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늦은 밤의 대화 한 조각

: 낮의 전쟁을 끝낸 두 전우가, 서로의 우주를 봉합하는 시간

by 유다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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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잠든 밤 11시, 마법이 시작되는 시간


전쟁 같은 하루가 끝났다. 수빈이와 다빈이가 남긴 저녁 식탁의 잔해를 치우고, 거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장난감들을 장난감 통에 쑤셔 넣고, 마침내 두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안방에 내려앉을 때. 벽시계의 바늘은 어느덧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집안의 모든 메인 조명을 끄고, 주방 식탁 위의 자그마한 노란 펜던트 조명 하나만 켠다. 냉장고 돌아가는 백색소음만이 공간을 채우는 이 고요한 시간.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차가운 캔맥주 두 개를 꺼낸다. 남편은 익숙하게 마른오징어나 견과류 따위를 작은 접시에 담아 맞은편에 앉는다.


"탁, 치이익-."


캔맥주 따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우리는 비로소 '부모'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고 '남자'와 '여자', 혹은 '남편'과 '아내'라는 본연의 이름으로 돌아온다.


결혼 생활을 굴러가게 하는 동력은 화려한 이벤트나 비싼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잠든 이 고요한 밤, 서로의 지친 얼굴을 마주 보며 나누는 아주 사소하고도 투박한 '대화 한 조각'에 있다. 오늘은 우리 부부를 지탱하는 가장 내밀하고 빛나는, 식탁 위 심야 회담에 대하여 이야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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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낮의 자존심을 허무는 밤의 고해성사


태양이 떠 있는 낮의 시간 동안, 부부는 각자의 전쟁터에서 싸운다.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에서 치이고, 집에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아이들과 씨름한다.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에서 부딪히다 보면, 아주 사소한 일로도 날 선 말이 오가기 십상이다.


"분리수거 좀 미리 해두라고 했지!"


"나도 일하고 와서 힘든데 왜 자꾸 닦달해!"


낮에는 절대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뾰족해진 자존심과 억울함이 온몸을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밤의 어둠은 기묘한 마취제와 같다. 노란 조명 아래 마주 앉아 알코올이 한 모금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 낮게 쳐져 있던 자존심의 바리케이드가 스르르 무너져 내린다.


"아까는 내가 말이 좀 심했지. 미안해. 사실 오늘 거래처에서 스트레스받는 일이 좀 있었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남편이 먼저 사과를 건넨다. 그러면 나 역시 뾰족했던 가시를 거둔다.


"아니야, 나도 애들한테 시달리다 보니까 예민했어. 고생했네, 우리 남편."


이 '밤의 고해성사'가 없다면, 낮에 생긴 작은 생채기들은 곪아서 흉터가 될 것이다. 우리는 늦은 밤의 대화를 통해 오늘 하루치 감정의 찌꺼기들을 털어내고, 서로의 상처에 연고를 바른다. 내일을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부서진 서로의 우주를 정성스럽게 봉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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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살 연하의 소년이, 거대한 나무로 자라남을 목격할 때


가끔 맞은편에 앉아 턱을 갠 채 맥주를 마시는 남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할 때가 있다.


연애 시절, 내 눈에 그는 티 없이 맑고 에너지가 넘치는 6살 연하의 풋풋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눈가에도 옅은 주름이 패고, 어깨에는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묵직한 무게가 내려앉아 있다.


"여보, 요즘 어깨가 좀 굽은 것 같아. 안마 좀 해줄까?"


"아니야, 괜찮아. 수빈이 다빈이 커가는 거 보면 힘든 줄도 모르겠어."


그의 무심한 대답 속에서 나는 그가 얼마나 깊고 단단한 나무로 성장했는지를 깨닫는다. 어릴 적 나의 뾰족했던 트라우마와 예민함을 특유의 둥글둥글함으로 감싸 안아주던 남자. 이제는 두 딸의 든든한 아빠이자, 내 삶의 가장 완벽한 파트너가 된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묻는다.


'당신은 나를 만나서 행복한가요? 당신의 청춘을 나와 아이들에게 기꺼이 반납한 것을 후회하지 않나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내 질문을 읽기라도 한 듯, 남편은 맥주 캔을 내 것에 툭 부딪히며 웃는다.


"우리 진짜 열심히 잘살고 있다, 그렇지? 앞으로 더 잘될 거야."


그 단순하고 투박한 위로 한마디가, 나의 내면에 남아있던 일말의 불안과 죄책감을 씻어 내린다. 나이 차이라는 숫자는 진작에 증발해 버렸다. 우리는 그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란히 늙어가는 동갑내기 영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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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래를 그리는 설계도, 때로는 두려움의 공유


밤의 대화는 과거의 회상과 현재의 위로를 넘어, 미래를 향한 설계도로 이어진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 대출금 상환 계획, 양가 부모님의 건강, 그리고 다가올 노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까지.


"나중에 AI가 다 해 먹는 세상 오면 우리 애들은 뭐 먹고살지?"


"그러니까 우리가 악착같이 벌어서 든든한 언덕을 만들어 줘야지."


때로는 해결책 없는 현실의 벽 앞에서 막막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 앓는 공포와, 식탁에 마주 앉아 함께 털어놓는 공포는 그 질감이 완전히 다르다. 혼자 짊어지면 짓눌려 죽을 것 같은 짐도, 둘이 마주 앉아 나누면 신기하게도 견딜 만한 무게가 된다.


"어떻게든 되겠지. 우리 지금까지 잘 헤쳐 왔잖아."


이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밤의 식탁 위에서는 가장 강력한 진통제가 된다. 완벽한 대안이 없어도 괜찮다. 내 두려움을 비웃지 않고 온전히 공감해 주는 한 사람, "내가 네 옆에 있어"라는 눈빛으로 나의 불안을 잠재워주는 한 사람.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완벽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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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침묵마저도 대화가 되는 경지


결혼 연차가 쌓이면서 밤의 대화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려 했다면, 이제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꽉 찬 대화가 이루어질 때가 있다.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도, 가끔 시선이 마주치면 피식 웃고 만다.


창밖으로 들리는 풀벌레 소리, 멀리서 지나가는 오토바이의 엔진음, 그리고 내 앞에서 조용히 캔맥주를 홀짝이는 배우자의 숨소리.


이 고요한 침묵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따뜻한 담요처럼 나를 감싸 안을 때, 나는 이 결혼이라는 제도가 주는 궁극의 평안을 맛본다.


사랑한다는 낭만적인 고백보다, 치열하게 토론하는 미래의 계획보다, 때로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는 물리적 안도감'이 부부의 영혼을 가장 깊숙이 연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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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조각들이 모여 견고한 성(城)이 된다


가끔 피곤함에 지쳐 아이들과 함께 곯아떨어지는 날이면,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밤의 의식을 치르지 않아 하루의 마무리가 되지 않은 찝찝함이 남는 것이다.


우리가 늦은 밤, 그 피곤한 눈을 비벼가며 굳이 식탁에 마주 앉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대화의 조각들이 없으면 우리는 '부부'가 아니라 그저 집을 공유하는 '동거인'이나, 아이를 같이 키우는 '공동 양육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이다.


오늘 밤도 나는 어김없이 냉장고 문을 열 것이다.


지친 남편의 어깨를 토닥이며 하루의 무용담을 들어주고, 나의 소소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두 아이가 잠든 이 집의 평화를 감사히 음미할 것이다.


부부라는 견고한 성(城)은 대단한 철근이나 콘크리트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늦은 밤 식탁등 아래서 나눈 눈빛 하나, 맥주 한 모금, 위로 한마디.

그 작고 따뜻한 대화의 조각들이 매일 밤 차곡차곡 쌓여, 그 어떤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우리만의 찬란한 성벽이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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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곤하더라도, 오늘 밤 10분만 마주 앉아 보세요


"퇴근하고 애들 씻기고 재우면 밤 11시예요. 남편 얼굴 볼 힘도 없이 기절합니다."


많은 부부들이 육아의 고단함에 치여 부부만의 시간을 사치로 여깁니다.

저 역시 수빈이와 다빈이가 어렸을 땐, 남편과 대화하는 시간보다 10분 더 자는 게 간절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10분의 수면 대신, 10분의 대화를 선택해 보세요.

식탁에 마주 앉아 대단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김 대리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어."


"오늘 애가 밥을 안 먹어서 속상했어."


그저 각자의 하루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남남이 아님을 확인하는 강력한 접착제가 됩니다.

거실의 불을 끄고, 조명 하나만 켜보세요.

어둠은 우리의 부끄러움과 자존심을 가려주고, 진짜 마음을 꺼내놓게 만드는 마법의 커튼이 되어줄 겁니다.

오늘 밤, 캔맥주 두 개를 꺼내어 사랑하는 이의 앞에 슬며시 밀어놓아 보는 건 어떨까요?


매일 밤 식탁에서 남편과 연애 중인, 유다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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