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라는 단어에 관하여
'꼰대'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한 때 X세대라고 불리며 기성세대가 정해 놓은 규칙을 깨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DJ DOC의 노래 가사처럼 청바지 입고 회사에 가고, 반바지 입고 학교에 가면 안 되냐고 주장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가사처럼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다고 외치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런 X세대도 나이가 들었고, 과거에 있던 이야기를 하면 꼰대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물론 모든 이야기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아들과의 대화에서도 자신의 가치관과 다르거나, 듣기 싫은 소리를 할 때 꼰대라는 단어가 나온다. 역사는 경험을 이야기하며 흘러왔다. 현재와 과거는 다르다. 그래도 과거를 보며 현재를 살고 미래를 준비한다. 세대 차이 혹은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과 다르게 과거의 이야기가 불편할 때가 있다고 해도 피할 필요가 있을까. 반면교사라도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이나 선생님을 비하하는 학생들의 은어로 최근에는 꼰대질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원에 대해서는 영남 사투리인 ‘꼰데기’와 프랑스어 ‘콩테(Comte)’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꼰대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논리적인 사고가 이성적인 이미지라면 기분에 따르거나 감각에 따르는 것은 감정적인 이미지이다. 이성과 이성이 충돌할 경우 논리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고, 이성과 감정이 충돌할 경우엔 감정싸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감정과 감정이 충돌할 경우엔 답이 없다. 감정싸움은 어느 한쪽이 이해하거나 양보해야만 싸움이 끝난다. 칼 융은 자신의 의사 생활 동안 한 번도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상호를 이해하는 과정은 집단적인 어리석음에 맞추는 결과라고 했던가. 이성과 감정이 충돌하면 역시 상대를 이해하거나 양보해야 하고 자신의 기대보다 낮은 기준으로 맞춰야 한다. 이러한 이해나 양보는 개인의 인격발달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도 한다. 펼치고 싶은 꿈이나 욕망이 이해와 양보의 이름으로 포기된다는 이야기다. 인간관계에서 어떤 한쪽이 무조건 이성적이거나 다른 한쪽이 무조건 감정적인 경우는 없다. 상황마다 이성적이기도 하고 감정적이기도 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 대 이성, 이성 대 감정, 감정 대 감정, 감정 대 이성의 상황을 반복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꼰대'라는 느낌이 드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이성 대 이성, 이성 대 감정, 감정 대 감정의 대립일까?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기성세대에서 내려오던 문화를 강요할 때 거센 저항의 느낌이 들었다. 그게 합리적이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한 경우에 말이다. 35도가 넘는 한 여름, 에어컨도 없던 고등학교 교실에서 50명이 넘는 남학생들이 3교시 체육을 마치고 4교시 수업에 들어갔다. 50명이 넘는 남학생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수업 시작종이 울렸지만, 교복으로 갈아입지 않고 체육복을 그대로 입고 있는 학생이 많았다. 4교시 수업을 담당하는 선생이 들어와서 소리친다. "아니, 지금이 체육 시간이야! 아직도 체육복을 입고 있는 사람 나가서 엎드려!" '꼰대'라고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차라리 복도가 시원하다며 엎드려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야 마음이라도 편했다. 수업시간에 교복을 입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여름 교복이 정말 반바지이면 안 될까. 체육시간 이후엔 체육복을 입고 수업을 들으면 큰일이라도 날까. 어릴 적 저항했던 것은 '불합리'였다.
소통 중 '합리'와 '불합리' 사이에는 어떤 문제가 존재할까? 아마도 배경지식 혹은 인식에 관한 차이가 주요한 문제일 것 같다. 수업시간에 교복을 입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더울 땐 체육복을 입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충돌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합리는 누군가의 불합리이다.
*1961년 2월 9일 동아일보에서는 꼰대를 '영감 걸인'을 가리키는 걸인 집단의 은어라고 썼다.
*1966년 3월 8일 동아일보에서 연재한 통속소설 〈서울은 만원이다〉에서는 꼰데가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1966년 12월 24일 경향신문에서는 꼰데가 당시 탈선 10대들이 '아버지'를 가리켜 또래 사이에서 쓰는 은어(자기들의 속어)라고 썼다.
*1970년 11월 13일 경향신문에서는 꼰대가 "KBS 연속극 〈수다스런 계절〉에서 선생님을 낮추는 말로 사용된 후 급격히 어린이 사회에 유행되고 있다"고 매스컴의 영향을 지적했다.
-위키백과
불편한 지점이 발생하는 이유는 자신이 정해둔 정의(正義)에 혹은 가치관에 반대하는 주장을 만날 때가 아닌가. 개인주의, 능력주의, 금융자본주의 등의 이념은 타인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더해주었다. 시간 부족 현상을 느끼면서도 시간이 날 때라도 만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갑자기 시간이 나더라도 만나고 싶은 상대가 나를 만나줄지, 다른 일정이 있을지, 갑자기 연락하면 기분 나빠하진 않을지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도 부족한데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만나서 굳이 피곤한 일을 늘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꼰대'는 피곤한 사람을 피하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아들의 친구들이 집에 저녁 식사를 하러 왔을 때 '꼰대'라는 단어 뒤에 숨지 말라는 이야기도 한 적이 있다.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더라도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같지 않겠냐고 말이다. 나도 어릴 적엔 어른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다. 시간이 지나서 잔소리의 의미를 이해하니 '꼰대'가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른이 되면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꼰대가 된다. 아니면 일찍 철이 든 사람도 꼰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이들 앞에서 '꼰대'라는 단어에 대항하는 단어를 찾고야 말겠다는 다짐도 했다. 아직은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해주는 사람만 찾아다니며 만나는 것이 정답이 될 수 있을까.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던 중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얼굴이 예쁜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살면서 단 한 번의 거절도 경험하지 못하고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남성에게 사귀자고 제안했는데, 그 남성이 거절을 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다. 다양한 상황을 만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다양한 학습에 관한 사항은 결코 가볍지 않아 보인다.
꼰대는 공감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교육의 차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교육을 받더라도 모두 같은 학습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교실에서 같은 선생님에게 같은 내용으로 교육을 받아도 각자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다른 시대에 다른 교육을 받은 상황에서는 어떨까? 교육으로 인한 생각의 차이는 너무도 당연할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가 '근대', '현대' 혹은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식으로 구분해서 이야기할 때엔 개개인의 차이를 따지지 않는다. 근대 교육을 받은 사람이 현대 교육을 받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로 현대 교육을 받은 사람이 근대 교육을 받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가족 간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한 걸 보면 '꼰대'는 교육이 낳은 산물일 수도 있다. 꼰대 소리를 듣기 싫다고 굳이 억지 공감을 하고 싶지 않다. 특별한 관계가 없는 사람이 어떤 소리를 하든 '그럴 수 있지.'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강한 관계라면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이야기를 강조하게 된다. 수십 번 고민해도 여기에서는 공감의 문제라기보다 방향의 문제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문제는 '올바른 방향' 혹은 '나은 방향'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상대가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조언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꼰대 취급을 받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이롭지 않다. 하지만, 말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영화 아바타처럼 꼬리를 연결해서 상대의 마음을 알 수도 없다. 난 다른 사람의 경험을 듣는 것이 즐거울 때가 더 많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타인의 경험을 듣는 것을 불편해한다. 나이, 성별을 떠나 자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점점 어렵게 느껴진다. 더불어 '꼰대'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말을 피하는 경우도 늘어나는 것 같다. 세상에는 무엇인가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인터넷에서는 정보와 소식이 넘쳐나고 있어도 막상 만나서 나눌 이야기 없이 휴대폰만 보다가 헤어지는 시기에 '꼰대'라는 단어가 거대한 담벼락이 되어 소통의 단절을 양산하는 것은 아닐지도 생각해본다.
유병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