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바그의 시작과 끝, 그리고 아메리칸 뉴 시네마와 하이브리드 다큐까지
1959년, 건물과 차로 뒤덮인 파리 시내 전경으로 어떤 이야기가 시작한다. 외롭고 장난기 있는 소년이 반항아로 낙인찍히고, 부모와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은 그의 내면의 고통에 전혀 관심이 없고, 소년이 비존재의 위기를 타개하려다 점점 더 큰 곤경에 처한다는 (지금은 너무나 흔한) 이야기.
결석하고 간 놀이공원과, 가출해서 잠시 잠들었던 인쇄소와, 타자기를 훔치러 들어간 새아버지의 회사와, 소년원을 거쳐, 기어이 달음박질해 도달한 바다. 그러나 뉴-웨이브를 선도한 카메라는 결국 비정하다. 도망친 그곳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밀어내는 바다에 망연해진 소년의 눈동자를 줌인해 영원히 얼려버린다.
28세의 프랑수아 트뤼포는 이 이야기로 칸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누벨바그의 황금기를 연다. <400번의 구타>는 60년이 지난 후에도 “모든 성장영화의 시초”라고 불리고 있다. 주연인 소년 앙투안 드와넬을 연기한 14세의 장 피에르 레오와 트뤼포는 그 후로 20년간 총 5편의 ‘앙투안 드와넬’ 연작을 함께 찍었다.
1996년, 정신없는 사무실에 이질적인 외모의 동양인 배우가 도착하면서 전혀 다른,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가 시작한다. 배우는 진짜 장만옥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매기’. 그를 먼 프랑스까지 불러낸 르네 비달 감독은 80년 전 무성영화 시절의 <뱀파이어>를 리메이크하려는 심산으로, 신비로운 히로인 ‘이마 베프’와 그를 연기했던 전설적인 배우 무시도라를 매기가 제 눈앞에 재현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르네 감독의 강박적 고집, 스태프들 사이의 오래된 불화, 중국인 여성 주연을 탐탁잖아 하는 프랑스 영화계와 투자사의 압력으로 촬영에는 진전이 없다. 만드는 르네가 신경증 발작을 일으킬 만큼 자기 작업물을 못마땅해 하는 동안, 연기하는 매기는 오히려 점점 이마 베프에 몰입해 완전히 동화되고, 함께 하는 스태프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매기를 사랑하거나 지켜보거나 배반한다. 결국 르네는 자취를 감추고, 매기는 명목상 해고되지만 곧바로 리들리 스콧을 만나러 미국으로 떠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그 사람들에 의한, 그 사람들을 위한 영화인 1996년의 <이마 베프>는 누벨바그를 보고 자란 ‘누벨 이마쥬’ 세대의 종말마저 알리는 작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1959년의 앙투안 드와넬이었던 장 피에르 레오는 여기서 심신이 쇠락해가는 르네 비달 감독을 맡았다.
1959년과 1996년 사이를 잇는 가장 명징한 단서는 단연 장 피에르 레오라는 존재 그 자체다. 1996년의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프랑스 영화계를 회초리질하고 영화인으로서의 처지를 자조하기 위한 영화를 만들면서 장 피에르 레오를, 그리고 장만옥을 캐스팅한 데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아사야스는 프랑스 영화라는 위대한 지적 문화적 유산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뛰어난 영화쟁이다. 앙드레 바쟁이 창간하고 젊은 트뤼포와 고다르와 에릭 로메르가 몸담았던 ‘카이에 뒤 시네마’, 거기에 그도 있었다. 또 한편으로 그때 그는 밥줄이 영화계의 존망에 달려있던 데뷔 십 년 차의 젊은 감독이기도 했다. 그래서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프랑스 영화계가 ‘기울고 있다’거나 ‘위기’라는 애매한 회피형 언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절박한 사람은 에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작정하고 프랑스 영화라는 하나의 세계가 ‘대차게 망한’ 모습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보여주고 한탄하고 저주한 것이다. 이토록 코믹하게, 이토록 가슴 아프게.
이 망국의 서사 속, 나이 든 장 피에르 레오의 얼굴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 감독이 되는 꿈을 가졌으나 세상에서 내쫓긴 소년 앙투안과, 결국 전설적인 감독이 된 앙투안은 같은 배우의 얼굴을 빌려 영적으로 연결돼 있고 소년 ‘르네’는 ‘르네 비달’ 감독에게 이름을 승계한다.
1959년에 타자기를 훔친 두 소년 공범 중 하나는 감화원에 가고 하나는 포근한 집으로 돌아갔다. 호시탐탐 소년을 떼어 놓을 궁리만 하던 와중에 잘 걸렸다 싶어 일절 변호하지 않은 부모를 둔 소년은 앙투안, 어른의 손에 이끌려 문 너머의 앙투안을 보고도 지나가버린 소년은 르네. 선생 앞에서 서로를 감싸주고 가출했을 때 잘 곳을 내어줄 정도로 절친했던 아이들 사이에는 마음만으로 메꿀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겼을 것이다. 그들이 살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면 그 역시 영화적이다.
이 운명의 교차, 단죄와 면죄의 교차, 억울함과 죄책감의 교차에 떠오르는 다른 영화가 있다. 2022년에 1980년대의 레이건 시대를 다룬 <아마겟돈 타임>이다. 두 소년이 컴퓨터를 훔치는 장면은 뒤늦게 트뤼포의 오마주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똑 닮았다. 심지어 주범과 휘말린 사람의 구분이 확실한데, 유대계 가정의 사랑받는 소년은 제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훈방되어 어른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단 한 명의 가족도 없게 된 슬럼가 출신의 흑인 소년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남는 것도 같다. 인종과 계층까지 갈렸던 그 둘은 살면서 절대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겟돈 타임>은 기본적으로 지난 시절의 낭만에 대한 향수가 짙게 밴 영화고, 감독인 제임스 그레이는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계승자로 불리는 이다. 그래서인지 이건 마치 제임스 그레이가 흑인 소년 죠니를 이 시대의 앙투안으로 (먼저) 보았고, 새 시대의 앙투안-죠니를 달래기 위해 그에게 유대계 중산층 소년인 폴을 주어 <400번의 구타>에서 미처 말해지지 않은 부잣집 소년 르네의 속을 풀어놓은 이야기인 것만 같다. 르네도 미안했을 거야. 르네도 뭘 몰라서 그랬을 거야. 르네는 아마 평생 네 생각을 했을 거야, 앙투안.
또 <400번의 구타> 속 앙투안 가족이 사는 좁고 기다란 아파트는 낡은 계단을 매개로 2020년의 <가가린>과도 이어진다. ‘가가린’은 1960년 이전 프랑스 남부 공업단지의 노동자 밀집 거주 지역에 지어진 공공 주택단지로, 실재하는 가가린은 2019년 이미 철거되었지만 영화는 다시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 거기 살던 이들의 초상을 그린다.
<이마 베프>에 수시로 등장한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푸티지처럼, <가가린> 역시 영화 오프닝과 엔딩 장면에 실제 ‘가가린’의 시작과 끝을 담은 푸티지를 꽤 길게 삽입한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하이브리드 장르면서도, 집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하려는 의도에 충실한 낭만이 픽션 곳곳에 보인다.
손재주 좋은 흑인 소년 유리는 무너져가는 아파트 이곳저곳을 고치며 좁고 높은 계단과 복도를 유령처럼 누빈다. 퇴거 명령을 받았음에도 갈 곳 없고 갈 수 없었던 유리는 주민들 중 마지막까지 남아 자신만의 우주선을 짓는 데에 몰두한다. 유리도 앙투안처럼 새 남자를 찾은 어머니에게서 버림받고 집을 잃지만, <가가린>은 그에게 이란계 이주민 우삼, 집시 소녀 디아나, 터키계 양아치 달리, 이웃 어른들을 친구로 주어 결국 앙투안처럼 혼자 되게 두지 않는다.
그러나 앙투안 - 또는 그를 잡아먹고 큰 르네- 은 이 섬세한 영화들의 애정 어린 위로에도 불구하고 그리 곱게 늙지 못했다. 1996년의 르네는 평범하게 재수 없는 프랑스 영화계 백인 남감독답게 매기를 ‘마술, 환상, 신비, 강인함, 모던’이란 표어 속으로 구겨 넣어 대상화한다. 그는 능력이 없고 매기의 동양적인 ‘신비로움’이 죽어가는 자기 영화 인생의 활로를 뚫어주기 바라므로 실망스럽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추억 속 소년의 이미지는 강렬했지만, 그 강렬함이 ‘잘 크는’ 일을 보장할 리는 없다.
나이 든 르네-앙투안은 아주 성공적으로 프랑스 기성 사회에 녹아들어 엘리티시즘, 오리엔탈리즘을 기본 덕목으로 갖춘 흔한 제1세계 노인이 됐을 뿐이다. 이는 말년에 고다르와 결별하고 몇몇 영화가 흥행하지 못하면서 ‘보수주의자’로 공공연히 비판받은 트뤼포를 연상시킨다. 그는 이제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같은 후배 영화인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노골적인 조롱의 대상이 되어 머나먼 동양에서 영화 보는 여자애들의 웃음을 산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매 맞는 앙투안, 도망갈 곳도 없는 앙투안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젊은 장만옥이 오토픽션적 연기로 구현한 매기는 또 어떤가. 이미 홍콩에서 슈퍼스타였던 매기-장만옥은 영화적 도전을 위해 수락한 르네의 영화에서 계속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스태프들은 그에게 친절하려고 애쓰지만, 박봉과 고강도 노동과 르네 감독의 변덕에 질려 이미 전원 번아웃된 상태다. 심지어 그를 적극적으로 캐스팅해 온 르네 감독마저 ‘지금 저 이가 내 디렉션을 알아들었는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어쩔 수 없지’란 식으로 묘하게 성의 없는 태도를 취한다.
영화에 등장한 프랑스 영화계의 남성들은 권위가 있든 없든 매기에게 일관되게 하대하는 투를 쓴다. 매기를 인터뷰하러 온 잡지사의 남자, 이마 베프’를 홀려야 하는 매기의 상대 역 남배우, 매기가 중국인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못마땅해하다가 자리가 나자 냉큼 매기를 해고하는 르네 감독의 친구 호세 감독까지도. 그들은 매기가 뭘 알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매기의 경험과 지식과 취향을 깡그리 무시하고 때로 매기에게 무례하게 윽박지르는 아주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며, 사실 그런 경멸은 르네의 숭배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여자들 역시 매한가지긴 하다. 친절하고 착한 의상 담당 조이는 친한 스태프들끼리 연 홈 파티에 매기를 선뜻 초대해 매기에게 유일한 위안 같은 시간을 선사했는데, 사실 매기에게 성애적 호감을 가졌다. 그것만으로는 전혀 비난할 여지가 없지만, 자기 친구에게 매기의 영화 코스튬에 대한 야한 암시를 흘리기를 서슴지 않을 때는 매기에 대한 존중을 성적 호기심이 압도해버린 모양새다. 조이는 사이가 좋지 않은 스태프에게서 정키로 의심받는 내내 결백을 주장하고 매기의 비호를 받기까지 하는데, 알고 보니 마지막 밤 매기를 클럽에 데려간 날 그의 가방 속엔 다량의 마약이 이미 준비돼 있었다.
매기의 스턴트, ‘이마 베프’의 그림자 역할을 하던 조연 배우 로르는 호세 감독에게서 대신 주연을 맡으라는 명백한 사인이 오자마자 두말하지 않고 자기 기회를 받아들인다. 조이와 로르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 호감을 느낄 만한 인물들이었지만, 스태프들 모두가 (어쩌면, 너무 지친 나머지) 매기의 영화적 토양 - 이미 왕가위와 장편 4편 이상을 작업한 이후였던 -에 대해 질문조차 않았다는 사실은 곱씹을수록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대표적으로 잘못된 ‘프랑스 영화계의 태도’였던 것은 아닐까.
늙어버린 장 피에르 레오의 얼굴처럼, 젊은 장만옥의 얼굴 역시 이 상징적인 영화의 기둥이다. 장만옥의 얼굴은 기본적으로 망국의 설움을 품고 있다. 공리와 다른 듯 비슷하게 그는 쇠락해가는 문명, 가망조차 없게 망한 사랑을 타고난 아우라로 표현하는 데에 특화된 배우다.
이런 장만옥이 처음 맛본 프랑스 영화계의 가차없는 무관심에 설핏 당황해하는, 아주 능숙하게 연기의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는, 마찬가지로 아주 능숙하게 친절의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며 남들을 (주로 남자들을) 달래는 표정이 화면 위로 표류하며 사람을 옭아맨다.
모두가 그를 ‘말수가 적은’ 동양의 신비로운 미인 취급하고 그는 끝까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마저 때때로, 필연적으로 매기를 오해하고 있다. 이마 베프 배역에 완전히 몰입해 정말로 타인의 호텔 방에 잠입해서 애인에게 버림받은 여자의 목걸이를 훔쳐 나온 게 ‘매기’의 진짜 얼굴이라면. 마지막 밤, 클럽까지는 따라갔다가 조이의 간청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택시 차창 속 매기의 파리한 얼굴만이 진짜 장만옥의 얼굴은 아니었을까.
영리하게도 젊은 장만옥과 나이 든 장 피에르 레오를 한 쌍으로 내세운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뛰어난 전략 덕분에, 그리고 슬퍼할 거리조차 차고 넘치는 프랑스 영화의 혁혁하고 유구한 유산 덕분에, 한 국가 한 산업에 ‘망조’가 들었다고 한탄하는 영화조차 얼마나 예술적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만 깨닫는다. ‘망조’라는 건 무언가 한 번 제대로 흥해봤던 나라의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것. 그것이 부럽고 질투 나고 새삼 놀라웠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