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사라다

2024 교토윤음

by 윤 음배



춥다. 더럽게 춥다. 온돌 난방 안 되는 일본, 이중샷시 아닌 일본 집은 언제 들어서도 춥다. 12월 30일 교토에 와 앉아 노트북을 켜고 쓰는 첫마디는 '춥다' 말곤 떠오르지 않는다. 피부를 상하게 할 것이 분명한 히터를 최대로 틀어두고, 차가운 방바닥에 발을 대니 떠오르는 기억. 도쿄에서의 것이 있다.

2018년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쿄로 워홀을 떠났다. 부푼 마음으로 계약한 첫 집에 들어서 발코니 바깥에 펼쳐진 야경을 보았다. 3월 즈음이었던가. 바깥 날씨는 그럭저럭 선선했던 것 같은데 집 안이 무진장 추웠다. 그땐 벽걸이 에어컨으로 밖엔 안 보이는 냉난방 전용 히터를 두고 켜 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아빠와 남자친구에게 연신 메세지를 보냈다. '너무 추워. 근데 난방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남자친구가 답신했다. '곧 있으면 주문한 침대 오잖아. 이불 덮고 나면 좀 괜찮아질 거야.' 그래 맞지. 워홀로 도쿄에 입성하기 전 사전 여행으로 왔을 때 미리 주문해 둔 무인양품 침대와 침구세트가 때맞춰 도착할 것이다. 그땐 아직 일본에서 개통한 번호가 없으니 혹시나 집을 나가면 배송기사와 엇갈릴까 두려워 가져온 옷가지를 바닥에 모두 펼쳐 붙이는 핫팩을 겹쳐두고 그 위에 앉아 달달 떨며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침대는 오지 않았다. 유도리 없는 일본인들이 9시를 훌쩍 넘긴 이 시간까지 배송을 할 리가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나는 일본에 살았던 지인에게 부탁해 불길한 자초지종을 들어야 했다.

"어떡하지 윤음아. 부동산 계약할 때 막판에 호수가 바뀌었잖아. 그걸 업데이트하지 못해서 이전 호수에 배송 갔다가 오배송으로 착각하고 돌아갔대⋯⋯ 나흘은 지나야 재배송해 줄 수 있다는데."

덕분에 그날 나는, 도쿄에서의 첫날이 너무 불길하다며 엉엉 울고, 달달 떨며 그 집에서 가장 따뜻했던 변기 위에 앉아 밤을 보냈다. 사실 도중에 벽걸이 에어컨으로 알았던 저것이 히터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틀지 않았다. 불행을 더 키워 자기 연민의 늪을 키우는 재주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이미 불행한 거, 그날만큼은 내가 제일 불행해야 한다. 뭐 그런 거. 비련의 여주인공 병.


연말연시의 일본은 우리나라의 설날과 같다. 귀성길을 찾는 민족대이동이 진행된다. 신정인 '오쇼가츠'를 전후로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 잘 알고 있었다. 일반 여행과는 좀 달라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열흘 일정의 비행기를 끊었다. 하루에 이벤트 한 개만. 한 개만 있어도 땡큐. 없는 날엔 스타벅스에 가서 글이라도 쓰기. 사람 구경하기. 눈 마주치기. 눈 마주치면 웃어주기. 그래서 도착한 오늘은, 10년 전 가족들과 즐겁게 경험했던 동양정에 가 케찹이 섞인 마요네즈와 참치가 숨겨진 차가운 토마토 사라다와 은박지에 쌓여 나와 뜨끈 짭짤한 함박스테이크를 먹은 일이 그 이벤트가 됐다. 후한 마음으로 한 가지 더 쳐주자면 급하게 예약한 에어비엔비 컨디션이 아주 흡족하는 거? 오늘 이벤트가 두 개나 된다. 더 이상 높은 기대감으로 실망을 사 자기 연민에 빠지기 싫었다. 24년 연말은 기대하지 않아도 혹독했다. 도망치고 싶은 심리로 도착한 교토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무 이벤트가 없어도 실망하지 말기. 하나만 생겨도 감사하며 기뻐하기. 아 근데 히터 틀어도 너무 춥다.


내일은 31일이다. 아야노에게 물어보니 보통은 연말연시를 맞아 가족끼리 모여 TV 가수 쇼 '홍백가합전'을 보고, 끝나고 나면 소바를 먹고(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일본식 떡국을 먹는다고 한다. 여기는 TV도 없고, 소바집은 다 문을 닫는다고 하니 뭘 하면 좋을까 골똘히 고민하다 그 생각이 났다. 작년 가을에 만났던 그는 나를 데리고 교토 시내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다, 낡고 오래된 대중목욕탕을 가리키며 가 본 적 있느냐 물었다. 일본에서는 온천료칸 말곤 경험이 없다 답했더니 기회가 되면 가보라 권했다. 영화에 많이 나오지 않냐고. 자기는 오쇼가츠 전날 친구들과 함께 목욕탕에 와 묵은 때를 씻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때마침 켜 둔 구글맵이 거짓말처럼 목욕탕 하나를 추천한다. 걸어서 2분 거리에 드라마에도 나온 유명한 센토(목욕탕)가 있댄다. 이런 우연은 반가우면서도 가끔은 무섭다. 그 혼자만이 하는 문화는 아니었던지 31일부터 1일 까지는 올데이 영업을 한다 홍보하고 있었다. 몇 시쯤 가야 사람이 덜 붐빌까, 크기는 작다는데. 우선 그날 문을 안 닫는 게 확실한 가게를 찾았으니 되었다. 자잘한 고민은 접어두기로 한다. 떠나온 내 나라는 고통이고 눈물밭이다. 근래 들어 자주 긋는 성호를 여러 번 긋고 잠자리를 준비한다. 내일의 윤음이가 내일의 기록도 놓치지 않기를.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할아버지가 정말 죽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