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느Yonu May 31. 2021

영화 쓰리 빌보드

혐오와 자비

18년도 골든 글로브, 아카데미, 바프타BAFTA 대충 해외 영화제를 휩쓸었다고 보면 되는 영화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미주리 시골의 엄마가 외동딸을 강간 살인으로 잃으며 영화가 시작된다.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하고 엄마는 마을에 왜 경찰은 아직까지 범인을 잡지 못하냐는 광고판 세 개(three billboards)를 세운다.


영화 속 경찰들은 노력은 하는데 단서가 없을 뿐 또 하나의 피해자로 그려진다. 대한민국의 버*썬 사건처럼 어디 석연찮은 구석이 있어 수사를 망설이는 그런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듯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엄마를 욕하자니 이대로 딸의 죽음이 묻힐 것이란 엄마의 절규를 외면하기 어렵다.

또 자극적이지 않으면 대중은 쉽게 잊는다는 것을 엄마도 알고 있다.  


마을 사람들도 패가 갈린다. 이제 그만좀 해라와 그래도 엄마가 불쌍하다.

다수결로 따지자면 피해자는 엄마와 딸 둘 뿐이고 나머지 99,998명쯤되는 마을 사람들은 사건과 관계가 없다.

하지만 다수결 민주주의는 소수의견을 깡그리 무시한다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무시할 수 없는 엄마의 외침


"지금 잡지 못하면 또 그러고 다닐것 아니냐"



결국 분노는 서로를 향해 잘못 표출되는 지경에 이른다. 경찰관은 광고를 게재한 애먼 광고사 직원을 창밖으로 집어던지고 엄마는 경찰서에 불을 질러 경찰관이 크게 화상을 입는다.


이외에도 연소자 관람불가답게 영화는 내내 폭력과... 의외의 코믹으로 얼룩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막장 영화가 아니라 명작인 이유는 인간은 서로 아무리 미워할지라도 서로를 위한 한 움큼의 자비의 영역은 남겨둔다는 점을 짚어내서가 아닌가 싶다.


화상을 입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찰에게 물 한잔을 건네며 그를 돕는 자비를 베푸는, 며칠 전 창밖으로 던져짐을 당했던 광고사 직원의 모습이나


피해 여성의 엄마를 그렇게나 증오해놓곤 불량배에게 두들겨 맞아가며 홀로 수사를 진행하는 다른 보안관의 모습을 보며 조금씩 훔쳐볼 수 있었다.



일 인은 만 인을 위해, 만 인은 일 인을 위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의 억울한 일이 만인의 일로 해결되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화이트 타이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