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마천루의 그림자, 현대판 노예 '카팔라'

: 사막의 모래에 묻힌 여권 없는 유령들

by 유다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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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구름을 뚫은 빌딩 아래, 묻혀버린 비명소리


텔레비전 화면이나 소셜 미디어 속 중동의 부유한 국가들은 마치 닿을 수 없는 미래 도시를 방불케 한다.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기적 같은 마천루,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실내 스키장, 황금으로 장식된 7성급 호텔, 그리고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메가 스포츠 축제의 최첨단 경기장들. 사람들은 오일 머니(Oil Money)가 사막 위에 빚어낸 그 거대하고 눈부신 신기루에 감탄하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 화려한 불빛의 이면,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이 거대한 기적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들의 진짜 얼굴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네팔의 고산 지대에서, 방글라데시의 빈민가에서, 인도의 낡은 골목에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아라비안 드림'을 안고 날아온 이주 노동자들.


그들은 비행기 트랩을 내려 사막의 뜨거운 바람을 맞는 바로 그 순간,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과 '국적',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빼앗긴다. 오직 고용주의 기분에 따라 생사여탈권이 결정되는 완벽한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21세기 문명사회에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야만적인 착취 구조. 우리는 이 거대한 비극의 이름을 '카팔라(Kafala) 시스템'이라 부른다.


오늘의 비망록은 자본주의의 가장 잔혹한 민낯이자,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거대한 생지옥 속에서 여권 없이 늙어가는 사막의 유령들에 대한 비통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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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법이라는 가면, 그 뒤에 숨은 인신매매의 덫


'카팔라(Kafala)'는 아랍어로 '후원' 또는 '보증'을 뜻한다. 본래는 이방인이 척박한 사막의 부족 사회에 들어올 때, 그 부족의 누군가가 이방인의 신원을 보증해 주고 외풍으로부터 보호해 주던 이슬람의 아름다운 환대 문화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거대한 자본이 유입된 현대에 이르러, 이 제도는 이주 노동자의 목을 옥죄는 가장 잔악하고 교묘한 쇠사슬로 변질되었다.


카팔라 시스템의 핵심은 단 하나다. 이주 노동자의 체류 신분과 노동 비자를 오직 '고용주(Kafeel, 스폰서)' 한 사람에게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이다.


노동자는 고용주의 명시적인 허락 없이는 직장을 바꿀 수도, 가혹한 노동 환경을 견디지 못해 일을 그만둘 수도, 심지어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을 수도 없다. 만약 고용주의 학대를 피하기 위해 한밤중에 숙소를 도망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노동자는 곧바로 국가가 추적하는 '불법 체류자'이자 '범죄자'로 전락하여 경찰에 체포되고 캄캄한 감옥에 갇힌다. 국가의 법이 고용주에게 노동자를 마음대로 굴릴 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의 '채찍'을 쥐여준 셈이다.


이것은 상호 합의에 의한 근로 계약이 아니다. 인간을 부속품처럼 소유하고 통제하는 '합법적 인신매매'일뿐이다. 빚을 내어 브로커에게 막대한 수수료를 지불하고 모래의 땅에 도착한 청년들은, 그제야 자신이 건너올 수 없는 지옥의 강에 발을 담갔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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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여권은 고용주의 금고 속에 있습니다" : 거세된 자유


카팔라 시스템하에서 고용주들이 노동자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관행적으로 저지르는 가장 첫 번째 폭력은 바로 '여권 압수'다.


타국에서 여권은 단순한 신분증명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어느 나라의 보호를 받는 국민인지 증명하는 유일한 물리적 실체이자, 언제든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숨 쉬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자유의 보증수표'다. 고용주가 노동자의 여권을 거두어들여 굳게 닫힌 금고에 넣고 자물쇠를 채우는 행위는, 노동자의 존재 자체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그들의 영혼을 거세하는 심리적 살인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여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면 그날은 밥을 주지 않았습니다. 월급을 반년째 주지 않아 눈물로 항의했더니, 당장 경찰에 도망자로 신고해 감옥에서 썩게 만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저는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거대한 감옥의 죄수였습니다."


여권이 없는 노동자는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투명 인간이다. 일하다 다리가 부러져도 병원에 갈 수 없고, 약속된 임금을 떼여도 경찰서 문턱을 넘을 수 없다. 그저 고용주가 선심 쓰듯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에 의지해, 매일 밤 낡고 비좁은 숙소의 천장을 바라보며 고향에 두고 온 핏덩이 같은 자식의 얼굴을 그리며 숨죽여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지독한 무력감과 단절감은 인간의 정신을 서서히, 그러나 아주 철저하게 붕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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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섭씨 50도의 지옥 : 사막의 태양 아래 타들어 가는 생명


건설 현장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참혹함은 극에 달한다. 월드컵 경기장의 화려한 지붕을 올리고, 수백 층짜리 엑스포 건물을 세우고, 바다를 메워 새로운 인공 섬을 닦는 곳에는 늘 남아시아에서 온 건장한 20대, 30대 청년들이 있다.


중동의 여름은 살인적이라는 수식어로도 부족하다. 낮 기온이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불가마 같은 폭염 속에서, 그들은 안전모나 생명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뜨겁게 달궈진 철근을 맨손으로 나르고 시멘트를 붓는다. 그늘 한 점 없는 마천루의 꼭대기 층에서 작업하다 일사병으로 어지러움을 느끼고 곤두박질치는 일은 뉴스에조차 나오지 않는 일상이다.


하지만 고용주들은 공기(工期)를 단축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채찍질한다. 그늘에서 쉴 시간은커녕, 탈수를 막아줄 깨끗한 식수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현장이 허다하다.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씩 이어지는 살인적인 중노동 끝에, 그토록 건장했던 청년들은 숙소에서, 혹은 작업장 한가운데서 돌연사로 쓰러진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그들의 시신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망 진단서다. 높은 곳에서 추락해 뼈가 부서지거나, 과로로 심장이 멎거나, 열사병으로 장기가 녹아내려 죽어도 병원이 발급하는 사망 원인은 놀랍도록 일치한다.


"자연사(Natural Causes)" 혹은 "원인 미상의 심장 마비".


죽음의 원인을 업무상 재해가 아닌 개인의 질병이나 자연사로 둔갑시키면, 고용주는 유가족에게 단 한 푼의 보상금도 지급할 의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카트만두나 다카의 공항 화물칸을 통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거친 나무관. 그 관을 붙잡고 하늘이 무너진 듯 오열하는 가족들에게, 사막의 기적은 세계의 축제가 아니라 씻을 수 없는 피눈물의 제단일 뿐이다.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저 화려한 빌딩 숲, 콘크리트 사이사이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젊은 영혼들의 한숨이 시멘트처럼 굳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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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실 속의 절규 : 닫힌 문 뒤에서 가사 노동자들은 어떻게 질식해 가는가


건설 노동자들이 뙤약볕 아래서 말라죽어간다면, 부유한 저택 안으로 들어간 여성 가사 노동자(Domestic Workers)들은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밀실 안에서 서서히 질식해 간다. 카팔라 시스템의 가장 어둡고 끔찍한 사각지대가 바로 이들의 일터다.


필리핀,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수백만 명의 가난한 여성들이 입주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이들 역시 공항에서 여권을 빼앗긴 채, 고용주의 집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힌다. 국가의 근로 기준법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이들은 휴일도 없이 하루 18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린다. 외출은 엄격히 금지되며, 심지어 가족과의 생사 확인을 위한 전화 통화조차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더욱 끔찍한 것은 굳게 닫힌 문 뒤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언어폭력, 신체적 학대, 그리고 성착취다.


고용주 가족들로부터 말대꾸를 했다며 뺨을 맞고,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끓는 물이나 다리미로 화상을 입고, 며칠씩 굶기는 징벌적 학대가 자행된다. 남성 고용주나 그 집안의 아들들에 의한 끔찍한 성폭력 사건도 비일비재하지만, 이 여성들은 입을 열 수 없다.


목숨을 걸고 도망쳐서 경찰서에 달려가 눈물로 피해 사실을 호소해도, 경찰은 오히려 스폰서인 고용주에게 전화를 건다. 고용주가 뻔뻔한 얼굴로 "저 여자가 내 보석을 훔쳐 달아났다"라고 거짓말을 하는 순간, 피해자인 여성은 그 자리에서 절도죄와 불법 이탈 죄를 뒤집어쓴 채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가거나 태형(채찍질)을 당한다.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캄캄한 절망 속에서, 결국 수많은 여성들이 주인의 집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그녀들이 그토록 원했던 것은 그저 고향에 있는 아이에게 새 옷을 사주고, 학교에 보낼 학비를 마련하는 것, 단지 그 소박하고 간절한 모성애뿐이었다. 그 대가가 짐승만도 못한 지옥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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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의 침묵 : 우리는 이 비극의 방관자이자 공범이 아닌가


이 참혹한 인권 유린의 실태가 국제 앰네스티나 인권 단체들에 의해 전 세계에 폭로되고, 월드컵과 같은 글로벌 메가 이벤트를 앞두고 국제 사회의 거센 비난이 쏟아지자, 일부 중동 국가들은 부랴부랴 입장을 냈다. "카팔라 제도를 폐지하거나 이직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완화하겠다"며 법 개정을 홍보했다.


하지만 현장을 지키는 인권 운동가들은 분노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것은 철저한 눈속임이자 국제 사회를 향한 쇼에 불과하다. 문서상의 법이 조금 바뀌었다 한들, 고용주가 여전히 체류 비자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암묵적으로 쥐고 있는 한,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이 언어의 장벽과 법적 정보의 부재 속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있는 한, 시스템의 본질적인 폭력성은 단 1밀리미터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름표'만 그럴싸하게 바꾸었을 뿐, 노예의 등을 내리치는 채찍은 여전히 고용주의 손에 굳게 쥐여 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아주 뼈아픈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텔레비전 앞의 우리는, 이 거대한 비극과 무관한가?


우리가 겨울철 따뜻하게 보일러를 땔 수 있게 해주는 저렴한 기름, 우리가 환호하며 시청하는 화려한 국제 스포츠 경기, 그리고 사막의 기적을 찬양하며 떠나는 럭셔리한 패키지여행 상품들. 이 모든 것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는 가난한 자들의 노동력을 헐값에 착취하여 자본의 비용을 절감하는 카팔라 시스템이 굳건히 버티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이들의 피와 땀, 그리고 부서진 뼈를 갈아 넣어 굴러가고 있다. 싼값에 풍요를 누리는 전 세계의 소비자들, 비극을 뻔히 알면서도 막대한 오일 머니의 건설 수주를 따내기 위해 미소 지으며 침묵하는 글로벌 기업과 정치인들. 과연 우리 중 그 누구도 이 현대판 노예 제도의 방관자이자 공범이 아니라고 당당히 고개 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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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이름들을 호명하며


건설 현장의 거대한 타워크레인이 멈추고 사막의 지평선 너머로 붉은 노을이 질 때, 허름하고 냄새나는 노동자 숙소 앞에는 수천 명의 남자들이 모여 앉아 각자의 먼 고향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자식의 생일날 변변한 장난감 하나 사서 보내지 못해 굵은 눈물방울을 훔치는 젊은 아버지, 성폭행의 충격으로 마음이 산산조각 난 채 골방에 갇혀 짐승처럼 앓고 있는 어린 딸, 그리고 끝내 살아서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이름 없는 모래무덤에 묻혀버린 수백만의 청춘들.


자본의 논리는 그들을 '대체 가능한 인적 자원'이라 부르고, 시스템은 그들의 죽음을 무미건조한 '숫자'로 기록한다. 하지만 그들은 한 명, 한 명 모두가 누군가의 애지중지하는 아들이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딸이었으며, 비바람으로부터 가정을 지켜내려 했던 다정한 부모였다.


여권을 빼앗고 인간의 존엄을 거세한 자들이 세운 저 오만한 바벨탑은, 언젠가 그 아래 묻힌 피의 저주로 인해 반드시 무너져 내릴 것이다. 아니, 문명을 자처하는 인류의 양심을 걸고서라도 무너져야만 한다.


우리는 이 불편하고 아프기 짝이 없는 진실을 두 눈 부릅뜨고 똑똑히 바라보아야 한다.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지어진 화려함은 문명이 아니라 '야만'임을 쉼 없이 발음하고 기록해야 한다. 더 이상 낯선 타국의 모래바람 속에 억울한 유령들이 떠돌지 않기를. 그들의 빼앗긴 여권이, 그리고 갈기갈기 찢긴 인생과 존엄이 다시 그들의 두 손에 온전히 쥐어지는 날이 오기를, 끓어오르는 분노와 참담한 슬픔을 담아 이 기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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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의 문장을 적어 내려갈 때마다,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한 돌덩이 때문에

몇 번이나 호흡을 고르고 키보드 위에서 손을 멈춰야 했습니다.

굶주리는 내 아이를 배불리 먹이고 싶다는 그 눈물겨운 사랑이,

가족을 짓누르는 가난을 내 두 손으로 끊어내겠다는 그 숭고한 책임감이,

어떻게 이런 참혹한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섭씨 50도의 살인적인 뙤약볕 아래서

고향의 가족을 떠올리며 마지막 숨을 헐떡였을 그 건장한 청년의 일그러진 얼굴이,

철저히 닫힌 문 뒤에서 매를 맞으면서도

행여나 쫓겨날까 봐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을 그 여성의 떨리는 어깨가

잔상처럼 제 눈앞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고 소비하는 문명과 발전의 이면에는,

이렇듯 언제나 이름 없이 스러져간 이들의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카팔라'라는 이름의 합법을 가장한 이 노예 제도는 결코 중동만의 지역적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에 취해 인권을 지워버린 인류 전체의 수치이자 씻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부디, 저 화려한 마천루의 불빛과 오일 머니에 눈이 멀어

가장 어두운 바닥에서 들려오는 이 슬픈 절규를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가 이 끔찍한 진실에 눈 감지 않고 함께 분노해 줄 때,


비로소 모래 속에 묻힌 그들의 억울한 영혼에 아주 작은 위로의 바람이라도 가닿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국의 차가운 모래땅에서 숨을 거둔 모든 이주 노동자들의 명복을 가슴 깊이 빕니다.


Written By Yooda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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