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Aug 05. 2023

<바비>, 뚫린 집에 사는 뚫린 입의 인형

어떤 영화는 관람이 아니라 체험된다. 익숙한 대학가 극장에서 가장 큰 한 관을 가득 채운 또래 여자들과 함께 보는 <바비>가 그랬다. 단 세 대 있는 엘리베이터가 열릴 때마다 이전 회차 영화를 보고 나온 여자들이 커다란 포스터를 든 채 쏟아져나오고, 다음 회차를 예매한 여자들이 기대에 찬 얼굴로 빈자리를 채운다. 관 안에서 삼삼오오 속삭이고 옆 자리 모르는 사람을 위해 짐을 치워주며 서로를 안심과 호의로 맞이하는 얼굴들. 같은 장면에 같은 이유로 웃고 슬퍼하고 후련해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들.​


그날의 <바비>는 행복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놀이기구 같았다. 여느 영화제의 최고 기대작을 예매하는 데 성공한 승자들끼리 관 안으로 일제히 입장할 때, 심지어 그 영화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도취된 채 관을 나설 때 로비에서 나눠지는 무언의 눈인사에 비견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저스티스 리그> 잭 스나이더 컷에, 어떤 사람은 대만 뉴웨이브나 비간의 영화에 자기의 영화적 체험을 빚지겠지만, 그날의 <바비>는 나의 최중요한 영화적 체험 중 하나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다음 고민이 남는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이 다정한 일체감과 안심 어린 즐거움을 목격하기를 거부하거나, 즉각 체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말로 <바비>의 탁월함을 설명할 수 있을까?


공감은 힘이 강하다. 냉철한 시네필을 자처하는 사람도 분명 자기만의 ‘미워할 수 없는’ 영화가 하나쯤 있을 것이다. 그 영화는 ‘만듦새’로 통칭되는 서사적 완결성, 비유의 긴밀성, 미장센과 연출 면에서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의 어떤 시절, 어떤 감정을 제대로 건드린 영화고, 그는 모두가 그 영화를 욕한대도 그 영화의 존재 의의 자체에 애착을 느낄 수 있다. 여아의 임파워링에도 섭식장애에도 일조했던 인형의 문화사적 명암을 훌륭하게 비틀어 재창조된 페미니즘 코미디를 보고 동시대인 여성으로서 애착을 품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게다가 <바비>는 객관적으로도 똑똑하게 설계된 영화다. 인류사 내내 이어진 성 불평등을 정조준하는 안티테제가 되기 위한 영화가 ‘영화이기만’ 한 영화들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닌가. 아무 메시지도 담지 않고 다만 아름답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는 비교적 쉽다. 시끄럽고 반동적인 메시지를 발화하기 위한 영화가 가볍고 우아한 동시에 재미까지 있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그레타 거윅은 그 어려운 작업을 해냈다.


그가 바비 월드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바비의 입을 빌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초의 바비, 그래서 가장 시대착오적인 미를 구사하는 바비는 자기를 이미 앞질러 가 더 많은 것을 깨우친 ‘이상한 바비’와 인간 소녀 사샤가 어떤 적의를 품을지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아직 깨어나지 못한’ 바비들을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모두를 구하기 위해 돌아온다. <프란시스 하>의 ‘파티에서 눈을 마주치고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이해자임을 알아채는’ 여자들 사이의 애정 어린 연대가 바비 월드에서 재연되는 셈이다. 바비의 거울상인 인간 여성 글로리아의 스피치와, 그것을 듣는 바비들이 켄에게서 분리된 상태에서만 가부장제의 세뇌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설정 역시 메타적 재미를 선사한다.



항간에서는 ‘<바비>가 비판하는 대상은 현실의 가부장제뿐 아니라 바비 월드의 가모장제이기도 하다’고 애써 (감독도 명시한) 이 영화의 페미니즘적 의미를 흐리려 한다. 결국 영화가 가리키는 것은 ‘모두 까기’를 통한 기계적 평등에 대한 긍정이지, ‘한쪽 성에만 유리한’ 체제를 격파하자는 행동주의가 아니라고 믿고 싶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바비 월드가 대변하고 상징하는 것은 단순한 가모장제가 아니다(실은 그랬어도 별 문제없다는 입장이긴 하지만,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라는 주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바비들은 재생산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몸으로 디자인됐으므로). 현실의 성별 격차에 대한 완전 전복은 그저 현실의 여성들이 ‘남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위를 취득했을 때, 그들이 진정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감 없이 보여주고자 하는 장치에 가깝다.​


바비들의 집은 왜 활짝 뚫려 있고 모든 문이 열려 있는가. 이 의문은 바비 월드에 첫 방문한 인간 모녀의 입을 빌려 두 번씩이나 강조된다. 바비들은 리얼 월드의 여성처럼 누군가 자기를 훔쳐보고 침입하려 하는 일을 겪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장 안전해야 하는 공간에서조차 편히 쉴 수 없는 두려움을 모른다.

바비들의 거울은 왜 뚫려 있어 거울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가. 바비는 영원히 아름답고 마르게 창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비 월드의 기득권이기에 ‘남을 위해’ 꾸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리얼 월드의 인간 여자들은 남에게 보이는 나를 끊임없이 신경 쓰며 신체에 대한 자발적 조정과 변형의 과정을 평생 감당한다. 하지만 바비들의 꾸밈은 켄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미학적 추구다. 게다가 인형이기 때문에 가외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는다. 탈코르셋 운동 후로 가장 뜨거운 쟁점이 일부 여성들의 ‘나도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꾸민다(=그러니 나는 계속 이전처럼 꾸미고 싶다)’는 주장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꾸밈노동의 절대적인 양, 그리고 그것이 진실로 어디를 향하는가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밖에 없다.



즉 바비 월드에서 인간의 디폴트, 1등시민, 기득권층은 바비이지 켄이 아니다. 바비 월드의 부속일 뿐인 켄은 바비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처지를 슬퍼하고 켄덤을 세워 2등시민을 탈출하려는 시도도 해보지만, 결국 바비의 눈길 한 번에 질투가 나 켄들끼리의 결속도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혁명도 흐지부지 된다. 반면 기득권인 바비는 켄의 사랑을 바라지 않고 필요로 하지도 않기 때문에 오로지 ‘원래 자기 것이었던’ 권력을 지킨다는 하나의 목표 하에 단단히 결속하고 켄을 속여 서로 싸우게 한 사이에 법치의 영역을 재점유한다. 여자들이 결혼과 출산의 의의를 두고 거세게 논쟁하는 동안 남자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남성에겐 손해 볼 일 하나 없는 결혼과 번식이 무조건 이득이기 때문에 멀리서 관망하며 똘똘 뭉쳐 권력을 사수하는 현실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결말의 켄을 향한 사과와 격려 역시 암시적이다. 표면 그대로 읽는다면, 너도 나도 잘못했고 가부장제도 가모장제도 평등하지 않으니 사이좋게 지내자는 수준의 세련되지 못한 메시지로 오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바비들은 끝까지 켄들에게 유의미한 권력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한 켄이 대법관 자리 하나만 달라며 애걸하자 대통령 바비가 하위 법원의 법관 자리를 하나 선심 쓰듯 할당했으며 “언젠간 켄들도 리얼 월드 여성들만큼의 권력을 갖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내레이션이 마지막 타격을 날릴 뿐이다.

바비는 끝까지 켄이 원하는 사랑이나 진실로 추구했어야 할 권력을 주지 않고 그저 ‘(네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던 과거를) 미안하게 생각해’라는 말뿐인 사과에 그쳤다. 그런데 켄은 그것만으로도 바비에게 크게 감동한다. 켄이 바란 건 기실 권력이 아니라 바비의 진심 어린 사과, 인정, 자기를 돌아봐주는 단 한 번의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리얼 월드의 여성들이 현실 남성과의 로맨스를 통해 정신적 자립을 꾀하는 것과 너무나 유사한 그림 아닌가. ​


우리는 남자 없이 지배적 체제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어 본 역사가 너무 짧다. 남자 없이 혼자서 잘 살아간 여성들의 표본도 너무 적다. 훌륭한 여자들의 자립은 은폐되고 평범한 여자들의 자립은 수시로 조롱당해 우리는 롤모델로서 충분한 수량을 제공받아 본 적이 없다. 가부장제의 영향력을 벗어나 로맨스 없는 공동체와 자기 자신에만 오롯이 의지하려는 여자들의 발명은 이제야 막 태동하는 중이다. 그러니 바비 월드의 바비-켄의 역학 관계는 (남자들이 믿고 싶어하듯) 가모장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미러링을 통한 원본(가부장제)에의 비판으로, 더 나아가 가부장제에 순응하지 않는 여자들이 더 늘었을 때 어떤 세상이 새로이 도래할 수 있을지 비전을 공유해주는 그레타 거윅의 ‘영업’으로 보는 게 더 적확할 테다.



거기에 바비들은 걸즈나잇에 남자를 들일 필요가 없어 내쫓아버리지만 켄들은 아이캔디가 되어줄 바비를 반드시 끼고 노는 장면, “통제권을 가졌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물어본 거”라는 이상한 바비의 대사, “저만 힘없는 남자인데 그럼 저는 여자인가요?”라고 순진하게 묻는 마텔 사 인턴, “여자는 모두에게 미움받아. 남자든 여자든 여자를 싫어해. 그게 유일한 공통점이야!”라는 사샤의 한 서린 일갈까지. 일일이 언급하기 어려울 만큼 촘촘히 삽입된 유머만으로도 풍자극으로서의 역량과 의의가 충분히 입증된다. 물론 이 완벽한 설계는 바비들의 성장 서사를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정교할수록 불쾌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바비>는 그 복잡성과 고도의 유머 때문에라도 경험이 전제되어야만 이해하기 쉬운 영화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성의 삶을 경험한 적 없어 쉬이 감응하지 못할 사람들은 대체 영화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걱정될 즈음, 현실 세계에 당도한 켄이 의사·변호사·투자가가 되려 하다가 자격 미달로 거부당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남성도 높은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권력의 세계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맨박스의 개념을 아주 친절히 기초부터 설명하는 것이다.

리얼 월드의 남성은 비대하게 길러진 자아를 스스로의 능력치가 충족시키지 못할 때 알파메일이 되지 못했다는 열패감으로 여성에게 굴절분노하는 일이 몹시 흔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바비 월드의 켄은 결국 가부장제가 말(horse)보다도 지루한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여기에 켄을 완성시켜 줄 바비를 공급받기를 기다리지 말고 켄 자신만을 위한 꿈을 찾아 자존의 아름다움을 누려보라는 다정한 충고까지 곁들여진다. 다시 말해 여자들은 남자 없이도 잘만 살 수 있는데 자꾸 아니라고 우기면서 여성의 재생산권과 돌봄과 감정노동에 의존하고 싶은 욕구를 접어두고, 남자들도 여자에 대한 착취 없이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이제는 제발 좀 찾아보라는 처절한 당부. 그레타 거윅이 지닌 경이로운 수준의 인내심과 슬픈 소망이 동시에 느껴지는 장면이다.



‘컨셉트가 영화보다 크다’고 느꼈다던 중년의 평론가를 위시한 많은 남성들은 당연히 이 영화에 ‘즉각’ 공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게도 영화가 두 시간 내내 놀리고 낱낱이 해체하고 무력화시킨 (그럼에도 결국 상냥하게 격려해 준) 대상에 더 강한 연민과 소속감을 느꼈으리라. 여성들이 조롱받은 세월이나 수위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순한 놀림이었지만, 아무튼 한국에서 나고 자란 성인 남성에게 익숙하지 않을 방식으로 타자화되어 상처받은 마음만은 안타까이 여긴다. 숱한 남성들이 관람 후기에서 얼결에 인정했듯 자신이 이렇게 쉬운 내용을 못 알아들을 거라고 짐작하고 설교하려 든다는 생각에 ‘심통’이 났을지도 모른다. 평생 맨스플레인을 겪어온 성별로서 그 억울함 역시 마음 깊이 이해한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는, 의미도 재미도 없고 단 한 줌의 지성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구호에 반복 노출된 사람이라면 다들 알지 않는가. 어떤 이들에겐 정말로 그렇게나 쉽고 직설적이고 반복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바비>는 예술을 예술로만 보자며 고고하게 선을 긋고 반지성주의를 방치한 사람들을 대신해 그 귀찮고 힘든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총대를 멘 영화다. 같은 가치를 믿는 사샤와 글로리아와 바비들을 위무할 뿐만 아니라, 대등한 공존을 포기한 켄들을 버리지 않기로 결심하고 가르치고 설득하는 역할까지 놓지 않은 착하고 온건한 영화.​


찰리 채플린부터 켄 로치와 다르덴 형제의 최근작까지 수없는 영화가 앞서 증명했듯, 영화는 ‘컨셉트’의 전파에 가장 효과적인 매체가 될 수 있다. 캠페인이 되는 것 그 자체를 목적 삼을 수도 있다. 그러니 ‘영화는 영화로만 접근해야 하는데 ‘바비’는 그러지 못했다’는 논거에 무릎을 탁 치고 싶어졌다면 그 마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자. 혹시 그건 지극히 목표에 충실했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영화의 직관적인 리얼리즘을 트집 잡아, 나머지 성취까지 가혹하게 평가하고 싶다는 반발심의 솔직하지 못한 표현은 아닐지 되묻고 싶다.





덧. 아래는 리뷰 내에 언급된 평론가의 한 줄 평에 열렬히 호응하며 몰려온 ‘일부’ 남성들의 왓챠 평들. ‘상남자’인 평론가 ‘형님’이 ‘페미들 줘 패주는 거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공통된 정서인 듯한데 이게 정말 ‘기계적이고 냉철한’ 씨네필의 자세일까요?ㅋㅋㅋㅋ

근데 어떡해 ? 너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님이 바비 오리지널 극본으로 이만큼 사람들 영화관 가게 하는 것만으로도 ‘시네마의 승리’라고 평가하셨대ㅜㅜ


* 23/08/03 여성신문 기사​는 이 글을 바탕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 이즈 어프레이드>, 불완전한 모성을 관음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