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Sep 05. 2023

<아무도 모르게>,
롤리타의 반댓말은

마흔을 앞둔 마리-제인은 딸 루시의 파티에 온 소년 줄리앙에게 호기심과 설렘을 느끼게 된다. 이제야 15살이 될 줄리앙은 루시의 같은 반 친구로 쿵푸마스터 게임을 좋아하는 소년이다. 마리-제인과 줄리앙, 그리고 딸 루시 사이의 미묘한 감정과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낸 아녜스 바르다의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제인 버킨이 주연을 맡았다.


아녜스 바르다 & 제인 버킨의 87년작 <아무도 모르게> (원제 'Kung-fu Master!').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리스트에 올라 기적적으로 접한 이 영화는 시놉시스부터 화제였는데, 지난 봄 <유랑의 달>이 그린 어른 남자와 소녀의 '연대'를 의도적으로 거세게 비난한 내가 과연 이 영화를 좋게 봐도 좋다고 어떤 방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보러 다녀왔다.



<유랑의 달> 후 정세랑의 <절연>이나 이미상의 <이중 작가 초롱>을 읽으면서도, 최근에도 가장 걸리는 것이 있다. '판단하는 말'을 해야만 하는 순간에 대한 고민이다.

어떤 종류의 관계가 분명 아름답고 나 역시 그것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데, 동시에 분명한 목적을 갖고 그 아름다움을 어설프게 따라한 아류 혹은 그 원본의 관계 자체가 내포한 약자성에 대한 위험도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을 긋고 경계하게 될 때의 딜레마다. 정세랑의 말마따나 "이런 세계에서 사람들은 보수화된다. 그것이 즉각적인 방어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유랑의 달>과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레옹>과 <롤리타>(원작 아닌 영화)와, 노골적으로 에로틱한 로리콤의 대표적 졸작 <은교>를 포함한 수많은 오마주들의 전제는 같다. 성인이 아동을 성애의 대상으로 원한다는 것. 휴머니즘을 위시해, 갓 법적 성인이 된 여성을 내세워, 합법적으로 로리콤을 되새김질하는 것밖에 진의가 없다고 느꼈던 <나의 아저씨> 등의 드라마나, 작사가로서의 아이유 등 어떤 여자들이 의도적으로 선을 흐려놓으며 무책임하게 (아마도 자신만큼은 그것을 피해갈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의 짓궂음이 어떤 이에게나 안전한 상징으로만 머물 거라고 외면하면서) 재생산한 장르까지 따지자면 정말로 셀 수 없이 많은 레퍼런스가 있다.


<유랑의 달>의 후미가 12세의 사라사의 케찹 묻은 입술에 순간 동했고, <로리타>에서 원작의 아동성애에 대한 기민한 혐오가 제레미 아이언스의 애달픈 매력으로 인해 윤색되었고, <레옹>의 대본에는 있었으나 개봉되지 않은 레옹-마틸다의 섹스씬이 여태 논란이 되는 것처럼. '나를 유혹하는 덜 자란 어린 (여자)애'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퇴행적 욕망은 종종, 이 아니라 너무 흔해서, 그 흔함을 보고 또 누군가는 자신감을 얻고 어린 여자들은 그런 자신감에 걸려 넘어지고 삶을 한동안 유예당한다.


나는 그게 뭔지 너무 잘 알고 그래서 '연대'와 '미끄러짐'을 말하는 이상일이나 박해영 같은 창작자들의 경솔함에 때때로 굉장히 분해진다.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보고 미디어가 재연한 피해자성의 획일성에 대해 갑론을박하게 만들고(그러나 실제로 피해와 가해가 둘 다 어느 정도 균질한 공통성을 지닌단 점은 생각지 않고), '나이와 경험과는 무관한 사람 대 사람 사이의 완전한 상호 이해'라는 이상적 비현실을 숭배하게 만드는.... 그들의... 물론 많은 고민이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이 나이브하고 일면 아주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무심하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모른 체함이 정말 싫다.

<아무도 모르게>가 바로 그런 영화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으면서도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동일시될 무언가를 찾을까봐 불안했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



그러나 동시에, 전제가 다르다. 그간 셀 수도 없이 재현되어 온 로리콤 '장르'는 성인 남성의 미성년 여성에 대한 착취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악착같이 미화한다. 그리고 남겨진/살아남은 여자들은 대체로 자기의 아저씨를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나게 휘청거린다. 기댈 데 잃은 그들의 방황이 극 중에서 추가로 그려질 경우엔 주로 성적 방종이나 성 엄숙주의적 태도로 이어진다. 어떻게든 섹스를 둘러가며 소녀의 (남자의 상실로 인한) 성장을 은유하고 싶어하는 창작자들의 욕심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유랑의 달>의 사라사가 어린 시절 후미와의 분리 이후 바로 그 사건과 친족 성범죄의 트라우마 탓으로 새 남자친구와 '정상적인' 섹스를 하지 못하고, 그런 사라사를 다시 구원하기 위해 후미가 거리로 달려나오는 바로 그런 연출.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가 과연 그런 '모른 체 하는' 영화인가. 35세의 싱글맘과 15세 소년이 나눈 사랑을 말하는 이 영화는 오히려 추함을 직시하는 듯하다. 영화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은 제인 버킨의 노쇠이고 나이 든 그가 구현하는 연정이지, 그 대상이 되는 어리고 왜소한 남자아이의 에로스적 피동성이 아니다. 그렇기에 메리제인과 줄리앙이 사랑을 말하러 외딴 섬으로 떠났다가 금세 현실로 돌아오고, 또 가족에게마저 멸시받고 완전히 분리된대도 줄리앙은 '제대로' 성장하는 것이다.

메리 제인과 접촉을 금지당한 이후 6개월 동안 쿵푸 마스터 게임을 깨려 노력한 그애는 드디어 공주를 구하고 메리 제인에게 자기 소식을 알리려 하지만, 죽은 사람에게 보내는 듯한 유치 편지처럼 진심은 닿지 못하고 소년은 빠르게 먼 과거가 된 욕망에서 흘러나온다. 소년은 패인 흉터도 핏자국도 하나 없이, 다른 소년들 앞에서 "잘 만한 여자는 아니었어"라는 허세로서 '진짜 남자'로 무사히 진입한다.


영화는 또한 성애와 성관계의 정확한 분리에 섬세히 집중한다. 키스나 엄마를 찾는 듯한 동작 이상의 섹슈얼한 접촉을 그리지 않고, 그 키스마저 소년의 긴장감 서린 패기를 보이기 위한 귀엽고 어이없는 씬으로 소비한다. 어린애와 닿고 싶지만 닿으면 안 돼서 홀로 애틋해하며 안달난 듯한 어른 남자의 익숙하고 역한 표정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메리 제인 - 버킨은 오히려 아이를 돌보는 엄마 같은 생활-예술인의 제스쳐에 더 집중하는 배우다.

영화에선 그 동작이 이런 나레이션으로 설명된다 : "아들이 없어서 어린 소년과 사랑에 빠진 걸까?" 복잡한 대답을 부르는 도발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아들 가진 엄마들의 돌봄, 배타적 모성애(주로 아들의 연인 혹은 자기 딸을 밀어내는), 그리고 위험하지만, 이성애까지의 경계를 부단히 미끄러지며 아녜스 바르다는 그 자신 역시 아들 가진 엄마임을 관객에게 기이한 재기발랄함으로 각인시킨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가장 끈질기고 교묘하고 당연하게 무성애화되어 온 성연령 집단을 꼽으라면 바로 '아줌마'로 통칭되는 중장년의 기혼 여성 아닐까. 그들의 욕망이 철저히 무시되고 안개 속으로 돌아가는 방식, 남성 커뮤니티 안에서 그들이 특정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취향으로 당사자가 전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소비되는 방식, 보복처럼 가끔 불려나와 수치를 겪는 방식을 돌이켜본다.

<아무도 모르게>를 찍을 때 제인 버킨은 막 40세가 된 참이었고 나이 듦과 외로움, 익명이 되고 싶은 욕구에 깊이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서로의 뮤즈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바르다와 버킨 두 여자들. 그들은 영화 안에서 밖에서 "Are you ready to die for love?"라는 에이즈 예방 운동의 슬로건에 맞부딪히지만 동시에 거기서 어느 정도 비껴서 있다고 기대된다. (당시 아녜스 바르다의 전 남편 자끄 드미는 커밍아웃 후 가족을 떠난 상태였음을 기억해보자.)

그러니 <아무도 모르게>가 단지 소년에 대한 성애를 긍정하기 위한 쇼타콤적 로맨스 영화라는 매우 단순한 서술만큼 우스운 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성인 여자를 음흉하게, 소년을 당돌하게 그려내는 전복을 통해 기형적인 롤리타 콤플렉스에 정면으로 대항할 뿐 아니라 (사실 그건 어떻게 보면 곁다리처럼 느껴질만큼), 나이든 여자의 내밀한 애착과 한심하리만치 오래 가는 외로움에 대해서도 강렬히 발화하고 싶었을 그들의 실험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초점은 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관계를 억지로 발생시키고 이어가고 좌초당하는 여성에게 가 있다.



루시와 메리제인, 그리고 메리제인의 영국인 어머니가 그려내는 모녀 관계도 이야기되어야 한다. 제인 버킨과 세르주 갱스부르의 딸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연기한 루시는 자기 생각보다 엄마를 잘 알고 이해하는 딸이다. 그러나 남자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전형적으로 엄마보다 똑똑하고 현명하고 시니컬한 딸이기도 하다. 딸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딸도 자기 이해를 바라지 않는 관계의 냉담함 속에서 메리 제인은 자기 엄마(역시 제인 버킨의 진짜 어머니가 연기했다)에게 어린아이처럼 무한한 이해를 갈구하는 딸이 된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주는 조언이란 건 정말이지 파격적이기 짝이 없다. '넌 잘못한 게 없어, 루시는 우리가 봐줄 테니 줄리앙을 데리고 그 섬으로 가야 해. 운명적인 사랑을 즐겨야 해'라며, 마흔이 되어가는 딸에게 열다섯 살짜리 손녀의 친구와 한때의 격정을 누리길 원하는, 그 말도 안 되는 어머니의 태도. 줄리앙과의 키스를 루시에게 들킨 후 망연해진 메리제인의 얼굴 위에, 상황보다 선행하는 앰비언트로 삽입된 소리라 더 환상처럼 들리는 이 솔루션은 곧 메리제인의 완전한 고립까지도 예지하는 것 같다. (GV에서 이경미 감독은 그저 '기술적 고민' 탓이 컸을 거라고 해석했지만ㅋㅋㅋ)


이 모녀들의 관계를 찬찬히 되짚다 보면, 그리고 소년이 너무 비참pathetic해보여서 최초의 관심이 갔다던 오프닝의 메리제인을 생각하다 보면, 이 영화가 "사랑이 부재한 이야기"라고 단언했다던 바르다의 진심을 아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 사실은 갈망하지도 않았던 것. 오로지 사랑을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뿐이었고 사랑에는 사랑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

매거진의 이전글 <오펜하이머>, 반전 없는 놀란의 자의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