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짠을 좋아하지 않는다. 달고 짜고 시고 매운맛을 즐기지 않는다.
1) 간을 많이 안 하고 싱겁게 먹어 버릇한 우리 가족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고
: 우리가 먹는 국들은 거의 '물'에 가까웠다. 지금에야 부모님이 나이가 조금씩 드시면서 안 그래도 입맛 없는데 간이 있어야 한다면서 설탕과 소금을 꽤 넣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심심한 맛의 음식을 먹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2) 건강에 딱히 좋지 않을 것이란 직감 때문에 그 걱정이 자극적인 맛들을 덮어버리기도 하고
: 달고 짜고 매운 것이라도 자연에서 오는 것이면 괜찮다. 아주 단 바나나, 물로 몇 번을 씻어냈지만 짠맛이 강한 해산물은 그나마 낫다. 그러나 조미료나 설탕이 첨가된 인공적인 맛을 느끼면 직감적으로 몸에 해로울 것 같다는 생각에 딱히 달갑지 않다. 입은 행복할지 몰라도 머리는 행복하지 않은 느낌?
3) 이런 맛들에 맛들리면 더 이상 나는 밋밋함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 초콜릿을 생각하면 달고 맛있겠다는 생각보단 그 설탕 어떻게 해,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어쩌다가 한 번 초콜릿을 먹으면 그 이후 일주일 동안은 초콜릿 생각이 난다. 2+1을 한다는 핑계로 3개를 쟁여놓으며 가방에서 하나씩 꺼내먹는다. 그런 설탕 덩어리를 먹어 버릇하다가 다시 우리 집 식단으로 돌아간다? 절 대 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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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떤 자극을 맞보는 순간 더 큰 자극을 찾게 된다. 없다가 있으면 감사하지만 있다가 없으면 괴롭다. 언젠가 실습 시간에 아이들에게 10분간의 인터넷 할 수 있는 시간을 준 적이 있었다. 화려한 게임들과 내가 좋아하는 것만 띄어주는 알고리즘에 아이들은 너무나 즐거워했다. 10분이 지나고, 인터넷을 끄자고 한 순간 엄청난 울음바다가 됐다. 아차 싶었던 기억이 난다. 애초에 허용하지 말았어야 한다. 이미 다른 활동은 성에 차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욕망을 촉발하고 아주 쉽고 빠르고 값싸게 채울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담배, 놀이기구, 핸드폰, 술. 우리의 욕망을 건드리는 것들이 도처에 깔려있는 환상의 시대다.
즐길 수 있는 쾌락을 즐기지 않고 사는 것이 손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쾌락을 즐기면서 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쾌락을 선택하고 있는 것인지 쾌락이 자신을 선택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중독이 무서운 이유는 자신의 선택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데에 있다.
점점 더 큰 쾌락을 누리려는 이유는 더 큰 쾌락이 더 큰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형태의 쾌락이든 그것을 누리는 순간은 더 기분이 좋을 것이다. 다만 그 쾌락은 더 큰 쾌락을 좇기 쉽다. 쾌락의 그 끝은 어디일까?
내가 쾌락을 경계한다고 해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 생각지 못한 자극적인 맛과 경험이 있을 수는 있겠다. 다만 그 순간은 즐기되 그 순간을 그리워하지는 않을 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쾌락을 적극적으로 누리면서 사는 삶에 만족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들의 신념을 꺾을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이 생각이 든다.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볼 때, 쾌락에 중독된 자신을 보는 것보다는 쾌락을 적당히 취하고 밋밋한 삶을 기본으로 사는 삶을 살아왔던 나를 더 좋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