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아라는 지우개가 지워버린, 내가 공주님이었던 그 시절의 기록
아, 저 집 남편 진짜 로또네.
육아 퇴근을 마치고 소파에 파묻혀 스마트폰을 끄적이는 밤 11시. 알고리즘의 인도를 받아 어느 유명한 SNS 인플루언서 부부의 피드에 접속했다. 이른바 '00 부부'라 불리는, 아내를 공주님처럼 떠받들고 사는 남편의 계정이었다.
피드 속 영상은 그야말로 달콤함의 극치였다. 아내가 피곤하다고 하면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앞치마를 두르고 5성급 호텔 셰프 뺨치는 저녁을 차려 바친다. 주말이면 예쁜 카페에 데려가 아내를 위해 맛있는 것을 사주고, 아내가 무심코 "저거 예쁘다" 한마디 한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깜짝 선물로 안겨준다. 심지어 아내 몰래 데리러 가기까지 한다.
그 완벽한 릴스 영상을 세 번쯤 반복해서 보다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거실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오늘 하루 두 딸과 놀아주느라 에너지가 방전된 나의 6살 연하 남편이, 늘어진 티셔츠 차림으로 입을 반쯤 벌린 채 코를 골며 널브러져 있었다.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지극히 찌질하고도 원초적인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하, 부럽다 부러워.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저런 남편이랑 살면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공주님처럼 살 텐데. 나는 왜 맨날 밥하고 애들 똥구멍이나 닦아주며 살고 있나."
못난 질투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바닥에서 자고 있는 내 남편의 등짝을 괜히 한 대 찰싹 때려주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그렇게 배를 부여잡고 부러워하며 피드를 한참 더 스크롤해 내려가던 중, 문득 어떤 위화감이 들었다.
그 완벽하고 달콤한 부부의 일상 사진 수백 장을 다 보았는데, 무언가 하나가 쏙 빠져 있었다.
'가만, 이 집에 애가 없네?'
그렇다. 그들은 아이가 없는 딩크(DINK) 부부이거나, 혹은 아직 신혼인 상태였다. 사진 속 거실에는 알록달록한 뽀로로 매트도, 거실을 점령한 미끄럼틀도, 바닥에 굴러다니는 레고 조각도 없었다.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 없는 부부의 24시간과 체력. 그것은 아이를 키우는 부부의 시간과는 질량 자체가 다르다. 남편의 모든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통장의 잔고가 100% 아내 한 사람만을 향해 쏟아질 수 있는 그 절대적인 여유.
나는 스마트폰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천장을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기억의 회로가 맹렬하게 과거로, 과거로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잠깐만. 애가 없던 시절이라고? 우리 부부에게도 애가 없던 시절이 있었잖아.'
기억의 태엽을 감아 2011년, 우리가 처음 부부가 되었던 그 빛나는 신혼 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수빈이가 태어나기 전까지의 그 4년. 그 시절 나의 6살 연하 남편은 도대체 어떤 남자였던가.
갑자기 뒤통수가 화끈거렸다. SNS 속 '로또 남편'을 보며 부러워할 자격이 나에게는 1그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 남편은 그 릴스 속 남편보다 훨씬 더 유별나게 나를 떠받들던 '슈퍼 로또'였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나를 소파에 앉혀두고 혼자 주방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저녁을 차리던 남자. 밥을 다 먹고 나면 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며 고무장갑을 끼고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하던 남자.
내가 길을 걷다 다리가 아프다고 투정을 부리면, 주위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훌쩍 나를 등에 업고 동네를 누비던 그 넓은 등짝.
백화점을 구경하다 내 시선이 조금이라도 머무는 가방이나 옷이 있으면, 어떻게든 비상금을 털어서라도 내 품에 안겨주어야 직성이 풀리던 호기로운 연하남.
맞다. 나는 공주님이었다. 아니, 여왕님에 가까웠다.
그의 세상은 오직 나를 중심으로 자전하고 공전했다. 내 기분이 상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일이었고, 내 입에 맛있는 음식이 들어갈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웃던 사람이 바로 지금 저 바닥에서 입을 벌리고 자는 내 남편이었다.
그렇다면 그토록 완벽했던 나의 로맨스는 언제부터 삐걱대기 시작했을까. 그 달콤했던 기억들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해 버린 걸까.
범인은 명확했다. 2015년, 첫째가 태어나고 연이어 둘째가 태어나면서 시작된 '육아라는 이름의 재난 상황' 때문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부부의 에너지는 100에서 0으로 급전직하한다. 밤낮없이 우는 핏덩이를 살려내기 위해 우리는 로맨스 대신 '전우애'를 선택해야만 했다.
남편이 나를 업어주던 그 듬직한 등에는 이제 두 딸이 매달려 있었고, 나를 위해 요리를 하던 그 손은 아이들의 젖병을 소독하고 똥 기저귀를 가는 데 쓰였다. 나를 향했던 그의 시선과 에너지가, 우리 가족이라는 거대한 배를 가라앉히지 않기 위한 '생존 본능'으로 분산된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의 예방접종 날짜를 챙기고, 이유식을 만들고, 육아에 치여 떡진 머리로 거실을 배회하느라 남편의 다정함을 알아챌 여유 따위는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 당장 오늘 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너무나 버거워서, 나는 내 남편이 나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고 떠받들어주던 남자였는지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이다. 육아의 고단함이 내 뇌 구조 속 로맨스 폴더를 통째로 포맷해 버렸다.
바닥에서 잠든 남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20대 청년의 풋풋함은 사라지고, 어느새 가장의 피로가 내려앉은 30대 후반의 낯선 얼굴. 가슴 한구석이 쿵, 하고 아려왔다.
미안했다. 남의 집 남편의 화려한 단면만 보고 부러워하며, 내 옆에서 묵묵히 내 짐을 나눠지고 있는 이 사람을 깎아내렸던 내 찌질함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가만히 곱씹어 보니,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 전쟁 같은 육아판이 벌어진 이후에도 남편의 1순위는 언제나 나였다.
첫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할 때, 밤새 아이가 울면 나를 푹 자게 두려고 뜬눈으로 아이를 안고 거실을 서성이던 사람. 내가 육아 스트레스로 폭군처럼 짜증을 낼 때도 묵묵히 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주던 사람. 맛있는 고기반찬이 식탁에 오르면, 아이들 입에 넣어주기 전에 가장 먼저 내 숟가락 위에 살코기를 올려주는 사람.
표현의 방식이 '이벤트'에서 '생활'로, '로맨스'에서 '책임감'으로 투박하게 바뀌었을 뿐, 그는 한 번도 나를 향한 지독한 맹목성을 거둔 적이 없었다.
SNS 속의 그 남자가 아내를 공주님으로 모시고 있다면, 내 남편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억척스럽게 변해버린 나를,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왕님으로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청춘을 갈아 넣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쥐고 있던 스마트폰의 화면을 완전히 꺼버렸다. 그리고 바닥에 누워 있는 남편의 곁으로 다가가, 그 듬직한 팔베개 사이로 조용히 파고들어 누웠다.
잠결에 내 인기척을 느낀 남편이 무의식적으로 묵직한 팔을 뻗어 나를 품 안으로 꽉 끌어안았다. 그 따뜻하고 익숙한 체온.
그래, 세상천지에 이런 로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의 가장 빛나던 시절을 함께해 주었고, 내가 가장 망가지고 초라해진 육아의 터널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내 손을 놓지 않은 바보같이 착한 이 남자.
타인의 화려한 피드 몇 장에 눈이 멀어, 내 품 안에 있는 이 거대한 보석을 한낱 돌멩이 취급할 뻔했다.
내일 아침 남편이 눈을 뜨면, 아침밥은 내가 차려줘야겠다. 그리고 오랜만에 말해줘야겠다.
여보, 당신은 10년 전에도,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도 나에게는 최고의 로또라고. 내가 육아에 정신 팔려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해 왔는지 아주 잠깐 깜빡했었다고. 정말 미안하고, 미치게 고맙다고.
거실의 옅은 어둠 속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나의 로또를 꽉 끌어안은 채 아주 달게 잠이 들었다.
: 육아의 먼지 속에 묻어둔, 당신의 로맨스를 꺼내보세요
"요즘 내 남편은 애들 아빠일 뿐, 남자로 안 보여요."
혹시 남의 집 다정한 남편들을 보며, 무뚝뚝해진 내 남편을 원망하고 계시진 않나요? 그렇다면 오늘 밤, 기억의 서랍을 한 번만 깊게 뒤져보세요.
아이 기저귀값과 대출 이자에 쫓겨 우리가 까맣게 잊고 살아서 그렇지, 당신의 남편도 한때는 당신의 미소 한 번에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던 열렬한 로맨티시스트였을 겁니다. 당신의 가방을 들어주고, 예쁜 꽃을 사다 주며, 당신을 공주님처럼 모시던 그 빛나는 시절이 분명 우리 모두에게 있었습니다.
그의 사랑이 식은 게 아닙니다. 당신과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이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 그 에너지를 잠시 '생존'과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변환시켜 두었을 뿐입니다.
SNS 속 화려한 타인의 부부 생활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 사진들에는 육아라는 훈장이 없습니다.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아이들을 함께 키워낸 당신 부부의 거친 손과 주름진 얼굴이야말로, 그 어떤 화려한 피드보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진짜 '로맨스의 증거'입니다.
오늘 퇴근한 남편의 처진 어깨를 한 번 꽉 안아주세요. 우리가 잊고 있던 최고의 로또는, 언제나 우리 집 거실 소파에 누워 있으니까요.
나의 영원한 로또 남편에게 띄우는 반성문, 유다람 드림
https://litt.ly/yoodaram_wri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