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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Sep 11. 2020

노예해방과 북부의 백인약자들

 

 노예 해방을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세운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부를 탈출해 북부로 넘어오는 흑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전부터 상대적으로 노예제가 덜 한 혹은 없는 북부로 탈출한 흑인 인구가 북부에 존재했다. 이를 대환영한것은 북부의 자본가 백인 계급이었다. 흑인 노동자들은 백인 노동자들보다 싸게 부릴수 있기 때문이었다.


1860년대 엘리스 아일랜드를 통해 미국으로 입국하려는 이민자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해는 1860년으로 아일랜드계 백인들과 독일계 백인들의 이민이 한창이던 때였다. 당시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가혹한 식민통치와 감자 대기근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죽음의 땅이었다. 독일은 프러시아가 점점 독일 지방 국가들의 영토를 집어삼키며 독재 정치를 펴가고 있었다. 때문에 아일랜드계 백인(이제부터 아이리쉬라 부르겠다)들과 독일계 백인들은 자유를 찾아서 혹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미국으로 밀려왔다.


 독일계 백인들은 종교도 미국 백인들과 통했고 맥주 기술과 같이 현지에서 자리를 잡을만한 기반 기술이 있었다. 이에 비해 아이리쉬들의 상황은 참혹했다. 영국의 수탈에 시달려온 탓에 그들이 기술을 가졌을리 만무했다. 아이리쉬 위스키가 있었지만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미국 청교도들에게 위스키는 악마의 술과 같았다. 종교도 맞지 않았다. 곧 죽어도 카톨릭을 고수하는 아이리쉬들이 청교도 백인들의 눈에 곱게 보일리 없었다. 종교 개혁으로 인해 수 많은 청교도를 학살한 이들이 카톨릭이었고,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잉글랜드 성공회의 종교 박해를 피해 세워진 나라였기 때문이다. 아이리쉬 카톨릭들은 아일랜드에서는 잉글랜드 성공회에게 박해받고, 미국에서는 미국 청교도들에게 무시당했다.


 아이리쉬들에게 친절한 백인들도 있었다. 민주당 백인 정치인들은 아이리쉬들에게 빨리빨리 미국인의 권리를 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친절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선거권 줘서 자기들 찍게 하기. 링컨의 공화당이라고 다를바는 없었다. 갓 이민온 아이리쉬 젊은이들을 숙식제공에 월급까지 준다는 미명하에 북부군 옷을 입혀 전쟁터로 내몰았다.


 결국 아이리쉬들이 얻을 수 있는 직업이라곤 부둣가 막노동과 같은 육체 노동 뿐이었다. 그런데 백인 노동자보다 낮은 임금으로 일할 있는 흑인 노동자들의 출현에 아이리쉬들은 긴장하기 시작한다. 같은 파이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1863년이 되자 아이리쉬들은 더욱 난처해졌다. 링컨이 '징병제'를 공표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표 작전에 속아 빵과 시민권을 받은 아이리쉬들은 꼼짝없이 전쟁터로 내몰리게 되었다. 흑인들은 자유인의 지위만 인정받았을 뿐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징병대상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300불을 내면 징병을 면제받을수 있게 해준다는 법까지 통과되자 결국 뉴욕에서 폭동이 터진다. 바로 4일간 지속된 '뉴욕 징병 폭동'이다. 아이리쉬들이 주축이었지만 가난한 백인들도 함께 참여했다.


 링컨의 흑인 노예해방은 역사에 길이 남을 아름답고 의로운 결단이었지만 한켠에는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 채 버려진 백인 약자들이 있었다. 폭동은 어쩌면 그들에게 유일한 분노 표출 수단이었을지 모른다.


(뉴욕 징병 폭동은 총 120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 중 흑인 사망자는 12명이다. 단순히 흑인만을 향한 인종 범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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