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인정
매월 마감체계가 안정되어 가고
내부통제가 조금씩 자리 잡아가면서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더 많은 일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나는 현업부서의 증빙 하나하나를
세무조사를 받아본 경험으로,
회계감사 지적 사항과 대조하고,
팀장님이 남겨주신 피드백 메모까지 챙겨
이전보다 훨씬 집요하게 검토했다.
서류 하나하나를 꼼꼼히 체크하다 보니
서류더미가 쌓이기 시작했고,
추가적인 일이 몰려 또다시
서류는 더 쌓여갔다.
그때의 나는,
서류더미를 빨리 쳐내는 것보다
‘회사를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현업의 부정과 문제를 찾아내고
회사의 비용을 절감하겠다는
사명감이 더 중요했다.
어느 날,
국내영업팀 김차장님이 올린
지출결의서와 카드 증빙을
검토하다가 눈이 멈췄다.
금액은 5만 원.
비목은 고객사 접대비.
그런데 카드 명세서에 적힌 상호명은
‘주유소’였다.
순간, 의심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팀장님의 신뢰를 등에 업고
꽤 기세등등하던 시기였다.
팀장님은 평소
“회계팀원은 타 부서 팀장과 동급이다”
라는 말로 우리를 자주 독려하셨다.
어린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래서 직급이 한참 높은 김차장님을
내 자리로 불러 세웠다.
“기름 넣고 접대비로 올리면 어떡합니까?”
괜히 목소리까지 높였다.
일도 많은데 그 많은 서류더미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는 피곤함이 가득한데
이렇게까지 눈속임을 한다는 것에
사실 짜증이 많이 났다.
“고객사 미팅 끝나고 정문 앞에서
고객들이랑 맥주 한 잔 한 거야.
그 집 이름이 한문으로 주유소야.”
김차장님은 영업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의 나는,
서글서글한 김차장님의 미소가
자신보다 직급과 나이가 어린 나를
속여보려는 음흉함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서류가 가득 쌓여있는데
내가 이런 것까지 찾아낼 줄 몰랐겠지'
적은 금액이지만, 부서의 음흉한
비위를 찾아낸 나름의 뿌듯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시나브로 올라왔다.
출장 키로수를 늘려 청구하다가
적발된 과거가 있었고,
가짜 간이영수증을 올리다
몇 번 지적받은 사례가 있었던
김차징님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쉽게 그를 믿을 수 없었다.
물론, 당시 김차장님을 위시한
국내영업팀은 부족한 부서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간이영수증을 가짜로
작성해 부서경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회사차가 지원되지 않다 보니
개인차량으로 영업을 다니며
주유비를 실비로 청구해 받았다.
그렇지만, 개인차의 업무사용에 따른
감가상각 (개인차량의 업무사용으로
인한 키로수 증가로 향후 개인차량의
중고차 가치가 감소되는 개인 손해분)
이나 엔진오일비용에 대한 지원을 회사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부서불만이
팽배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조정하거나 결정하는 위치가 아니었고
내 임무는 증빙을 체크하는 것이었다.
“영수증에도 주유소라고 쓰여 있잖아요.
세무상 문제 되고, 회계상 인정도 안 됩니다.
이건 반려입니다.”
그러자 김차장님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퇴근하고 나랑 같이 가보든가.”
“좋습니다.
야근해야 하지만 (내가 특별히) 가보죠.”
내가 큰소리치며 대꾸하자,
김차장님은 다시 피식 웃으며 조건을 걸었다.
“이따 가서
기름 넣는 주유소가 아니라
진짜 맥주집이면 네가 술 사라.”
영수증상에 주유소라는 세글자만 있고
00주유소처럼 브랜드 이름이 없어서
내심 김차장님 말에 수긍이 되었다.
그렇지만,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신념으로
그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그의 음흉함과 비위를 내가 직접
밝혀내서 이런 문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사명감만이 가득했다.
그날 저녁,
야근하던 손을 멈추고
지출결의서와 영수증을 챙겨 들고
비장한 마음으로 김차장을 따라나섰다.
혹시 다른 곳으로 데려갈까 봐
김차장의 차량네비에 찍힌 주소와
영수증에 적힌 주소를 힐끔힐끔
곁눈질로 대조했다.
한참을 달려, 어둑어둑해진
고객사 공장 맞은편에 도착했다.
"저기가 그 장소야.
내 말이 맞지?"
정차된 차 안에서 차창을 내리고
김차장님은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나는 알겠다는 대답대신,
차에서 내려 간판을 확인하고
영수증, 카드명세서의 주소와
벽에 붙은 주소까지 일일이
대조하며 확인했다.
혹시 몰라,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가 마치 수사반장에
나오는 수사관이라도 된 것처럼,
계산대쪽의 영수증 몇 장과
벽에 걸린 사업자등록번호까지
대조해 가며 추가로 확인했다.
영수증에는 한글 ‘주유소’.
간판에는 한문 ‘酒流所’.
술이 흐르는 곳.
그곳은 분명 술집이었다.
뒷 쪽에서 비시시 웃으며
주차하고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김차장님이 보였다.
"거봐, 내 말이 맞지?
사람말을 왜 이렇게 못 믿어?
이리 와서 어서 술사라"
이미 떠들썩하게 손님이 차있던
술집 안의 한쪽 테이블 의자를
꺼내 자리를 잡으며 김차장님이
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맞네요.
확인했어요"
나는 김차장님에게 사과했다.
정황만으로 의심하였고
그의 과거의 행적만으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사과를 하고 나서야
그가 나보다 10살 가까이
나이가 많다는 사실에
더욱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그는 괜찮다며 쿨한 표정으로
먹성좋게 안주와 술을 시켰다.
나는 군말없이 푸짐하게 술을 대접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대기업 평택 L사 근처를 지날 때면
그 ‘주유소’가 문득 떠오른다.
그때의 나는,
사내 경찰처럼 올곧은 일을 한다는
사명감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증빙을 대하는 태도는 있었어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부족했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단정했다.
팀장님이 준 권한을
마치 완장처럼 휘둘렀다.
권한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회계절차와 투명한 내부통제는
책상 위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현장을 이해하지 못한 규정은
신뢰를 얻지 못한다.
그날의 경험으로 나는 배웠다.
*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
* 상대가 나보다 더 많은 현장상황과
맥락을 알고 있을 수 있다는 것
* 규정보다 먼저 사람과 현장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 설사 문제가 있더라도
상대에 대한 존중을 지켜야 한다는 것
소명의식으로 열심히 한 것이지만
술 값은 개인돈으로 지불해야 했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셈이다.
하지만 그 어떤 교육보다
오래 남는 교훈이 되었다.
CFO 실전노트 – 한 줄 정리
내부통제의 시작은 ‘의심’이지만,
완성은 ‘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