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Jul 03. 2023

<지구 최후의 밤>,
일 년 중 가장 짧은 밤



그 여자만 나타나면 난 알 수 있다. 또 꿈 속이라는 걸.
사람은 그게 꿈인 걸 알면 유체이탈처럼 영혼이 떠다니는 걸 경험한다.
난 꿈꾸는 동안 늘 의심한다.
내 몸이 수소로 된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내 기억력은 돌로 만든 게 틀림 없다.




카일리의 낮과 밤 같은 두 편의 영화. <카일리 블루스>와 <지구 최후의 밤>의 아름답고 누추한 장면들은 거의 화면 위로 난사되듯 등장해 일관성 없는 미스터리로 보이지만, 각 영화 안에서도 영화 간에도 묘한 대구를 이루며 변주된다.

사라지거나 죽은 여자,

갱도에서 죽은 남자(백묘와 이름 모를 노숙인),

부모의 부고 때문에 돌아온 고향 카일리,

잘못 전달된 유산 (<카일리 블루스>에서는 수감됐던 주인공 첸이 어머니의 집을 갖고 라오웨이가 적게 가져 불화가 이는데, <지구 최후의 밤>에서는 아버지의 애인이 식당을, 주인공 뤄홍우가 겨우 트럭을 갖게 됨),

오래된 벽시계와 미러볼 (회전하는 물건의 시간성),

하지에 탄 기차와 환각,

녹슨 물건과 공사장 포크레인과 당구장,

산사태와 폭우.


영화의 시간을 정확히 반으로 가르는 타이틀이 뜨기 전의 1막. 10년 만에 카일리로 돌아와 옛 애인을 찾아다니는 뤄홍우. 구이양 교도소의 타이자오메이도, 펑타이청의 여관 주인 왕즈청도 완치원의 어떤 시기마다의 행적에 대한 단서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들인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만 천연덕스럽게 한다.

교도소에서 회전하는 집과 녹색 책의 주문, 15세 즈음의 완치원이 어째서 카이리에 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타이자오메이와 뤄홍우의 뒤로 벽이 느리게 회전하고 있다.

여관에서 주인을 통해 지난 10년 간 완치원의 삶이 어땠는지를 가늠하려 하지만 그는 (자기에게 한때 세헤라자데였던) 완치원의 화술이 아주 뛰어나서 진실과 거짓을 가늠하기 힘들고, 완치원이 아기를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고 이야기한다.

이제 뤄홍우는 그가 완치원에게 녹색 책을 받은 건지 아닌지, 완치원의 주인이었던 줘홍위안을 극장에서 총으로 쏜 기억조차 진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어진다.


영화와 기억의 가장 큰 차이는 영화는 가짜라는 것이다. 몇 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가짜 세계!
하지만 기억은 진실과 거짓이 섞인 채 수시로 눈 앞에 떠오른다.


자몽을 먹으며 우는 완치원과
사과를 먹으며 우는 백묘


‘우주가 아니라면 함께 할 수 없다’더니, 그럼에도 함께 도망칠 수 있다면 태양 같이 밝은 가로등이 있는 여관을 짓자더니 그런 여관의 주인과 돌연 결혼했다 헤어져 사라진 완치원. 당마이에서 노래를 한다는 완치원.

여자를 찾아 생전 처음 보는 마을들을 누비고 다니지만, 갱도 밑의 극장에서 피로에 절어 잠들어 버리고 - 이 때를 기점으로 막이 나뉘며 뤄홍우의 생생한 꿈 같은 1시간짜리 롱테이크가 시작된다.


여자에 가까워진다고 믿을 때마다 소리에 인도받는 뤄홍우 - 탁구공 소리와 귀신들이 부르는 듯한 노래 소리와 장난감 트럭 소리와 게임기 소리. 그가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은 태어나지 못한 귀신인지 누군가의 과거인지 정체를 알 수 없고, “아는 사람과 닮았다”는 말과 “너무 뻔한 수작 아니에요?”라는 반론도 지겹게 반복된다.

갱도의 12살짜리 탁구 신동은 뤄홍우가 ‘꼬마 백묘’라고 이름 붙였지만, 그는 꼬마 백묘인 동시에 뤄홍우의 낳아지지 못한 아들 같기도 하다. ‘운동선수가 될 것 같다’고 완치원이 말했던 바로 그 지워진 아들. 그애는 <카일리 블루스>처럼 뤄홍우와 같은 오토바이를 타고, 뤄홍우에게 길을 안내하고 오토바이 라이트로 등을 비춰주고는 홀연히 화면에서 사라진다.

당구장에서 마주한 샤오젠의 애인 카이전은 줘홍위안의 애인이 되기 전, 뤄홍우를 만나기도 전의 완치원인 것만 같다. 매번 짝이 있는 같은 얼굴의 여자. “칼자국, 문신, 점 아무것도 없”고 다만 노래가 좋아서 가수가 되고 싶다는 앳된 여자. 그 여자가 들려주는 사과와 슬픔에 대한 이야기, 회전하는 집의 이야기.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집 나간 여자. 양봉장에서 불 붙인 막대를 들고 연기를 피워 꿀을 가져오던 여자. 태양 아래서나 잘 보일 것 같은 빨간 머리를 한 여자. 완치원이 닮았기 때문에 뤄홍우가 완치원에게 최초의 관심을 갖게 한 바로 그 여자. 번진 화장을 한 여자. 시내 어딘가에서 큰 불을 낸(양봉꾼의 집을 태운) 뒤 사라진 여자.

뤄홍우가 그리워한 원류의 여자.

“그애는 아직 어리니까 날 금방 잊을거야.”
“내일은 꼭 그 여자를 찾아야겠어. 지금은 그냥 당신이 그 여자였으면 좋겠어.”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과 발을 대지 않고 날아서 내려가는 움직임의 마지막 대구.


“시계는 함부로 주는 게 아니에요. 영원을 의미하니까요!”
“폭죽은 함부로 주는 게 아니야. 폭죽은 잠깐을 의미하거든.”


그러니까 기억이 수시로 떠오르는 돌과 같은 것이라면, 영화는 단지 거짓일 뿐. <카일리 블루스>가 꿈을 이기는 시간에 대한 영화라면 <지구 최후의 밤>은 시간을 압도하는 꿈에 대한 영화.

매거진의 이전글 <엘리멘탈>, 치워질 수 없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