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컬처 Sep 15. 2023

핑크소파가 뭐길래

2018. 4. 19. 

동생이 곧 이사를 한다.


5년 가까이 살았던 원룸을 떠나 투룸, 아니 1.5룸에 입성한다. 


체리색 몰딩, 분홍이 이제 누렁이 된 화장실 타일, 빨간 시트지가 붙은 냉장고가 기본 옵션으로 딸려있는 낡은 원룸을 드디어 떠날 차례가 된 것이다. 그 좁은 방에서 나와 같이 자취를 할 때는 언제고, 혼자 그 방을 다 어질러 놓고 살더니만 이제 방이 하나 더 필요하겠단다. 


청소나 잘하지, 뭔 방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것 같느냐고, 상하반신 따로 떼서 자겠냐고 물었더니 머리랑 발이랑 따로 자겠단다. 나도 자취를 오래 했지만, 원룸의 최대 단점은 활동 공간과 휴식 공간이 한 곳에 그것도 한눈에 모두 보인다는 것이다. 몇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같은 곳에서 몇년 간 지낸다는 건 사람이 참 무료해지기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되는 듯 하다. 그래서 동생은 이사를 한다. 


항상 볼 때마다 저거 언제 커서 앞가림을 하겠나(라고 하기에 겨우 18개월 터울이다) 걱정했는데 이제 본인 명의로 어엿하게 1억 빚을 만들었다. 동생은 비로소 진정한 대한민국의 어른이자 소시민이 되었다.


원해서 하는 이사란 참 신이 나는 법이다. 단꿈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나의 공간을 나의 취향대로 만들어가는 일, 아 이 얼마나 재미난 일인가. 비단 취향이랄 게 없다 해도 새 물건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동생은 새로 가는 집의 거실역할을 할 공간에 소파를 놓고 싶어했다. 그것도 핑크소파를!


...핑크소파?

핑크라고???


핑크를 반대할 수 있는 이유를 대는 건 아주 쉬웠다.


튄다, 자고로 큰 가구 색은 잔잔바리로 가야한다, 너 지금 토끼 귀 달린 소파를 말하는 거냐, 핑크는 핑크잖아 핑크! 등등..


하지만 동생의 생각은 완고했다.

"나는, 핑크 소파를 사겠어."


가족 단톡방이 난리가 났다.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게다가 동생이 고른 핑크 소파는 패브릭 소재였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집 의사결정 일인자 엄마는 가죽소파 신봉자였다. 이제 화두는 소파에 핑크가 왠 말이냐를 넘어 소파는 가죽이어야 한다로 넘어갔다. 반대를 넘어 흐름은 설득(가죽이 청소에 편해)과 협박(이사 선물할랬는데 소파 안사준다), 그리고 회유(후회 않게 엄마말 들어)로 흘러가는 듯 했다.


오, 핑크여. 너는 무슨 죄를 진 것이냐.

너는 단지 핑크였을 뿐인데!


사실 엄마의 조언은 돌이켜보면 거의 어느 상황에나 맞았다. 나는 언제나 엄마의 조언을 거스르는 나만의 결정을 하고 몇 년 뒤에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게 일이었다. 엄마가 나를 부르는 별명 몇 가지 중 하나는 뒷북이었다.


나보다 거의 배를 산 엄마의 지혜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점점 나의 삶도 '어른'의 영역으로 넘어오며 취향의 부분에 있어서는 엄마와는 다른 결을 가진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회사를 다니며 플래너 없는 결혼식 준비에 영혼이 모두 소멸된 나는 엄마가 찾고 고른 것 위주로 살림을 마련했는데, 정신이 돌아오고 '나의 집'을 가꾸기 시작하며 보니 이게 내 손과 내 눈엔 영 까스러웠다.

처분하자니 그 마음이 미안하고, 새로 사자니 돈이 아깝고, 계속 쓰자니 왠지 짜증나고. 하지만 조그만 감자칼이라도 내 시선이 편하게 머무르려면 결국 내 손을 타야 한다는 걸 하나씩 뒤늦게 살림살이를 바꿔가며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어디서 생긴지도 모르는 감자칼을 3만원 가까이 주고 바꿨다. 


하물며 감자칼도 내 마음대로 바꿨는데, 소파가 핑크이기 때문에 지지받지 못하는 건 말이 안된다.

핑크에게도 소파에게도 미안하고 그 소파에 언제나 눈을 둘 동생이 편안할 기회를 앗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동생에게 개인톡을 보냈다.

"제발 그냥 사."


동생은 선포했다.

"내 맘대로 할거야. 엄마 나 선물로 핑크소파 사줘."


이거 뭔가 앞뒤가 살짝 안 맞는데.. 여튼간에.

다시 생각해보라던 엄마는 또 순순히 그러라며 핑크소파를 선물했고, 새로운 집에서 동생은 행복할 것이다.


가족 단톡방은 금새 평화로워졌다. 

아직 소파 주문도 안 했으면서 동생이 말했다.

"작은 집에는 역시 핑크가 최고야. 난 핑크공주야."


그래, 내 작은 핑크공주야. 

남들이 말이 안 된다 해도 나를 행복해하는 거라면 마음껏 해.

 

나의 선택으로 행복해지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2018. 4. 19. 




매거진의 이전글 이기적인 효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