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실 사우나

2024 교토윤음

by 윤 음배


"열쇠 잃어버리지 말기. 핸드폰 떨어트리지 말기. 여권 지갑 핸드폰."

숙소 밖을 나가기 전 세 번 복창했다. 아직도 열쇠로 문단속을 하는 일본은 과연 성인 ADHD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일까?


숙소 바깥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다. 중간중간 멋들어지게 꺾여가며 자란 동백나무에 붉은 꽃이 피고 있었다. 작고 동그란 봉오리가 빼곡하게 달려있다. 한겨울의 만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주민처럼 느긋하게 동네를 산책하고 싶었는데 허기가 졌다. 연 데도 얼마 없을 텐데 어디 맥도널드나 가야 하나 싶었다. 이런 시기엔 구글맵에 버젓이 영업 중이라 적혀있어도 막상 가면 십중팔구 문이 닫혀있다. 무릇 인간이라면 모두 괜한 헛걸음은 하기 싫어하지 않나? 평소의 나라면 그랬겠지만 오늘의 나는 마음가짐이 다른걸. 헛걸음 한대도 좋으니 좀 움직이자 마음먹었다. 내일은 연시라 진짜로 다 닫혀있을 테니까.


걸어서 12분 거리의 소바집에 갔다. 맛집인가 봐. 줄이 길다. 맨 뒤에 서서 앞서 줄 서 있는 일본인들의 대화 소리를 엿들었다. 알아듣기 힘들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서양인 어자와 일본인 남자 커플이 연신 쪽쪽 거리는 통에 내 귀가 간지러 이어폰을 찾아 꼈다. 가로로 긴 가게 벽면에 붙어 줄 서있는 동안 위의 환기구 쪽에서 달짝지근한 면수 냄새가 주욱 풍겼다. 체면 생각하지 않고 킁킁거리려다 정신을 차렸다. 줄이 조금씩 줄고 있었다. 면수 향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내 뒤에도 어느덧 긴 줄이 늘어섰다. 별 거 아닌데 이럴 땐 참 미묘한 승리감 같은 게 든다. 나만 그런가.


큰 기대 없이 즉흥적으로 방문한 소바집이 정말 너무 맛있었다. 맛도 분위기도 별 다섯 개. 가게 이름은 소노바. 커다란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고 각 테이블마다 8명씩 않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회전율은 느린 편. 연말 특별 메뉴로 국물이 적은 소바를 추천해 주셨는데 오늘따라 꽤 쌀쌀한 통에 따듯한 국물이 있는 오리고기 + 구운 대파 소바를 시켜 먹었다. 얇게 썰린 오리고기 세 점과, 군데군데 검게 그슬린 대파들이 국물 위에 동동 떠 있었다. 맑지만 진한 갈색을 띤 국물 간이 꽤 짭짤했다. 소금 한 꼬집만 더 넣었다면 '너무 짜!' 하고 인상을 썼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딱 그 경계선에서 멈춘 맛있는 짭짤함이었다. (라고 요알못이 평했다.) 원래 시그니처 메뉴로는 '모리 소바'라고 차가운 육수의 것이 그러했던 것 같은데. 그거 먹으러 여름에도 또 와 보고 싶었다. 아니 이번 여행 중에 한 번 더 들릴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맛있었다. 중국인 관광객 한 팀 빼곤 다 교토 현지인 같던데. 구글맵에 리뷰를 쓸까 말까. 심술 섞인 고민을 했다. 난 역시 좀 이기적이야.


부른 배를 통통 두들기며 동네 한 바퀴 누비는 동안 쨍쩅한 햇볕 아래로 여우비가 내렸다. 십 년 전엔 앞머리 고데기 풀릴까 봐 아주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이젠 나이도 먹었고 그럴 앞머리도 없으며 한 달 전에 한 파마가 아직 짱짱했다. 가만히 고갤 들어 분사력 나쁜 미스트를 맞듯 비를 맞았다. 저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드는 게 보였다. 이거 좀 더 맞고 방에 들어가야지. 생각해 보니 아침에 환기한다고 발코니 창문을 열어두고 그냥 나온 것 같다. 아, 혹시 이거 시은이 너였니. 안 하던 짓을 하는데 왜인지 기분이 좋더라.



밤이 됐다. 드디어 31일 오늘의 메인이벤트다. 점찍어둔 동네 센토(목욕탕)로 향했다. 빨간색 네온사인으로 サウナ(사우나), 초록색 네온사인으로 梅湯(우메유)라고 세로 벽에 큼지막히 달려 있었다. 구글맵 리뷰 1,475개에 별 4.4개! 온몸이 찌릿찌릿한 전기탕도 있됐다. 아직 탕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볼기 빨갛게 상기된 것 같았다. 내부는 아주 작았다. (좁단 표현은 뭔가 좀 그렇다.) 타월은 준비성 좋게 미리 챙겨 왔으니 입장료 500엔만 내고 신발 보관함에 신발을 넣은 뒤 조심스레 입장했다. 왼쪽이 여탕, 오른쪽이 남탕. 북적북적댈 줄 알았더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 반가름 난 가림천을 두 번 지나니 바로 발가벗은 여자들이 보였다. 살짝 당황해 버렸다. 굉장히⋯⋯ 무방비한데? 나 그냥 천 쪼가리 두 개만 스쳐 지나온 건데.

시작부터 임팩트 있던 일본 센토는 욕탕 공간으로 들어가니 더했다. 나 또한 발가벗고 플라스틱 목욕의자에 앉아 샤워부터 하고 있는데, 등 뒤 가까이에서 일본 남자들 떠드는 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가리고 뒤 돌아보니 똑같이 벗은 몸의 여자들만 보였다. 황당한 의문은 금세 풀렸다. 와, 여기 천장이 뚫려있어.

정확히는 남탕과 여탕이 한 공간인데, 얇은 타일 가벽으로 중간이 가로막혀 있었다. 벽 너머 남탕엔 친구들끼리 연시를 기념해 들어왔는지 한바탕 수다스러웠다. 기분이 심히 야릇했다. 이상했다는 뜻이다. 난 벌거벗고 있는데 알지도 못하는 생면부지의 남성들이 바글바글, 단절되지 않은 한 공간에 들어와 있다니. 무심한 듯 목욕을 즐기는 현지 여자들은 보며 애써 진정했다. 뜨거운 탕에 들어가 따끔거리는 몸을 견디고 있자니 익숙해졌는지 재미있었다. 오른쪽 구석엔 불그스름한 갈색 물의 전기탕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겁이 나 들어가길 망설였다.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앳된 일본 여자와 계속해서 눈이 마주쳤다. 세 번째 마주쳤을 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까만 머리를 질끈 묶고 은색의 딱 붙는 피어싱을 한 여자가 전기탕에서 나와 내가 들어와 있는 40도 목욕물로 옮겨 들어왔다.

"日本人(일본인)?”

 ”ううん、韓国(아니, 한국)。”

 ”あ, そうか。 ここ住んでる(아 그렇구나. 여기 살아)?”

 ”いいえ、旅行できたよ。一人で。(아니, 여행으로 왔어. 혼자서.)”

몇 살이냐 물으니 열다섯이랬다. 중학생이구나? 물으니 이제 4월이 되면 고등학생이 된다고 대답했다. 어쩐지. 어려 보여. 칭찬한 건데 아이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 나도 네 나이 땐 그 말이 싫었던 것 같아. 맙소사.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낯선 샴푸 냄새가 기분 좋게 코를 찔렀다. 전기탕은 별 것 없었다.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의 찌릿찌릿함은 없었다.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세한 저릿저릿⋯⋯. 둔한 사람은 그마저도 느끼기 힘들 것 같았다. 머리는 뿌리만 대충 말리고 챙겨 온 새 속옷과 양말까지 꼼꼼히 갈아입었다. 맥주를 마실까 미에로 같은 이온 음료를 마실까 고민했는데 사우나 이름이 梅, 매실이니 캔으로 된 매실 주스를 골랐다. 탕 바깥 공간은 너무 협소해 이 안에서 자리를 잡고 편히 마시긴 힘들 것 같았다. 힙하게 제작된 여러 굿즈들을 구경하고,-라이터가 너무 사고 싶었지만 위탁수하물 규정에도 위배되는 듯해 사지 못했다.- 젊은 직원들에게 차례로 인사한 뒤 신발을 갈아 신고 나왔다. 30미터 앞에서 킥보드를 타고 달려오던 젊은이 둘이 "합삐뉴이야-!" 외치며 인사했다. 매실 주스를 마시다 작은 목소리로 "합삐뉴이야." 화답하니 껄껄껄 웃으며 쌩 하고 지나갔다. 술 좀 마셨나 보지. 청춘이다, 청춘이야.


집에 돌아오니 새벽 한 시였다. 가족들과 몇몇 친구들에게서 새해 인사가 도착해 있었다. 덕분에 고마운 마음들로 신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왔다 갔다 쏟아지는 머리카락에서 매실 사우나의 샴푸 향기가 폴폴 풍겼다. 기분 좋았다. 곤한 졸음도 좋았다. 혼자여도 이렇게나 좋을 수 있었다. 또 언젠간 이 기분을 몽땅 잊어버리고 말겠지. 어쩌면 그래서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 이 귀한 기분이. 이 귀한 하루가. 내 귀한 서른의 젊은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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