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떤 말로도 <유랑의 달>이 암시를 넘어 명시하는 소아성애의 그림자를 지울 수는 없다. 그것을 아는지 사람들은 대부분 빛과 물과 맨발의 연출을 이야기하고 홍경표 감독의 카메라가 얼마나 사람의 따뜻한 시선을 닮았는지, 얼마나 사실적이면서도 사실보다 몇 배 더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카메라의 시선 너머 담긴 풍경의 당위나 윤리를 이야기해야만 하는 때는 반드시 온다.
이 영화는 이상일의 영화 가운데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특정한 윤리적 기준을 갖추고 비판적으로 독해해 주기를 요구하는 영화고, 그래서 몹시 어렵고 기피하고 싶어지는 영화다. 어떤 면에서는 <악인>과 <분노>를 거쳐 무르익어온 이상일의 비-도덕-연대에 대한 고려가 이제 확신을 갖고 선언된, 분기점이 되는 영화 같기도 하다.
"후미와 사라사처럼 연령, 성별, 인종과 같은 경계를 넘어, 어떤 이유 없이도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순간, 그런 진실한 관계를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이상일 감독은 말했다. (링크)
물론 그 어떤 통념에도 붙들리지 않는 자유롭고 영속적인 애정에 기반한 관계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물론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그런 것을 갈망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1) 그것을 갈망하는 것과 2) 현실에서 재현하는 것과 3) 재현을 넘어 스크린에 박제하고 현실로 끌어오는 것은 각기 완전히 다른 차원의 행위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선해해보자면, 이상일 감독이 <유랑의 달>의 기이한 연대를 통해 사회적 논의의 장에 올려보고자 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 같다.
1) 성기 성장 장애를 가진 사람(남성ㅎ)의 트라우마가 그의 성인기에 미치는 영향
2) 친족 간 성폭력의 트라우마로 성인이 되어서도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여성에게 강제되는 성생활
3) 그 둘이 만나서 이루는 관계가 반드시 성애적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논의 (심지어 그게 연인 관계일지라도)
3-1) 그 관계가 완전히 배척받는 이들끼리의 ‘폭넓은 구원’(* 김소미 기자의 표현을 빌림)으로 해석될 수는 없는지에 대한 논의
하나씩 말해보자면, 우선 성기 장애로 인한 성장 트라우마는 (앞서 누군가 지적했듯) 장애학이나 아동 교육학의 관점에서 먼저 다뤄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후미는 어딘지 왜소하고 주눅 든 남성이며 성인 간의 자연스러운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그가 10대 이후 마땅히 겪었어야 할 2차 성징이 오지 않아 성기 왜소증을 가진 사람이며, 이로 인해 어머니 등 가까운 가족들에게 ‘잘못 태어난’ 아이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게 원작 소설과 이상일 감독의 설명이다.
하지만 후미의 회상 등 여러 연출로 미루어보아 후미는 성기가 작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어머니가 자신을 경멸하듯 쳐다보는 눈빛, 정원의 자라지 않는 나무를 뽑으며 그것을 후미와 동일시하는 듯한 태도에서 트라우마를 얻은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이상행동의 발원지는 음경 왜소증이 아닌 어머니라는 인생 최초의 여성과의 관계 형성 차단이다(이 부분에서 서사가 급격히 낡고 지루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넘어가도록 한다).
영화가 그것을 해결해 주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직시하기 이전에는 후미와 사라사의 만남을, 후미가 사라사와 헤어진 뒤 유폐된 시절을, 후미와 성인 사라사의 재회를 좀체 긍정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가 남성의 좌절된 성적 욕구로 인한 범죄마다, 그와 친밀했어야 할 여성들(어머니 등)이 친밀하게 굴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노의 근원으로 꼽히는 부당한 일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친족 간 성폭력 역시 마찬가지다. 사라사가 후미와 재회하기 전 료와 사귀며 감내한 원치 않는 성생활은 료-사라사의 관계 내에서 먼저 해결되었어야 옳다. 어린 시절 성폭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납치로 인한 성적 학대가 있었다고 믿는 주변인들의 반응을 사라사는 예민하게 캐치해왔을 것이므로)으로 인한 트라우마 치료나 그 어떤 직접적 언급 없이, 그저 ‘이런 사라사에게는 저런 후미가 가장 최적화된 짝꿍이다’를 말하는 것은 (아무리 극 중일지라도) 성폭력 피해 아동의 방치에 더 가깝다. 료에게 구타당한 사라사가 피 흘리며 도망치다가 후미를 만나는 씬의 연출은 거의 저열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역시 데이트 폭력과 가정 내 폭력에 대한 조치 없이 임시적 구원자를 제시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라서 동성 사회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소외받아온 사라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 “난 불쌍한 애가 아니야”인 것은 좀 너무하고 미약하고 남성의 상상이 한껏 개입된 결과물 아닌가.
성인인 이성이 둘 있을 때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관계, 유형화되지 않고 분류될 수 없는 연인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들의 관계가 반드시 성애적일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이상일과 관점이 일치한다. 하지만 후미와 사라사의 관계가 ‘배척된 사람들 간의 폭넓은 구원’으로 해석되어야 하는지는 다른 문제다. 앞서 말했듯 후미와 사라사를 연인으로 만들기 전에, 모든 사라사가 료와 반드시 섹스하지 않아도 연인으로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선행하지 않고(좀 더 구체적으로는, 동료 여성 ‘언니’들의 인정을 빌린다든지), 모든 후미가 작은 성기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부모에게 혐오 받지 않을 수 있도록 부모 교육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후미와 사라사의 탈출은 별 의미가 없다.
게다가 후미와 사라사를 둘러싼 언론과 경찰, 대중, 부모의 태도를 그리는 이상일 감독의 시선은 민망할 정도로 부피감 없고 단순하다. 그들은 후미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잘 모르는 채로 조롱하고, 남 일이니까 더욱 쉽게 ‘알지 않기’를 선택한다. 어느 정도는 사실적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분명 과장되어 있다. 사라사와 후미를 선한 사람들로 지정하기 위해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무심한 순수악이 되어야 한다면 그건 이상일이라는 스토리텔러의 한계로 느껴진다.
후미와 어린 사라사의 과거에 어떤 성적인 기류가 흐르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사라사는 몰랐지만, 후미가 어린 사라사의 입술에 립스틱처럼 묻은 케찹을 보고 욕정하는 장면은 역겹다. 그가 성인 여성과 제대로 관계 맺지 못하고 ‘과거의 사라사’가 현재로 나타난 상황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안타깝게도 역시 역겹다. 어린 사라사는 놀랍도록 매력 있는 중저음 발성을 가진 애어른으로 그려놓고 다 큰 사라사는 일반적인 일본의 성인 여성처럼 가냘프고 높고 예쁜 어조로 말하는 것도 역겹다. 후미의 모든 이상 행동이 성기 장애에서 기인한다는 단순하고도 맥 빠지는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이 단연 최고로 역겹다. 하지만 이상일은 그 역겨움마저 관객이 채택한 내면적 도덕의 힘이라고 믿고 그것을 함께 깨보자고 말하려고 (대체 왜?) 시도하는 듯하다.
관습이나 윤리는 모두 인간의 합의에 의해, 다수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영구하지 않고 언젠가 반박당할 수 있다. 이상일이 소외자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십수 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천착하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그는 그 ‘다수의 합의’에 반하는 이들, 속된 말로 말하자면 ‘사회적 합의가 형성될 때 쪽수에서 밀린 이들’을 옹호하고 싶은 욕망에서 모든 이야기를 전개한다.
어찌 보면 아가페적 인류애를 논하는 출발점이 되고 싶었던 시도 같다. 그러나 이런 출발은 아무래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 주변에 실존한다면 이해했을 것이지만, 자신이 선택해서 그려내기 전에는 특정한 관계에 대해 대중이 무조건 분노를 느낄 것이며 그것이 반드시 배제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단한 이상일의 태도는 조금 견디기 힘들다.)
이상일 역시 잘 알겠지만 세상에는 성애로 인정받으면 안 되는데 성애라고 불리는 온갖 종류의 이상성욕과 범죄가 있고, 그걸 악용해 약자를 제 입맛대로 착취하는 사람도 반드시 있다. 그의 바로 전작인 <분노>에서조차, 미성년들이 자신에게 가진 친밀한 호의를 이용하고 그들을 배신하고 미성년 여성이 미군에게 강간당할 때 관음하며 기이한 욕구를 채운 성인 남성이 등장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그 강간 장면은 추후에 많은 사람이 지적했듯 과하게 길고 자세했고 피해자 여성(그때도 히로세 스즈가 연기했던)의 얼굴에 집중된 카메라는 필요 이상으로 관음적이었다. 이상일은 분명 ‘전적’이 있는 남성 감독이고, 그래서 나는 그의 ‘관점’ 자체를 별로 신뢰할 수 없다.
사람 대 사람의 온전한 이해를 찾아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 이 영화를 아름답다고 결정할 수 있는 사람과, 아무리 완벽에 가까운 이해가 일어났더라도 성인과 아이의 유대관계는 절대 공평할 수 없고 그래서 ‘불쾌해하기로’ 결정하는 사람 사이에는 넓고 깊은 강 같은 게 흐른다. 예전이라면 나는 전자이거나 최소한 전자의 관점을 진심으로 수용할 수 있는 후자였을 것이다. 이제 나는 전자를 굳이 설득하고 싶지 않은 후자에 가깝고, 경험에 따른 내 판단을 누가 협소하고 오만하다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지만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친구, 연인, 스승, 무엇으로든 규정할 수 없는 관계의 (안전한) 성인을 처음 만나본 아이의 환희와 애착은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왜 그런 관계는 성인 남성 대 미성년 여성의 관계로 나타나는 경우가 압도적인가. 이제 내게는 현실의 여자아이들의 안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화두고 의제다. 이미 갓 스무 살이 된 여성과 30대 남성의 ‘연애’를 제지하지 않는 사회, 20대 후반의 여성과 40대 남성의 결혼이 아름다운 상호 구원의 실례로 매스컴을 타는 사회에서 10세 아동과 19세 갓 성인이 만났다가 10년 후쯤 재회해 어렵게 이상향에 도달하는 결실을 맺는다는 이야기는 분명 위험하다. (의제 강간 연령 제한이 만 13세에서 만 16세로 상향된 지 채 3년도 안 된 나라에서 봐야 하는 이야기는 분명히 아니기도 하다.)
어떤 이는 이상일의 문제 제기를 ‘분노에서 기인한 배제의 정서’에 대한 시기적절한 경계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에 동의할 수가 없다. 이건 관용이나 상상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