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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Aug 27. 2023

<오펜하이머>, 반전 없는 놀란의 자의식

역시나 여운은 남지 않았다


한국에서만 바벤하이머 시너지를 버리고 광복절 개봉이란 어그로를 택한 <오펜하이머>. 놀란 감독의 화려한 필모 중 가장 밋밋하다는 평도 많았지만, 놀랍게도 표절 시비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인셉션을 뺀다면 놀란 감독 영화 중에 가장 재미있게 봤다. 이건 아마도 영화의 만듦새나 감독의 후광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순수한 재료 - 오펜하이머가 살아간 시대와 그의 정치적 견해 -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도와 강한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놀란의 유일한 오리지널리티라 그런지 갈수록 더 집착하는 시간 짜집기 연출도 아직은 질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화관을 나와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우러나오고 계속 보고 싶어지는 영화냐 하면, 아니었다. 이전에 <테넷>까지 보고선 놀란의 인물들은 참 로봇처럼 짜여진 대사와 감정을 ‘수행’하는 데에는 능숙하지만, 거기에 어떤 폭발적 감정이 잠재되어 있냐 묻는다면 나는 느끼지 못했다고 답할 거라는 리뷰​를 썼었는데. <오펜하이머> 역시 놀란이 그간 스킬의 측면에서 엄청난 대가가 되었다고 예찬되는 면에 비해 그런 ‘이입’의 여지에 정말 정말 진실로 재능이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영화다.​



우선 영화의 원재료인 오펜하이머와 과학자들의 삶을 빼면 이 영화가 스스로 이룩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회의적이다. 잘 설계된 구조물을 보는 듯한 만족감을 주는 시점 전환, 나와야 할 곳에 적절하게 튀어나와 있는 인물들, 긴장을 조여야 할 곳은 완벽하게 조여져 있는 치밀함은 물론 원숙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구겨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 그랬는지 어떤 티키타카는 다소 급하고 작위적이며,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의 정서 - 로스앨러모스에 대한 애착, 공산당 입당에 대한 유보, 여자들과의 수동적이고 회피적인 관계, 핵폭발 이후의 죄책감까지 -에 완전히 젖어들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의 ‘진짜 감동’을 준 후반부 힐 박사(라미 말렉)의 루이스 스트로스 임명 반대 선언까지도 실제 사건에 입각한 것이란 걸 알게 되면, 지극히 전기 영화로서의 기능에만 충실했던 이 영화의 ‘창작물’로서의 역할에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역사에 쓰이지 않았지만 놀란이 손을 대서 삽입된 몇 가지 상상이 있다면,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호숫가 대화, 오펜하이머의 (전기를 제외한 공식적 기록이 없을) 청년기 여러 부분, 진 태트록 노출을 포함한 취조실 안의 씬들일 것이다. 호수에서의 대화는 기어이 그 내용물 자체보다는 루이스 스트로스가 찌질하게 집착했던 대상으로서의 임팩트가 더 크게 남아 아쉽지만, 빗방울이 일으키는 수면의 파동을 보며 분명 어딘가에 강렬히 사로잡혀 있는 눈동자의 청년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의 얼굴은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이 경이롭다. 제 나이의 그가 그린 중장년기의 오펜하이머, 스파이로 의심당하며 가족보다 소중한 명예를 훼손당하는 대가의 얼굴 역시 완벽에 가깝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배우가 아닌 감독의 성취일까?



여성 인물 사용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진 태트록과 엮인 모든 씬이 특히 거슬려 ‘놀란이 노망났다’는 평들이 이해가 갔다. 취조실에서 지난 인생을 낱낱이 해부당하는 오펜하이머를 말 그대로 호모사케르로 표현하기 위해 킬리언 머피를 벗기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그것도 이미 좋은 연출자가 택할 수 있는 방법치고는 참 구식인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플로렌스 퓨까지 벗겨서 취조실에 밀어넣은 시점에서, 상상 속의 진 태트록이 키티 오펜하이머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키티가 동요하는 바로 그 씬이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여자 둘이 뭐라도 교감하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이미 놀란은 레드넥 못지않게 전형적인 제1세계 백인 남성의 면모를 드러내고 만다. (아니 사실 그 이전에 산스크리트어 경귀를 외는 섹스부터 인문 오타쿠 백남이 오퍼시티 85% 정도로 느껴져 불쾌하긴 하지만…)

진 태트록의 사용은 <인셉션>의 맬(마리옹 꼬띠아르), <프레스티지>의 올리비아(스칼렛 요한슨)처럼 불안하고 관능적이고 결국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미스테리 그 자체인 여성 인물의 계보를 떠올리게 한다. ​


에밀리 블런트의 키티는 또 어떠한가. 프러시아 태생의 생물학자, 식물학자, 바이링구얼 번역가, 엔지니어의 딸, 말을 잘 타는 여자였지만 영화 속에서는 네 명의 남편을 가졌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게 오펜하이머였을 뿐인 여자로만 그려진 그. 국가와 남편의 큰 일을 위해 로스 앨러모스까지 함께 한 숱한 부인들 중 하나였던 그는 실제로 버클리 시절부터 고립되었고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는데, 영화 속에서 로버트가 술 취해 비탄에 빠진 키티에게 하는 말이라곤 ‘(우는) 애한테 안 가봐?’에 그친다.

키티 오펜하이머의 위키​만 읽어봐도 모험과 반란에 일가견이 있고 약간의 역마살이 있던 자유로운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선 로스 앨러모스에 도착하자마자 키티가 처음 한 말은? “부엌이 없다”는 것이다(나는 이 부분의 연출이 거의 악의적인 여성혐오에 가깝다고 느낀다). 핵폭탄 발명 프로젝트라는 해일을 맞이하느라 너무 바빠서 요리와 부엌 따위의 조개 줍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던 로버트는 그제서야 퍼뜩 부엌의 부재를 깨닫는다.


키티는 계속 그렇게 오펜하이머의 인간적인 삶 - 과학자가 아니라 - 을 ‘일깨워주는’ 가정의 천사 역할로만 그려진다. 청문회 참고인으로 출석해 남편을 감싸며 검사 롭을 압박할 때 잠깐 화면의 모든 남자들을 압도하지만, 그 역시 에밀리 블런트의 성취이지 놀란의 성취는 아니다. 그 대사를 넣음으로써 놀란은 최소한의 면피를 했을 뿐이다.


에스메랄다나 카르멘 계열의 위험한 여자 VS. 1960년대에나 유행했을 법한 사랑에 목숨 거는 가정의 천사

놀란이 상상할 수 있는 여성 인물의 목록은 언제나 여기서 끝이다.

이전 영화들에서 계속해서 비백인 / 여성캐릭터의 부족을 지적받았고, 그 화려한 작품 목록 중 단 한 편도 백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던 놀란이 아예 작정을 하고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 시절 과학계를 배경으로 택한 것은 아닐까 처음부터 우려는 있었다. 그리하여 자기 기준에 사소하고 귀찮은 ‘여자가 많이 안 나온다’는 비판을 피해갈 좋은 핑계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우려는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고, 말 그대로 펜스룰의 현신 같은 드라마 속에서 플로렌스 퓨와 에밀리 블런트의 분투는 반짝이고 있지만 배우의 노력만으론 근본적으로 부족함을 느낀다. 놀란이 스무 명의 과학자가 토론하면 그중 이름 없고 기센 여자 한 명을 끼워주는 것으로 선심은 썼지만, 오펜하이머 이전부터 학계에 있었던 여자 과학자들과 테크니션들의 존재를 지운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다. (오십 명쯤 되는 남성 과학자들은 3초를 등장하더라도 언급되고, 로마니츠와 알바레즈 같은 학생들까지 일일이 호명하는 마당에...) 같은 문제의식으로 지난 7월 인사이더에서 ​The women behind the Manhattan Project that Nolan's new film 'Oppenheimer' completely ignored​란 제목의 칼럼을 내기도.



그러니 <오펜하이머>가 잘 만든 / 뛰어난 / 좋은 영화인가?라는 질문은 내게 별 의미가 없다. 대신 놀란이 메멘토 - 다크나이트 시리즈 - 인셉션과 인터스텔라와 테넷 이후 차기작으로 왜 ‘그’ 오펜하이머를 선택했을까?를 묻고 싶어지지 않을 수 없다.​


바가바드 기타의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그 유명한 구절을 욌다는 일화에서부터 이미 실존 인물 오펜하이머의 강렬한 자의식은 누구나 직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서, 오만한 천재로서,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사적인 영역에서 ‘징징대는 어린애’ 같은 유약함을 드러낸 사람으로서 그 정도 자의식은 어떻게든 납득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그것에 놀란이 왜/어떻게 이입했는가다.


차기작의 소재를 생각하던 놀란의 눈에 하고많은 실존 인물 중 왜 하필 오펜하이머가 걸려들었을까. <테넷>의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와 사토르(케네스 브래너) 사용에서 부정할 수 없이 선명해진 건, 놀란이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남성 인물’에 완전히 매혹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놀란 극의 남성 인물들은 명쾌히 분류하기 어렵게 다면적이기도 하고 때론 악하기도 하고 때론 고뇌가 서려 있고 때론 나약하지만, 공통적으로 인류를 파괴할 수도 있는 어떤 이벤트의 마지막 키맨이 되어 자신의 의지로 그 일을 진행시킬 수도 중단시킬 수도 있는 즉 ‘휘말리지 않는’ 무게감을 갖는다. 그것이 바로 놀란의 사적인 흥미를 십분 충족시키는 ‘인간’의 완성형이다.


그런 놀란의 취향에 핵폭탄 발명을 주도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6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원하면 뭐든 익힐 수 있었던 천재, 인류에 대한 죄악감과 개인적인 유약함까지 모두 갖춘 이 역사적 인물(물론, 남자)이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기로 다가왔겠는가. 비대한 자의식의 사수를 위해 인류 멸망까지 쉬이 갖다 쓰는 버릇은 오랜 작품 활동에 거쳐 증명되었으니, 오펜하이머에 놀란이 이입해서 세 시간짜리 자캐쇼를 찍는 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을 지도 모른다.

오펜하이머가 살아있었다면 놀란 같은 남자를 정말 싫어했을 것 같다고 상상해본다. 그리고 나는 <오펜하이머>를 감독 놀란의 영화라기보단 배우 킬리언 머피의 영화로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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