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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에 관하여

소설) 엇박자D (김중혁)

by 유병천


세상에는 여러 개의 가치가 존재한다. 다름을 다름으로 인식하지 않고, 틀림으로 인식하는 순간, 충돌이 발생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자유와 억압이라는 주제는 여러 방면으로 다루어져 왔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나오는 이야기처럼 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공개 처형이 이루어졌던 시대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최대한 잔인하게. 이 때 지배자들이 심어주고 싶은 것은 공포다. 즉 두려움을 심어주어 통치를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산업화 사회 이후에는 처벌의 방법도 달라진다. 공개보다는 비공개, 외면보다는 내면의 두려움을 만드는 것이다. 요즘은 사형제도가 없어진 나라도 있고, 있다고 하더라도 비공개적으로 약물을 이용한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왕이 최고였고, 벼슬을 하는 사람, 장사를 하는 사람, 농사를 짓는 사람 등 계급이 뚜렷했던 사회였다. 이 시대의 다름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천민이 양반이 되고자 하는 것은 반역이오, 정치적으로 다른 생각을 품는 것은 역모였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고, 급속도로 산업화된 사회를 건너, IMF 사태를 이겨내고, 다름을 인정해야 하지 않나? 김중혁의 엇박자D는 <다름>에 관한 이야기다.


"단장. 이거 네 목소리 아냐? 모두 멈추고 단장 혼자 불러봐."
엇박자 D의 노래는 들어줄 만했다. 부드러운 느낌도 잘 살아있었고, 박자도 이상하지 않았다. 음악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하긴 한데 어느 부분이 어느 정도로 이상한지,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답을 말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위 문장에서 말하듯 그렇게 다를 뿐이다. 세상을 100의 속도로 달리는 사람도 있고, 10의 속도로 기어가는 사람도 있고, 50의 속도로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메트로놈 을 50으로 맞추고, 그보다 빠른 사람, 그보다 느린 사람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마라토너에게 100미터 선수처럼 뛰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것과 같다.


화가 난 음악선생은 반주를 멈추게 했다. 아이들도 노래를 멈췄다. 하지만 눈을 감은 엇박자 D는 멈추지 않았다. 음악선생이 그에게 다가가 빰을 후려쳤다. “야 이 새끼야, 부르지 말란 말이야. 입 다물어, 입 다물어!” “입 다물어”에 리듬을 맞춰 뺨따귀를 두 대 더 올려붙인 음악선생은 화를 삭이지 못하고 무대 뒤로 사라졌고, 우리들도 무대를 내려왔다. 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엇박자 D 혼자 무대에 서 있었다.


과거의 처벌 형태는 지금도 남아있다. 그렇게 공개 처벌을 당한 엇박자 D의 마음에는 상처가 남는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엇박자다. 스스로가 엇박자가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이렇게 자신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잣대가 작고 강할수록, 많은 적을 만들게 된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상상해보면, 정해진 규칙, 즉, 악보를 가지고 각자의 연주를 한다. 정해진 규칙대로 연주하지 않는 악기가 있다면, 그 공연은 끔찍할 것이다. 물론 엇박자 D의 합창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어떤 곡으로 할까요?’라는 질문에, 고민도 하지 않고, 구성원을 고려하지도 않는다. 노래를 고를 때, 연습을 할 때, 속도에 관한 배려는 전혀 하지 않았다. 조화보다는 규칙이 우선한다. 많은 삶의 모습들이 이러한 규칙에 묶여있다. 『다모』라는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넌 왜 길이 아닌 곳으로 가느냐?’
‘길이란 게 어디 있소. 처음엔 길이 아니더라도 한 사람, 두 사람, 그렇게 계속 가다 보면 그게 길이 되는 것, 아니겠소.’


기억에 의존해서 정확한지는 몰라도, 비슷한 대사를 했던 것 같다. 어떤 시대에는 다름이 죽음으로 연결된다.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화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조화로운 선물을 준다.


“22명의 음치들이 부르는 20년 전 바로 그 노래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치들의 목소리로만 믹싱한 거니까 즐겁게 감상해줘.”


유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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