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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Jul 17. 2023

<보 이즈 어프레이드>, 불완전한 모성을 관음하다

2018년의 <유전>부터 이어진 아리 애스터의 길 잃은 탐구

*23/07/23 여성신문 기사​는 이 글을 바탕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성은 불완전하다. (근거)
어머니는 가족의 핵이자 근간이다. (근거)
그렇기에 불완전한 모성은 언제든 가족을 무너뜨릴 수 있다. (주장)

아리 애스터가 그의 영화 세계에서 점점 더 깊이 몰입하는 가족과 ‘엄마 됨’의 실패라는 주제는 위의 세 단계를 거쳐 논증된다. 그러나 <유전>과 <미드소마>에 비해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논증은 연결고리가 약하고 환원주의적이며 결국 ‘모성은 불완전하다’는 대전제까지 의심의 눈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Beau is afraid.” Of what?


3시간짜리 새 장편은 제목부터 주인공 보가 진실로 무서워하는 것이 세상인지, 아니면 세상에서 자기를 지켜주려는 무엇인지 적시하지 않음으로써 수수께끼를 자처한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의 답은 생각보다 흥미롭지도 않고 의외로 쉽게 손에 쥐어지는 듯하다. 보가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세상으로 독립하는 순간부터, 어머니 모나가 탯줄의 처절한 분리에 이성을 잃고 애가 울지 않는다며 히스테릭한 비명을 지르는 오프닝부터 그의 편집증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으니 말이다.

부유한 유대인 사업가 홀어머니가 과보호하고 집착해가며 키운 외아들은 독립한 중년이 된 후에도 cockblocker (말 그대로, 성관계를 방해하는) 엄마의 영향 하에 있다. 부모님의 결혼 첫날밤, 보가 수정되는 바로 그 순간에 복상사로 죽었다는 아버지와 믿지 못할 부계 유전병에 관한 어머니의 이야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떤 여자(아리 애스터의 관점에서는 곧 ‘사람’)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섹스를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세상과 동떨어진 보의 유일한 조력자이자 죽도록 숨 막히게 하는 적대자인 어머니는 우유부단한 아들에게 도덕적 죄책감을 안기는 방식으로 보를 조종하는 데에 능숙하다.

사람들 앞에서 보가 내리는 최선의 선택은 “미안해요”를 외치는 것뿐이다. 자동응답기 같은 사죄는 부상당한 보를 아들의 대체품처럼 입양한 그레이스와 로저 부부 앞에서도, 그들의 반항아 딸 토니 앞에서도 수도없이 터져나온다. 심지어 그를 이유 없이 칼로 찌른 벌거숭이 백인 남자 노숙인이나, 전쟁 PTSD로 제정신이 아닌 추격자 앞에서도. 어머니에게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세요?” “최선의 선택이 뭔데요?”라고 묻던 버릇이 그의 유일한 능동적 응대인 셈이다.


한편 보의 무방향성과 유약함에 대해 다시 만난 첫사랑 일레인이 내린 판단은 이러하다.

“네가 마초가 아니라 좋아.”

하지만 보는 마초가 되지 않기를 선택한 게 아니다. 그저 마초가 될 기회도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정신적으로 거세된 남성일뿐이다(그리고 곧 중증 고환염으로 그 물리적 성기조차 잃을 위기다). 소년 시절부터 그가 고를 수 있는 길은 단 두 갈래였다. “장님 같은” 무지함이 매력인 보통의 남자가 되어 남성 호모소셜의 무례한 관습을 억지로 따라가다가 결국 그의 아버지처럼 알레고리 그 자체인 거대한 성기 괴물로만 남거나, 아니면 남성성의 계발을 포기하고 얌전히 어머니의 ‘보호’ 안으로 굽히고 들어가거나.

그런데 평생 어머니의 공포 정치에 굴복한 채 살아온 것만 같던 그는, 긴 여정 끝에 재회한 어머니 앞에서 돌연 폭발하더니 모나의 목을 졸라 빈 수조 안으로 처박히게 하고 망연하게 큰 호수에 배를 띄운다. 어머니를 죽이고서야 평온과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보의 공포는 오레스테스의 복수만큼 비장한 번뇌를 동반하지도 않았고, 그레이스의 딸 토니의 탈출처럼 자신을 버릴 각오로 이뤄지지도 않았다. 그는 결국 어머니를 벗어나지 않기로 선택한 자신에 대한 분노, 첫사랑의 상실로 인한 박탈감까지 모두 어머니에게 전가한 비겁한 성인 남성에 불과하다.


그러니 “보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타인과의 (성적인) 친밀성인지, 세상 그 자체의 (과장된) 불결함과 위협인지, 그로부터 자식을 보호하려는 부모님의 집착인지, 거기서 벗어날 용기가 없는 자기 자신의 나약인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영화가 아닌 관객의 몫이다.

가족이라면 응당 어떠해야 하며 특히 자식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의무론에 치를 떠는 이라면 <유전>과 <미드소마>부터 이어져온 그의 단순하고 거침없는 가족주의 해체에 기묘한 쾌감을 느끼고 싶은 기대로 이 영화에 임했을 것이다. 아리 애스터는 여전히 말 그대로 가족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포를 뜨고 뼈를 발라내는 작업에 가장 열심인 호러 장르 창작자다. 게다가 ‘모성애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라는 아주 단순한 말조차 백인 남성 창작자의 입을 빌려 천명되는 일은 여전히 드물다. 관객의 특정한 기대감은 이해 가능하다.

아리 애스터의 표면적 의도는 어느 정도 이 기대에 복무하는 것 같다. 전작 <유전>과도 유사한 주제의식은 - 모성은 마치 신성처럼 완벽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받는 덕목이지만, 현실의 진짜 어머니들이 품는 감정은 사실 완벽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런 모성의 불완전성 ‘때문에’ 가족 역시 완벽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이번에 그는 이 단순한 명제를 논증하려는 여정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모성에 대한 탐구 대신 관음


불완전한 어머니와 그에 대해 자식(아들)이 갖는 양가적 감정을 설명하려는 아리 애스터 나름의 장치는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설치되어 있다. 사실 좀 지나치게 많이.

물과 엮인 수많은 상징 - 양수, 정신과 의사의 우물에 대한 비유, 길가에서 조각배를 가지고 놀던 아이, 처방약과 물, 아파트의 단수, 거품 목욕, 연극적 상상 속에서의 홍수, 갑판 위 수영장에 떠다니는 시체, 엄마의 집 밖 호수, 마지막 재판장 -은 일관되게 보가 엄마 모나에 대해 품은 감정을 가리킨다. 보는 모나가 자신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절대적 존재라고 이미 의식하고 있으며, 결국 모나의 판결에 의해 보가 난 곳으로 돌아가면서 - 비현실적 공간에서 물에 빠져 죽으면서 - 영화가 끝난다.

끊임없이 물을 갈망하거나 그리워하거나 편안함을 느끼고, 동시에 물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보. 그러나 아쉽게도 어머니(la mère)와 물(la mer)을 동일시하는 것은 영화사에서 그리 참신한 레토릭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누벨바그 시대의 <400번의 구타>(1959)에서 어머니로부터 거부당한 문제아 앙투안은 결말에서 도망쳐 바다를 향해 달려가지만, 너른 바다 역시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단단한 경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망연한 얼굴로 카메라에 포박당한다.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아서/버림받을까봐 평생 미숙한 소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남자의 (다소 뻔뻔하고 진부한) 고충. 영화가 말해주는 것은 딱 여기까지다. (물론 진짜 결론으로 가닿기 위한 이 중간 단계의 정동에 이입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정말로 설명했어야 하지만 결국 하지 못한 것은 어머니가 대체 왜 그렇게 아들에게 집착하는지다.


물론 아리 애스터는 근대적 모성 신화가 숭배에 근간을 두는 척하지만 본질적으로 여성에 대한 타자화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모나와 <유전>의 애니 같은 불완전하고 실패한 엄마들의 이미지에 집착하고 그들이 내린 선택이 어떻게 가족을 오히려 망치는지의 묘사에 집중한다.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최대한 우스꽝스럽고 힘없고 무의미하게 그려내는 작업에도 꽤 큰 노력을 들인다. 그래서 그의 모든 장편영화에서 아버지는 종마나 자아 없는 희생양 역할로 전락하고 어머니는 ‘마음만 먹으면’ 혹은 ‘삐끗하면’ 가족을 송두리째 부서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실세로 재발명된다.

그에게 아버지란 혼자서는 생존 불가한 거대 고환, 불에 타 죽는 제물 등으로 비유되는 하찮은 존재라면, 어머니란 무엇인가. 도달 불가한 이데아에 슬퍼하며 자식에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마는 비운의 인간? <유전>의 애니는 어느 정도 이 역할에 부합하는 인물로 보인다. 그리고 모나라는 인물이 애니의 변주된 형태란 사실은, 영화적 긴장이 극에 달했을 때 등장한 두 어머니의 똑 닮은 분노에서 쉬이 짐작 가능하다.


“난 널 위해 뭐든 할 수 있어. 난 언제나 널 걱정하고 널 위해 내 모든 걸 줄 수 있었는데 넌 날 위해 뭘 했지? 넌 역겨운 거짓말이나 해대며 날 피하기만 했어.” (모나)

“난 걱정하고 떠받들고 편들어 주면서 사는데 기껏 한다는 게 욕지거리야? 맨날 사람 깔보고 화내고 짜증내고 이젠 네 동생도 죽었잖아 … 네가 한 짓을 감싸주고 싶지만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애니)


완전하고 희생적인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 모성의 이데아라면, 애니와 모나의 모성애는 ‘알아주길 바란다’는 점에서 이미 부적합하고 실패했고 아들의 인생을 망친 원인으로 지목받기까지 한다. 그러나 정상 가족을 이루지 못한 (잠정적) 어머니들의 불완전한 사랑을 바라보는 아리 애스터의 태도는, 시간이 갈수록 (<미드소마>까지는 어렴풋이 드러났던) 이해나 연민이 아니라 관음과 이용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아들을 위해 만들어진 어머니


아리 애스터는 모나가 보의 강박적인 행동을 부추기고 그를 감시까지 해가며 점점 더 은둔하게 만든 진짜 이유는 뭔지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당연하다. 그는 모나의 행동과 동기를 구축하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두려워하는 보를 창조하고 그가 두려워할 만한 어머니를 사후에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마치 아담과 이브처럼).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주장된 대로 모나의 병적인 사랑이 모든 사건의 근원이라 치자. 영화는 그 압도적인 사랑이 거대한 성기로 변모해버린 남편의 배반에서 비롯된 자기방어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 사람을 모두 자기 영향력 하에 두고 싶어한 전략가의 통제욕 때문인지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남편과 사업은 모두 핑계일 뿐이고 보의 육체와 정신과 시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나르시시즘적 소유욕이 그 사랑의 기원일 수도 있다. 혹은 모나에게 세상이 부여한 어머니라는 이름의 중압감 탓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원인일 수도, 아무것도 원인이 아닐 수도 있으나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리 애스터는 (보를 두렵게 하기 위한) 모나의 모성을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그 뿌리에 대한 내러티브는 전혀 준비해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연 발생한’ 그 모성은 결국 다시 그가 최초의 문제로 설정한 ‘당연한’ 모성, 발명되었고 고착되었고 이제는 의무로 부여되는 모성으로 귀결되지 않는가. 모나라는 인물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채 보라는 인물의 정합성을 위한 캐릭터에 머무르게 한 선택은, 영화의 전제를 그 자체로 모순이 되게 만든다.


그나마 참작 가능한 증거는 “우리 엄마가 날 사랑한다고 느낀 적 없기 때문에” 아들에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모나의 말인데, ‘굳이’ 모자간의 질척한 관계를 영화의 소재 삼은 제작자가 하기에는 다소 양심이 없는 주장이다. 창작자가 먼저 동성인 모녀 사이의 사랑과 이성인 모자 사이의 사랑이 다르다고 믿으며 선명하게 그어둔 성별 경계를 사후에 의도적으로 흐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납득되는 것은 5년 전 영화인 <유전>의 내러티브다.


“우리 엄마는 따뜻한 분이 아니셨어. 날 사랑한다고 느낀 적 없었지. 그래서 내가 낳은 너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고 정말로 그렇게 했어.” (모나)

“난 널 낳을 생각이 없었어. 엄마가 떠밀었어. 온갖 방법을 다 써도 유산이 안 됐어.” (애니)


아이를 가지기 두려웠지만 ‘엄마’를 거절하지 못한 애니. 엄마를 경원시했고 평생 이해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사랑했고 사랑받고 싶었다고 추도사에서 밝힌 애니. 그런 애니가 낳지 않으려고 버틴 아들 피터나 둘째 딸 찰리를 서서히 사랑하게 된 (혹은, 그래야 한다는 강요 속에 스스로를 재조정한) 과정은 영화 속에서 생략되어 있지만, 그가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고서라도 피터만은 살리고자 한 마지막 선택으로써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 적어도 아이를 만나자마자 대단히 극적인 사랑을 부어주기로 ‘결심’했다는 모나보다는 훨씬 자연스럽다.


게다가 모나는 자신에 대한 성녀화를 거부하는 체하며 사실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보에게 호의를 갖고 접근하는 다른 여자들에 대한 일상적 슬럿 셰이밍 - 숲에서 성모상을 선물 받았지만 보를 놔두고 도망간 초록 원피스의 여자, 첫사랑인 ‘차분하고 강해서 그에 맞는 남자(보가 아닌 남자)를 만나야 하는 여자애’ 일레인 - 이 그 증거다. 아들의 원 앤 온리인 애인이 되고 싶어하는 동시에, 아들을 성애적 감정으로 바라보지 않는 순수하고 순결한 어머니로 남아 있고 싶은 양가적 욕구를 지닌 여자. 이 전근대적이고 신화적인 관능을 자랑하는 편모의 상부터 이미 심각하게 뒤떨어진 미소지니라고 느낀 관객도 분명 있을 것이다.


또 영화는 보가 ‘여자’와 성관계를 하지 못할 뿐인데 왜 ‘사람’ 모두와 친해지는 것에서부터 실패했는지 설득하지 못했다. 기실 보는 섹스나 자위로 인한 급사를 두려워할 수는 있어도 동성의 친구들과 어울릴 수는 있지 않은가. 편집증과 소심한 성격의 나쁜 시너지에 대한 영화적 허용으로 넘어가고 싶지만, 보의 외연을 이루는 타자는 분명 여성형이며 여성에 대한 공포가 곧 사람에 대한 공포로 즉각 환원된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아리 애스터의 관점을 의심하게 될 수밖에 없다. (혹시 아리 애스터는 인간의 기본형을 여성으로, 부가물을 남성으로 두는 급진적 실험을 하려던 것일까? 그렇게 본다면 많은 의문이 해결되지만 솔직히 가능성은 낮다.)


<트루먼 쇼>를 방불케 하는 마지막 장면의 수상 재판장에서는 보의 과거 잘못들이 뒤늦게 밝혀지며, 어긋난 모성애의 일방적 피해자인 것만 같았던 그가 사실 여러모로 어머니라는 여성을 남몰래 유린했던 사건들을 소개한다. 그는 청소년기 새로 친해진 소년들에게 자기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해 어머니의 빨지 않은 속옷을 함부로 보여주고 심지어 그것을 가져가게 한 전과가 있던 것이다. 사소하지만 모나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예를 들면 모나를 오래도록 보러 가지 않은 일, 모나를 위한 선물을 다른 여자에게 줘버린 일)과 진짜로 추악한 남성성에서 비롯된 죄가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은 더더욱 이 뒤틀린 관계의 피가해 구도를 명확히 판별하기 어려워진다.

아리 애스터는 바로 그런 혼란이 모자 - 혹은 가족 - 관계의 불가피한 숙명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듯하나, 아들에게 집착하는 여성과 그런 어머니를 모태부터 밀어냈던 (배때지가 부른 중산층 백인 남성인) 수동 공격형의 아들 중 어느 쪽이 더 풍부한 서사를 부여받고 카메라의 주된 시점을 점유했는가. 영화의 극적 효과를 위해서라지만 마지막 30분에만 등장한 모나가 객관적 변론을 시도할 여유는 없었으며, 그의 역할은 (<유전>의 애니 또는 <미드소마>의 대니와 달리) 이입 가능한 주도자(protagonist)가 아니라 아들의 적대자(antagonist)로 이미 고정되어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모성을 원망하지 않는 체하며 이를 잔혹동화처럼 과장되게 표현하고, 허구적 공포를 키우는 데에 가장 열심이며,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붕괴한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 엄마의 불완전성에 대한 깊은 이해나 존중의 시도가 엿보이지 않는 극화는 또다른 낙인과 떠넘기기에 불과할 뿐이다.


 


이피게네이아와 아가멤논


2018년의 <유전>은 2023년의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 비하면 얼마나 세련되게 가족의 실패와 모성의 실패를 그려냈는가. 오컬트 호러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적절히 뒤섞어 끌어오는 이 영화는 엄마의 엄마까지 계보를 거슬러 오른다는 점에서 <보 이즈 어프레이드>보다는 나은 확장성을 갖는다.


<유전>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헤라클레스나 이피게네이아 신화는 신의 의지를 벗어나기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결과로서 신탁의 내용을 따르게 되는 불가항력적 운명을 은유한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 출전 전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려 했던 신화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두가 그 선택을 합리화한 거지. 신들이 원하니 어쩔 수 없다고.”

애니의 직업이 미니어처를 만드는 공예가인 것도, 그가 ‘엄마치고는’ 너무 냉정한 판단을 내리며 아들과 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애니는 체스판 위의 말이 아니라 체스판을 겉에서 바라보며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절대적 담지자처럼 행동하려 하지만, 결말에서 그도 결국 자신이 내린 선택으로 하여금 자신과 가족들을 운명의 굴레 안에 손수 밀어넣는 장기말로 위치 지어진 것이다.


체스판 위의 말이 되는 인간의 무력함을 애도하려 할 때 그리스 신화는 쉬이 활용되는 소재다. 그러나 이피게네이아를 필두로 한 제물에 관한 신화들에서 보통 바쳐지는 쪽은 딸이고 바치는 자는 무정한 아버지였다. <유전>과 같은 해 개봉한 <킬링 디어>에서도 역시 같은 이피게네이아 신화를 바탕으로 아버지를 죽인 인간 남자에게서 딸을 뺏고 가족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복수하는 어린 아들(신)이 등장한다. <유전>의 탁월함은 이피게네이아와 아가멤논의 관계를 반전시켜 모성 없는 어머니가 자식을 (모르고) 바치는 구조에 있었다. 신의 분노를 산 아가멤논의 비탄과 무정을 승계받은 것은 애니이며, 자식을 지키려고 배우자에 맞서는 것은 애니의 남편 스티븐이다. 바쳐진 자식들(엘렌의 딸 애니를 포함한)은 연약하게 흔들리고 결국 신의 의사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즉 <유전>의 어머니가 이피게네이아 신화의 전복을 통한 최소한의 주체성을 확보했다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고통받게 하는 사람으로서만 서사적 필연성을 갖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강경한 가족 해체주의자임을 스스로 주창했던 아리 애스터의 모성에 대한 실험은, 어쩐지 점점 더 ‘어머니’ 그 자체를 탐구하기보단 ‘어머니의 아들’인 자신의 트라우마를 핥아주는 흔한 남성의 그것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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