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은 늦을 수 있지만, 헛되지 않다.
새벽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금요일이었다.
투명한 우산 위로 부서지는 물방울들은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저녁 7시의 어두운 회색빛 하늘 아래, 나는 입학설명회가 열리는 건물 앞에 서 있었다.
8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유난히 낯설어 보였다.
젖은 셔츠 깃, 축축해진 가방 끈, 그리고 평소보다 도드라진 주름.
마치 지금 이 순간이 내 나이를 고스란히 드러내려는 듯했다.
강의실 문을 열자, 마치 폭우를 피해 숨어든 작은 동굴처럼 공간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앞줄에는 교복 차림의 소년들이, 중간에는 딸 대신 노트를 펴주는 어머니가, 구석 자리에는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무심하게 휴대폰 화면을 훑고 있었다.
나는 빈자리를 찾다 단발머리의 입학담당자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비어 있는 앞자리에 앉았다.
곧 설명회가 시작되었다.
스크린 위에 펼쳐진 프레젠테이션은 웹사이트에서 이미 본 정보들에 불과했지만, 내 관심은 그 너머, 공기 속에서 스며드는 감정에 있었다.
불안과 설렘이 뒤섞인 감정들이 강의실을 채우고 있었다.
의례적인 학교 설명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작은 목소리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합격 포트폴리오는 보통 몇 장인가요?”
“매년에 몇 명을 뽑나요?”
목소리에는 꿈을 향한 열정뿐 아니라, 아직 다가오지 않은 좌절에 대한 두려움도 묻어 있었다.
나이는 달라도, 이곳에 질문을 안고 온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이 신입생이었다.
이후, 졸업생 포트폴리오가 공개되었다.
한 장에는 마치 소매가 뜯겨 나간 듯한 재킷의 드로잉이 있었고, 옆에 달린 짧은 메모가 눈길을 끌었다.
“내가 사랑하는 도마뱀”
본인이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도마뱀의 느낌을 옷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포트폴리오의 앞부분에는 도마뱀의 어느 부분을 좋아하는지 이미지와 함께 간략한 메모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 본인이 좋아하는 부분의 느낌과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 과정이 오롯이 포트폴리오에 담겨있었다.
학생들의 포트폴리오는 실험실의 연구노트와도 같았다.
그 속에는 내 아이디어를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는 집착, 열정, 그리고 고독한 싸움이 서려 있었다.
나는 불현듯 스스로에게 물었다.
서른여섯의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익숙한 삶을 내려놓고, 왜 다시 학생이 되려는 것인가.
머릿속에는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좌절과 시행착오가 스쳐갔다.
그러나 동시에, 심장이 기분 좋게 뛰고 있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끝없는 고민과 싸움을 통해 나만의 색을 찾게 될 것이다.
설명회가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는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다.
촉촉하게 젖은 거리, 그 위에 내려앉은 밤공기가 폐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방금 본 포트폴리오들을 떠올렸다.
오늘 내가 얻은 것은 절차와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과 열정이 뒤섞인 ‘젊음’의 얼굴이었다.
입학설명회를 통해 내가 선택한 길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와보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