.


네이비 씰 시절의 조니 킴


 네이비 씰 대원으로서 조니 킴은 2006년 이라크 전쟁 포함해 100번 이상의 해외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의무병으로 수많은 동료들의 목숨을 살렸다. 그러나 의무병으로써 그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얼굴에 총을 맞아 신음하는 전우에게 정맥주사를 놓아주어 그들을 진정시키고 전문 의료진의 도움이 있을 때까지 시간을 벌 수는 있었지만 완전한 치료는 하지 못했다. 그는 때때로 무력감을 느꼈다. 한 번은 치료 방법을 두고 PA(Physician's Asistance 우리나라로 치면 외과의사의 보조의 쯤 되겠다)와 충돌한 적도 있다. 그와 절친한 친구 잡(Job)이 얼굴에 총을 맞았는데 PA가 한사코 잡의 코에 튜브 삽관을 주장한 것이다. 조니 킴은 반대했다. 지금 튜브를 삽관하면 잡이 엄청난 고통을 느낄 것이고 만에 하나 잘못되면 아예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PA는 결국 잡의 코에 튜브를 삽관했다. 잡은 2년 뒤에 재건수술을 받다가 죽었다. 조니는 이것을 자신의 '가장 큰 실수'라고 술회한다. 그때 PA를 끝끝내 말리지 못해 친구를 떠나보낸 것이 본인 인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고. 그래서 조니 킴은 다시 바닥부터 시작한다.


 의사가 되려면 메디컬스쿨(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야 하고 그러려면 대학부터 들어가야 했다. 조니 킴은 미국으로 돌아와 샌디에고 대학교 수학과에 진학한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단 공부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군에서 군인들과 보냈던 그에게 대학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그리고 전장의 참혹한 기억들은 그에게 PTSD를 유발했다. 이 시기 그가 가장 많이 의지할 수 있었던 곳은 그의 가족이었다. 이때 그는 결혼해 첫아들도 갖게 됐다. 이 시기에 대해 그가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 매우 인상적이다.


'강함'이라는 건 단순히 신체적으로 강하다던가 혹은 고통이나 트라우마를 참아내는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상황에 적응하고,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남에게 드러낼 수 있는 것도 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제겐 정말 어려운 일이었죠. 네이비 씰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것이거든요.


 조니 킴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하버드 메디컬 스쿨에 무리 없이 안착한다.


레지던트 시절의 조니 킴


 내과 레지던트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중 조니 킴은 새로운 도전을 또 시작한다. 나사의 우주인 선발 프로그램에 지원한 것. 만 이천 명이 넘는 지원자 가운데 조니 킴은 스물 두 명의 최종 선발자 중 한 명으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다. 그가 우주인이 된 이유는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어서"라고 한다.


우주인 조니 킴


 그는 언젠가 기자에게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대답했다.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도전했다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공부도 쉽지 않았고, 의사가 되는 것도, 우주인이 되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요. 늘 집에 돌아오지 못한(전사한) 친구들을 생각했어요. 정말 좋은 친구들이었고 행복한 삶을 살았어야 마땅한 친구들이었는데도요. 이 모든 것은 그들을 위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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