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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Jun 22. 2023

<엘리멘탈>, 치워질 수 없는 것

'원래 거기에' 있던 사람들에게

* 23/06/22 여성신문 기사는 이 글을 바탕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디즈니픽사의 새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이 이주와 다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첫 장면부터 불 원소 가족은 배를 타고 새로운 대륙으로 이주해 낯선 원소 이웃들의 경계 섞인 호기심을 견딘다. 그들은 출입국 사무소에서 고국의 언어로 된 이름을 자랑스레 말하지만, 원주민이 이국적 발음을 어려워한단 이유로 졸지에 새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게토의 형성, 조상에게 올리는 절, 묘한 남아시아/라틴풍의 배경음악, 부모의 희생을 공경해야 한다는 의식까지 이민 2세대 한국계인 피터 손 감독의 뿌리는 곳곳에서 느껴진다. 딸에게 자신이 겪어온 것과 같은 차별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하며 ‘불에 물 타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엠버의 아빠 버니는 민족성을 잃지 않으려 하는 최초의 한인 타운 개척자로, 엠버의 연인이자 물 원소 인간인 웨이드는 정 많고 섬세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이주민 가정의 척박한 생존 방식을 곧잘 이해하지 못하는 순진한 백인 청년으로 봐도 좋을 법하다.


잠시 <엘리멘탈> 이전의 <미나리>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페어웰>을, <라이스보이 슬립스>와 <성난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어느새 아시안 아메리칸 2, 3세대가 쓴 다문화, 디아스포라, 가족주의 서사는 잘 아는 재료로 만드는 집밥처럼 익숙해진지 오래다. <엘리멘탈> 역시 최근 작품들의 계보를 따르는 동시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특유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해맑은 공식을 충실히 재연한다.

그러니 눈물 나는 다정과 낙관이 이 영화의 강점이라면, 모든 캐릭터가 (결국 가족을 이루기 위해) 쌍쌍이 짝을 이뤄 '귀여운 커플'이 되고 성애적 관계의 강력한 늪으로 흡수되는 낡고 강박적인 구성은 아쉬움을 자아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진부할 정도로 친근한 서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다. 왜 엘리멘트 시티의 그 어떤 주민도 댐이 터지고 운하가 넘친 근본적 원인인 ‘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가?

나처럼 유년기를 다채로운 애니메이션과 함께 한 디즈니 키드라면 처음 홍수의 원인이 밝혀졌을 때에 이미 결말을 다 알아버린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엠버와 웨이드가 큰 배로 야기된 재해를 도시에 알리고, 안전한 곳으로 항로를 틀어 문제를 해결할 미래가 빤히 보였으니 말이다. 물론 둘은 주민들의 안전을 지켜낸 영웅 부부가 되어 해로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무참히 빗나갔는데, 엠버와 웨이드가 ’절대로‘ 배의 존재나 방향성 자체에는 의문을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둑을 막거나 불 원소 인간들을 대피시키거나 정신적 지주인 푸른 불을 지키는 등 부차적인 방법만을 시도한다. 거의 고집스럽기까지 한 이 외면은 어쩐지 매우 의도적이고 정치적인 선언으로 보인다.

배는 계속 오가야만 한다. 배는 반드시 거기를 지나야만 한다. 설령 그 배가 말라있어야 하는 운하에 때아닌 홍수를 일으키더라도 엘리멘트 시티의 주민들은 임시방편만 생각하지, ‘배를 (최소한 그 쪽 길로는) 못 다니게 하자’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절대 내놓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그들에게 배는 ‘원래 거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를 ‘치우는’ 것은 영화가 원하는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는 엠버의 투지와 웨이드의 낙관으로조차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고, 곧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다. 배는 엠버의 가족이 이주해올 때도, 그 전 세대 이주민인 공기와 땅 인간들을 받아들일 때도 거기 있었다. 엔딩씬에서 엠버와 웨이드가 새로운 도시로 이주해 인생의 새 막을 꾸리러 갈 때도 배를 탄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배와 그 안에 탄 사람들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길 원하고 있다. 그러니까 <엘리멘탈>은 무언가 낯설고 때론 무섭기까지 한 것(즉, 기존 문화를 모조리 불태울 수 있는 일가족)이 계속해서 유입되고 이동하는 현상을 아예 거부할 생각조차 않겠다는 태도를 명확히 하기 위한 영화다.

들어온다면 받아들이라.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은 계속해서 옮겨다닐 것이고 더 나은 삶을 찾아다니는 건 모든 인간의 권리이며 당신은 눈에 익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거부할 권리 따위 갖고 있지 않다. 당신이 ‘거부할 권리’라고 착각하는 그것은 무지에서 비롯한 배척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자기 민족/인종의 영토’라고 여기는 곳은 거기 살기를 원하는 모두의 영역일 뿐이다.

이주를 침범으로 여기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를 재앙으로 여기며 무효화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이렇게 확고하고 올바른 제언 앞에서 달리 제시할 수 있는 반론은 없을 것이다.



아직도 리메이크된 공주 캐릭터의 인종과 외모를 가장 심하게 조롱하는 국가의 사람들, 놀라울 만큼의 인종적 동질성을 유지하는 사회에서 평생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한민족'이라는 환상을 자랑스럽게만 여기는 사람들에게 피터 손 감독의 이런 굳건함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다행인 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부감부터 먼저 익혀버린 이들이 수용하기에도 <엘리멘탈>은 그리 어렵지 않은 영화라는 점이다. 새 시대의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뜨겁게 일렁이는 불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 돌아볼 기회가 주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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