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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Jun 14. 2023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너만 모르는 너의 리듬

230606 미야케 쇼 감독 내한 아트나인 GV


“재능은… 없어요. 작고, 리치도 짧고. 스피드도 느려요. 코치의 지시도 들을 수 없어요.
하지만 인간적인 기량이 있어요. 정직하고 솔직해요. 좋은 아이입니다.”

미야케 쇼 감독이 만든 코로나 시대의 필름 영화. 주인공 케이코는 선천적 장애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어린 복서다. 그는 미야케 쇼의 전작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인물들을 조금씩 떼어다 붙여서 만든 듯해 보인다. <너의 새…>의 시즈오처럼 속을 알 수 없고 말수가 아주 지나치게 적고 눈이 깊은 사람. 사치코처럼 변덕스러워 보일만치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 들었는데 못 들은 체하고, 깨 있었는데 깨 있지 않은 척할 수 있는 ‘나’처럼 ‘솔직하고 기분 좋은 공기 같은’ 사람. 그런 케이코라는 비청인 여성을 통해 표현되는 것은 미야케 쇼가 사랑하는 인간의 정수다.


케이코를 읽을 때 가장 빠르게 감지되는 정동은 의외로 분노의 코드다. 계단에서 부딪혀온 아저씨가 ‘싸가지 없는 년’이라고 욕할 때 화난 채 발을 쿵쿵대며 걸어가고, 경기 중 발을 밟혔지만 빠르게 항의할 수 없어 억울해 펄펄 뛴다. 다니던 체육관이 코로나를 견디지 못하고 긴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는 통보를 듣던 날 ‘받아들일 수 없다. 분하다’라고 일기를 쓰고, 새 체육관에서 집이 먼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무심한 청인들에게 정확히 설명할 수 없어 체념한다. 작고 어리고 장애가 있는 몸에 수십 년 간 켜켜이 쌓였을 화를 짐작케 만드는 장면들이다.

“때리면 기분이 좋아”서 복싱을 한다는 섬찟할 정도로 솔직하고 단순한 이유에도 즉각 감응할 수밖에 없다. 어린-여자이기 때문에 ‘더’ 당했던 순간을, 무엇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해 팽팽해지던 신경을, 길바닥에서 만난 무례를 흠씬 패주고 싶던 분노를 나 역시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케이코를 담는 영화의 태도는 케이코에 대해 관장이 내린 평가를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정직하고 솔직한 시선, 느리지만 인간적인 기량의 카메라. 미야케 쇼가 그려낸 케이코는 멋있고 영웅적이고 입지전적인 인물이 아니다. 케이코는 호오와 취향이 분명하고 화가 많은 보통의 여자다. 다만 귀가 들리지 않을 뿐이다.

(첨언하자면 이 무던하고 평범한 인물과 영화를 두고 ‘신선한’ ‘예상치 못한’ ‘그간 없었던 형식의‘ 장애에 대한 묘사라며 호들갑 떠는 엇비슷한 평가들은 오히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장애-와 그것을 이야기하는 서사의 방식-에 대해 제한되고 고정된 상만을 인정해 왔는지 보여주는 것만 같다.)

케이코는 평범하고 끈기 있게 자기 일상을 꾸려가는 생활인이자 운동인이고, 그 옆을 채우는 청인들 역시 때론 무심하고 때론 최선을 다해 다정할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다. ‘겨우‘ 거리 때문에 관장님이 어렵게 마련해 준 새 체육관의 자리를 마다한 케이코에게 “정말 실망이다”라고 소리 지르고 자리를 뜬 코치 마츠모토는, 얼마 후 프로 경기에서 케이코의 이마 상처를 조심스레 닦아준 ’맛짱‘이기도 하다. 잔인하고 냉혹했던 경기의 상대 선수는 얼마 후 우연히 마주친 케이코에게 “그때 감사했다”며 작업복 차림에 상처 난 얼굴로 정중히 인사한다. “프로가 됐으니 이젠 만족하라”라고 걱정하던 어머니는 동생의 혼혈 여자친구 하나와 함께 케이코의 무관중 경기를 두 손 맞잡고 떨며 시청한다. 이전보단 차분하고 단조로운 구성이지만,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뻣뻣하고 못나고 찌질한 조연들까지 결국 사랑하게 만들었던 미야케 쇼의 재주가 건재하단 걸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관계와 감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공간성-건축을 통해 말하는 감독이 코고나다라면, 비슷한 느낌의 인간미를 미야케 쇼는 청각-음향이라는 하나의 세계로써 표현하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미야케 쇼는 이전부터 능숙하고 화려한 소리의 운용을 통해 관객을 사로잡아왔다.


<너의 새…>에서 사치코와 ‘나’ 사이에 처음 무언가가 흐를 때, 영화는 잠시 모든 사운드를 끊고 완전한 적막 속에 ‘나’를 위치시켰다가 사치코의 의도를 생각하게 만들면서 다시 소리의 세계로 그를 복귀시킨다. 어리둥절했던 에모토 타스쿠의 얼굴이 어떠한 기대를 품게 되는 순간 그것은 (당연하게도) 특별한 감정의 시작을 암시하고, 이와 동시에 관객의 귀에 약 3초간 정지당했던 거센 바람과 온갖 소리들이 밀려들어 오는 것이다.

또 사치코가 외롭고 혼란스러운 오후를 겪으며 점차 ‘나’에게서 멀어질 때, 그가 불러낸 약속 상대의 정체를 우리는 얼굴을 보기도 전에 알 수 있다. 시즈오가 등장할 때마다 나온 그의 테마곡이 시즈오의 얼굴이나 말소리보다 먼저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사치코가 시즈오를 알아가며 ‘나’를 떠나게 될 것을 쓸쓸히 은유하는 이 순간적 전환 역시 미야케 쇼가 음향을 갖고 부린 마법의 효과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역시 오프닝씬의 복싱장부터 너무나 아름답고 리드미컬한 여러 소리를 전시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인물이 막상 그 소리들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줄곧 의식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케이코가 들을 수 없는 소리에 케이코의 주변인과 관객만 넘치도록 젖게 만든다. 전차 소리, 행인의 욕하는 소리, 알람 소리, 코치의 지시, 경찰관의 걱정하는 말소리까지. 이렇게 의도적으로 배제적이고 압도적으로 풍요로운 소리들은 역설적으로 케이코의 고요, 케이코가 세계를 감각하고 대응하는 방식을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알 수 없는 것을 한 번이라도 더 상상하게 만드는 고집스러운 요구. 내게는 그것이 미야케 쇼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점이다.





아래는 6/6 메가박스 아트나인에서 진행된 미야케 쇼 감독과의 시네마구구 GV.

- 모더레이터 김현민 기자와 관객의 질문과 감상평

— 미야케 쇼 감독의 답변

으로 정리하고 순서와 워딩은 적절히 잘라내고 재구성함.

미야케 쇼 감독은 기대보다 훨씬 더 사려 깊고 정치적인 사람이었고, 김현민 기자는 근 3년간 가본 GV 중엔 가장 괜찮은 진행자였다… 심지어 통역사 분까지 완벽하셨음.



- 사람이 사람의 어떤 면의 끌리게 될 때는 그 당시 자기 자신의 어떤 상태 때문이기도 한데, 그 당시 감독이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이야기에 끌린 이유는?

— 나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면이 없다. 복싱 같은 스포츠는 너무 힘들 것 같았고 케이코 씨에게도 경외감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시나리오를 적는다는 것 역시 한 자 한 자 적어야 하는 꾸준한 작업이다. 오가사와라 케이코 역시 계속해서 사소한 것부터, 가장 쉬운 훈련부터 매일매일 꾸준하게 해 나가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팬데믹 불안 속에서의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나가는 평범한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얹었다는 얘기)


- OTT 시대의 필름 영화라 더 반갑다. 드라마였다면 대사로 처리해버렸을 수많은 장면을 조용하게 처리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우두커니 고립된 케이코를 더 잘 나타내기 위한 노력이 모두 시네마틱하다고 느껴졌다. 말하지 않아도 정서를 알게 한 순간들, 예를 들면 남동생과 대화하던 씬에서 그가 먼저 일어나고 케이코가 남겨지자 빈 의자를 3초 정도 더 비추는 숏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쓸쓸함이 느껴졌다.

— 빈 의자는 굉장히 공들여 찍은 씬이었는데 그 정서를 알아채준 첫 관객이셔서 몹시 감사하다.

영화는 시각만큼이나 청각, 음향을 통한 예술이기도 하지 않나. 보는 위치에 따라, 사람에 따라 모두 영화의 다른 면을 듣게 되는 면이 있다.


- 한 명의 이야기인척 하지만 실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조망이 나타나는 이야기다. 전작이 그랬듯 인간에 대한, 동료 배우에 대한, 자기 인물에 대한 애정을 숨길 수 없다.

- 회장과 기자의 인터뷰에서 창으로 비추는 빛은 매우 따뜻한 갈색이고 노스탤지어, 존경과 애정을 동시에 드러나는 빛으로 보이는 것처럼. (— 첫 필름 작업이라 빛의 방향이나 시간을 잘 설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보통 ‘복싱 영화’라고 했을 때 조연들이 다같이 응원하는 라스트씬을 상상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는데, 남다르게 탄생한 것 같다.


- 전철과 강둑 씬도 인상적이다. 필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찰랑찰랑한 빛의 구현이 가능했는지


— 필름의 영향도 크고, 사실은 가짜 전철을 만들어서 라이트 대용으로 사용했다. 농담이고 (ㅋㅋㅋ) 그건 예산상 무리라서 발광 장치를 따로 활용했다.


- 자막이 특이하게 표현된다. 케이코와 남동생의 첫 대화에서 수화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시차를 두고 검은 바탕 위의 흰 글씨만 보여주기도 하고, 케이코와 친구들이 이야기할 때는 아예 나오지 않기도 한다. 어떤 의도였는지?


— 자막이 있으면 관객은 아무래도 자막을 읽게 된다. 우리에게는 수어지만, 선천적 비청인들에게는 ‘모국어’인 그 언어를 자막으로 더럽히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눈치채셨겠지만, 친구들과 케이코는 대낮부터 맥주를 시켜놓고 상사 욕을 한다.

액션과 의미의 이해 사이에 시차가 발생하도록 하고 싶었다. 지금 이 GV의 통역처럼. 검은 배경의 자막이 뜰 때는 일부러 생활 소음 앰비언스 사운드가 끊기지 않도록 했다. 우리는 끊기지 않는 음향으로서 흘러가는 시간을 이해하지만, 비청인들은 정지된 화면일 때 ‘시간이 흘렀다’는 영화 내의 시제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영화의 서사성이 약한 편이기 때문에 더더욱) 이 영화 특유의 흐른다는 감각을 일부러 끊어버리는 것은 큰 모험이다. 하지만 그런 의도된 (시각적) 시차로 하여금 들을 수 있는 우리가 더 생각을 하게 하고 싶었다.

친구들이 수다 떠는 와중에도 케이코가 홀로 조용했던 것은 원래 그런 성격이기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케이코를 연기한 키시이 유키노 배우는 청인이기 때문에 실제 비청인인 타 배우들에 비해 수어가 그만큼 빠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캐스팅 단계부터 고민하기도 했다. ‘기회의 평등’을 위해 케이코를 청인보단 비청인 배우에게 맡기는 것이 맞다고 처음엔 생각했지만, 기획과 안전의 위험부담과 예산의 문제로 실패했다. 그렇다면 청인인 유키노가 마치 관객인 것처럼 네이티브 수어 사용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연출하는 게 존중의 의미로도, 캐릭터 정합성의 문제에 있어서도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 복싱장의 훈련 소음은 힙합처럼 들릴 때가 있고, 도시의 여러 소음 역시 리드미컬할 때가 있다. 관객인 우리는 들을 수 있지만 케이코는 들을 수 없는 수많은 소리가 있고 그것들은 ‘일부러 그렇게 고안된’ 사운드라는 느낌이다. 우리는 이 사운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


— 청인인 본인이 알 수 있는 감각으로부터 접근하면 된다. 음량의 고저보다는 소리의 원천을 신경 쓰며 설계했다. 화면의 안에서 들리는지 밖에서 들려오는지, 소리가 다가오는지 멀어지는지 정리하는 게 중요했다. 보는 것의 소리인지, 일치하는지 그런 것을 신경 쓰면서 보다 보면 케이코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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