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위를 많이 탄다. 그만큼 더위도 많이 탄다. 그러면 4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계절에서 여름과 겨울만 힘드냐? 그것도 아니다. 봄엔 쌀쌀하고, 여름엔 너무 덥고, 가을엔 오슬오슬하고, 겨울엔 추워 죽을 것 같다.
20살 초반에는 나의 모든 옷 고르는 기준은 ‘이쁜 것’이었다. 그래서 날씨를 깡그리 무시한 채로 살았다. 더워 죽을 것 같아도, 추워 죽을 것 같아도 참을’만’ 했다. 이뻐야 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뻐 보이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있지만 그 마음을 덮어버리는 것은 ‘생존’이다. 쌀쌀한 가을이나 매서운 추위 안에서 나는 일단 살고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에도 햇빛은 쨍쨍해도 바람은 차다. 그래서 나는 거의 무조건 마이나 카디건을 들고 다니는 편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다.
밤엔 쌀쌀한 요즘 같은 날씨에, 깜빡하고 외투를 집에 놓고 오면 너무나 괴롭다. 아침에 외투를 챙겼어야 하는데,하며 하루 종일 추워하며 후회한다.
근데 외투가 가방에 있으면, 그 사실만으로 그 추위가 참을 만 해진다. 무슨 말이냐면, 물론 실제 외투를 입는 행위를 하면 물론 나는 더 따뜻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물리적으로 외투를 입지 않아도, 외투가 가방에 있고, 내가 원하면 외투를 입을 수 있다는 그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이유로 나는 추위를 참을 수 있게 된다. 내가 원하면 따뜻해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따뜻해짐을 느낀다. 그래서 웃긴 것이 외투가 가방에 있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외투를 꺼내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다. 추위를 느낀다고 해도 외투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추위를 훨씬 덜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외투를 두고 온 날도 외투가 가방에 있다고 착각한다면? 자기 최면을 걸 정도의 고수는 아직 아니다. 실제로 있어야만 그런 효과를 발휘한다.
참 신기하다. 심리적 요인이 체온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도 신기하고, 외투가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외투를 꺼내지 않아도 괜찮아지는 나도 신기하다.
나에게는 나의 자유와 선택권을 지켜주는 믿는 구석이 참 중요한가 보다 싶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은 참 든든한 일이다.
문득,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믿는 구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 존재만으로 든든해지는 그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