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통제를 처음 만들다

하룻강아지 멍부

by 이대팔

한때 유행처럼 사람들의 공감이

많았던 이야기가 있었다.

사람을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때,


똑똑한데 부지런한 유형 (똑부)

똑똑한데 게으른 유형 (똑게)

멍청한데 부지런한 유형 (멍부)

멍청한데 게으른 유형 (멍게)


조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멍청한데 부지런한 유형이라고 했다.


조직의 미션이나 전략방향을 알지

못한 채, 본인이 한 일이 어떤 여파를

불러올지 모르고 실행에만 집중하여

되려 조직을 망치는 유형이다.


아래는 초급자로서 부지런했지만
어쩌면 조직을 위태롭게 했던 건
아니었는지 뒤늦게 반성하게 되는
나의 일화다.



대리직급으로 조기승진 후
나름 뭐 좀 안다고 설치던 시절에,


매달 회계 마감을 했지만
현업 부서의 협조는 늘 부족했다.


현업자료는 늘 늦게 넘어왔고,

본사 마감기한을 지켜야 하는

우리 팀은 마감기한에 쫓겨 야근하기

일쑤였고, 그나마 기한 넘기지 않고

개고생해서 제출하여 보고하고 나면
집계된 숫자는 자주 바뀌었다.


모회사 팀장은

“왜 숫자가 매번 바뀌냐”라고
자주 컴플레인을 했다.


우리 팀과 기획팀이 협업하여 마감집계를

하고 집계된 자료를 보고하는데 우리 팀

과장은 회계감사 때마다 허둥지둥 대는

일못러였고, 숫자집계에 오류가 잦았다.

기획팀 과장은 마감집계가 늦어지면

우리 팀의 자료를 기다리지 않고

대략 추정치로 보고기한을 지켰다.


이러다 보니 보고자료의 숫자가

다음 달에 가면 자주 바뀔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현업부서는 마감기한을 지켜야 하고

안 지키면 불이익이 따르다는 '마감기강'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했다.


회계(재경)팀은 집계된 숫자를 빠르게

검증하고 확인할 지식과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


나랏돈도 아니고, 우리 회사돈을 내고

외부감사를 해주는 회계법인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외주용역업체일 뿐인데

왜 그런 회계사에게 쩔쩔매는지

어린 마음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서 내에서 제대로 검토와 승인이

되지 않은 채로 제출된 현업부서가

원천적인 문제가 있으나 이에 대한

지적을 받는 게 아니고 왜 우리 팀이

항상 욕을 먹고 타박을 들어야 하는지

주니어였던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월별로 마감기강을 잡고
현업에서 제대로 자료를 제출하게
프로세스를 만들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불만이 있었다.


월례조회 날, S그룹 품질임원 출신

대표님의 훈시말씀 중에
QMS(Quality Management System)

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며 말씀하셨다.


“품질은 계획(Plan)하고,
실행(Do)하고,
점검(Check)하고,
개선(Act)하는 겁니다.
이러한 PDCA사이클이

반복되면서 시스템이 됩니다.”


그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아… 이걸 회계에도 적용하면 어떨까.’


나는 품질 PDCA 구조를 빌려
부서별 제출해야 할 자료목록과

마감 일정계획을 세우고(P)

자료요청 및 마감일을 공지한 후

제출일과 지연일을 집계해(D)

제출지연과 수치의 오류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다(C)

이렇게 내부통제의 기본 틀을

정립하고, 반복되는 회계감사에서의

지적사항을 마감자료에 요청한다(A)

PDCA를 회계마감의 내부통제로

적용해 연결된 개선안을 만들었다.


팀장님께 조심스럽게 보고 드렸다.

팀장님은 비시시 웃으시더니


“그거, 네가 해봐라.
김과장 말고, 네가.”


사수인 김과장이 하던 일이었는데

부사수인 나에게 지시하시니

어깨에 뽕이 가득 들어갔다.


그날 이후
나는 막내라는 신분을 잊고
회사를 돌아다니며 마감일정을

알려주고, 중요성을 역설했다.

지연제출이나 오류시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지난달 마감은 이번 5일 오전까지로
정했습니다. 지켜주셔야 합니다.”


“숫자가 바뀌면 사유서 제출해 주세요.
회계감사 때 문제됩니다.”


“이번 달부터는 체크리스트로
검증하고 넘겨주셔야 합니다.”


마치, 학급반장 완장을 차니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으쓱거리는 뽐새로,

어조는 강했고,
속도는 빨랐다.


뒤에서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리 주제에 뭐 저래.”

“재무팀이 왜 저렇게 까칠해.”

“김 과장도 아니고 막내가
나대는 거 봐라.”

뒷담화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데도
나는 총대를 메고 뛰었다.


결과적으로 프로세스 문제는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회계감사 지적도 줄었고
월마감 품질도 안정됐다.


모회사 팀장의 컴플레인도
점차 줄어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럽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던 시절.
말 그대로 ’멍부’였고
주변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만든 절차가
누군가에게는 강압적으로 느껴질 수도,
누군가에게는 부담이었다는 것을.


팀장 뒷배만 믿고 우격다짐으로

각 부서나 담당자에 설득과정 없이

강하게 리드만 하였다.


기한준수 '기강'을 잡아야 한다는

혼자만의 소신으로 나 혼자

일을 잘한다고 착각에 빠졌었다.


그저 “이게 맞으니까”
“이렇게 해야 하니까”라고
밀어붙이기만 했을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나마 작은 개선 성과가 나오게 된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전부 주변 덕분이었다.


팀장님의 권한부여
“김 과장 말고, 네가 해봐라”

그 한마디가 내게 권한을 줬고,
너무 일찍 책임을 느끼며 일했다.


팀장님의 방패막이
현업 부서에서 불만이 올라올 때마다
팀장님은 “제가 시킨 겁니다”라고
나를 보호해 주셨다.


타 부서의 은근한 도움
겉으로는 투덜거렸지만,
기획팀 대리님은 슬쩍
“이렇게 하는 게 나을 거야”라며
조언을 해주었고,
영업팀 과장님은

“우리 팀 애들한테 내가 말할게”라며
협조해 줬다.


여러 사람들의 덕분에

나는 생애 처음으로 권한에 없는
‘내부통제’ 절차를 만들 수 있었다.



몇 년 뒤,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상황을 만났을 때,
나는 예전의 나처럼 하지 않았다.


절차를 만들기 전에
현업 담당자들을 먼저 만났다.

“이 부분이 왜 어려운지 말씀해 주세요.”
“어떻게 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실행하기 전에 경청했고,
밀어붙이기 전에 협의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절차는 더 빨리 정착됐고,
사람들의 반발도 훨씬 적었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내부통제는
’옳은 것’을 관철시키는 게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다.


프로세스는
강제로 심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따르게
설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가끔 신입 직원이
“이렇게 개선하면 어떨까요?”라며
기획안을 들고 올 때가 있다.


대부분은 이미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들이고,
일부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들이다.


나는 비시시 웃으며

어릴 적 나의 '멍부'의 모습을 떠올린다.

내가 세상물정 모르고 부지런히

휘젓고 다닐 때 그때의 팀장님의

그 웃음처럼.


하지만 나는 절대
“그건 안 돼” 또는
“이미 해봤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좋은 생각이네요.
그런데 이 부분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그리고 함께 고민해 준다.


지나고 보니 어쩌면

그 ’멍부’같은 시절이
내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때의 무모함이
지금의 성숙한 나를

만들었던 초석이었다.


CFO 실전노트 – 한 줄 정리

내부통제는
’옳은 것’을 관철시키는 게 아니라,
’함께'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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