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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Sep 12. 2020

조선인이 세우고 조선인이 무너뜨린 '독립협회'


 1890년대 조선은 바람앞의 촛불과 같았다.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청나라)은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위해 야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조선인들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198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세워진 것이다. 같은 해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이 독립협회의 창설자였다. 이상재와 이승만이 설립을 주도했고 남궁억과 안창호 같은 지식인 세력, 안경수, 박정양 같은 정부 고위관료들도 참여했다. 이완용도 독립협회의 회원이었다.

 

독립협회 회원들의 사진. 여성 회원들의 모습도 보인다.

 독립협회는 '만민평등 사상'을 위시로 여성과 백정, 노비들까지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내부에서 약간의 잡음이 있었으나 독립협회 지도부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독립협회의 만민평등 사상은 '만민공동회' 활동으로 이어졌다. 만민공동회는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토론하고, 교육도 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이자 교육의 장이었다.


 또 협회도보를 통해 조선인들의 계몽에 앞섰다. 이와 같은 독립협회의 노력이 빛을 발해 실제로 양반들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노비들을 모두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사례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만민공동회와 태극기가 휘날리는 모습


독립협회가 목표한 7가지 개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국민에게 참정권 부여


2. 서구 사상과 문물의 수용


3.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따르던 악습을 버리고(당시 조선의 지위는 청나라의 종속국이었다.)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또는 영세 중립국임을 대내외에 천명할 것


4, 개인의 생존권과 재산의 자유권 보장


5.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 보장


6. 국민의 평등권 보장


7. 서구식 의회 설치


 특히 2번 서구 사상과 문물의 수용을 위해 무분별하게 조선의 금광채굴권을 일본이나 서구에 팔아넘기기 보다는 조선 청년들을 해외로 유학시켜 기술을 배워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반대한 이완용이 협회에서 제명을 당한다.


 또 3번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따르던 악습을 버리고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또는 영세 중립국임을 대내외에 천명하기 위해 청나라 사신들을 맞이할때 쓰던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의미하는 독립문을 세운다. 당시 청나라가 조선을 대하는 태도는 청나라 군인 출신이자 조선 총독이었던 위안스카이(원세개)의 글에서 알 수 있다.


러시아가 조선의 나약함을 이용하여 속이고 있으니 조선을 보호할 수 있는 나라란 오직 '상국(上國, 중국)'뿐이다. 조선은 못 쓰게 된 배와 같고 병이 골수에 들었으니 위안스카이는 배 만드는 장인의 임무로 조선을 위해 탄식하며 훌륭한 의사로서 반드시 좋은 약을 보내 줄 것이다.


 조선은 중국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 중국을 버리고 다른 데로 향한다면 어린아이가 부모에게서 떨어져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과 같다.

 

서울시 서대문구에 위치한 독립문.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며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며 지어진 것이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관 살이를 하던 고종을 다시 궁궐로 돌아오도록 도운 1등 공신 역할을 한 것도 바로 독립협회였다. 그러나 고종은 고종대로 독립협회가 마음에 안들었다. 고종 곁의 가신들도 독립협회가 싫었다. '황제 국가'를 원하는 고종에게 독립협회의 국민의 참정권, 평등권, 언론의 자유권 주장은 너무 진보적이었다. 고종은 자신이 폐위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왕족 대접을 받지 못하고 '개똥이'라 불리던 과거가 있던 그의 컴플렉스와 옹고집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이러던 차에 1898년 조선의 고위 관료들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독립협회를 무고하였고 고종은 협회 간부들의 체포를 명령한다.


 이에 태생부터 독립협회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황국협회가 고종의 명을 받들어 독립협회를 습격했다. 천여명의 회원들이 부상을 당했고 남궁억을 포함해 이승만, 이상재 등 협회 간부 17명이 검거되어 압송되었다. 회원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들은 독립협회를 무고한 조정 대신들의 사택을 습격하며 울분을 토했다. 조정 대신들은 이를 빌미로 아예 독립협회의 해산을 고종에게 건의했고 고종은 독립협회 해산을 황제의 칙령으로 명한다. 그럼에도 독립협회 회원들이 자진해산하지 않자 고종은 군대까지 동원해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 시켜버린다.


 조선인이 조선 독립을 위해 만든 단체를 조선인이 파괴한 것이다.


검거된 독립협회 간부들의 모습

 

 감옥에 갇힌 독립협회 간부 17인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가혹한 형에 처해졌다. 특히 이승만은 태형 100대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간부들 중 가장 혹독하게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감중에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집필했으며 수감된 동지들과 함께 옥중학교와 서적실을 개설해 운영하며 수감자들의 계몽에도 앞장섰다. 고종은 러일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을 특별사면했고 밀사로 미국에 파견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도록 했다.


 이승만은 묵묵히 고종의 명을 받들었으나 대한민국의 독립 후 그가 대통령이 된 뒤 고종의 후손들을 박대했던 것을 보면 당시 쌓였던 응어리가 분명 가슴속에 남았던듯 하다. 솔직히 안남으면 인간이 아니라 신이겠지. 그가 고종의 명을 따랐던 건 오직 독립국에 대한 염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모든 독립협회 출신들이 이승만과 같았던 것은 아니다. 몇몇은 억울함과 충격에 아예 친일파로 변모했다.

 문과 급제 출신으로 독립협회 회원이자 만민공동회 회장까지 역임했던 윤시병은 독립협회의 강제 해산에 충격을 받아 야인 생활을 하다가 일진회를 조직해 조선과 일본의 합병에 앞장섰다.

 윤시병의 형 윤길병 역시 동생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을 했었으나 결국 일진회의 부회장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의 관료 출신인 유학주는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고, 후에 일진회 회원이 되었다.

 하인 출신이던 염중모는 함께 투옥된 유학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결국 일진회 회원이 되었다.

 무과 급제 출신이던 유맹은 검거 후 곤장 40대형에 처해졌다. 결국 러일전쟁때 일본의 편에 서서 일본을 도왔다.

 이상재는 태형 40대를 맞고 옥고를 치르고 난 뒤 친일행보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3.1운동 참여는 거부했다. 기독교로 귀의해 한일합병 이후 선교사들과 조선 청년 교육 및 계몽 활동에 열중했다.  




 물론 독립협회가 지나친 친러 성향을 보였다거나, 친일 성향을 보였다며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독립협회가 그 혼란한 시기에 열강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독립을 꿈꾼 것이지 나라를 그들에게 바치고자 했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독립협회를 위와 같은 시각으로 비판한다면 아관파천을 한 고종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심지어 그는 왕이었다.


 아래는 참고사항으로 한일병합조약 전문을 붙인다. (국사편찬위 번역본)


    한국 황제 폐하(皇帝陛下) 및 일본국 황제 폐하(皇帝陛下)는 양국간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 만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각각 그 전권위원(全權委員)에 임명한다. 위의 전권위원은 회동하여 협의하여 다음의 여러 조항을 협정한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예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인(韓人)으로서 특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고 또 은금(恩金)을 준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前記)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施政)을 전적으로 담임하여 해지(該地)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있고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경유한 것이니 반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를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記名)하고 조인(調印)한다.

융희(隆熙) 4년 8월 22일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명치(明治) 43년 8월 22일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3조, 4조를 보면 조선 황실은 끝까지 자기들 이익 먼저 챙겼다. 자기들은 아무 이유없이 지위, 존칭, 위엄, 명예, 대우, 돈까지 일본 황실에 요구했다. 그에 반해 5조, 6조, 7조를 보면 일본에 잘 협력하는 조선인만 좀 잘챙겨달란다.

 순종이 붕어하며 '한일병합조약은 무효'라고 했다지만 그의 후손들은 이왕가(李王家)로 황실 다음가는 대우를 받았으며 연간 150만 엔씩 천황폐하의 지원받으며 잘먹고 잘살았다. 물론 영친왕과 같은 인물이 있긴 했지만. 그에 반해 아예 광복 후에 일본인으로 귀화한 왕족도 있다. 모모야마 겐이치(고종의 5남 의친왕의 아들 이건) https://brunch.co.kr/@yonu/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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