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쓴 일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망했는가
※ 23/02/26 여성신문 기사는 이 글을 바탕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취재 없이 쓰인 플롯, 무리한 연출, 과장된 대사. 성적표를 요약하자면 B급도 못 되는 C급이다.
대기업 인하우스 광고대행사에서 사상 최초 여성 임원이 된 주인공의 사내 정치 암투극을 그린 <대행사>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광고대행사라는 특정한 업계 환경을 극사실주의적으로 구현하고, 능력 있지만 내면의 상처도 있는 여성 노동자의 성장을 묘사한다는 기획 의도를 놓치면서 주연 배우들의 연기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무참히 실패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시청 전까지는 어떻게든 옹호해주고 싶은 드라마였다. 왓챠 별점이 놀라울 정도로 낮았고, 또 놀라울 정도로 특정 직군 종사자들이 뚜렷이 존재를 드러낸 한줄평이 많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묘사된 모습이 ‘현실과 다르다’며 분기탱천한 광고업계 남자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니 드라마가 꼭 다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온갖 전문직과 무역 증권 연예 IT… 번듯한 업계들을 무대로 한 오피스 드라마가 난무할 때는 똑같이 과장된 대사, 허접한 취재, 초현실 설정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도 얹지 않던 남자들이, 이제야 처음 자기 업계가 주인공이 되고 나니 후다닥 튀어나오는 게 너무 없어 보였다. ‘하필’ 여성 주연 오피스물에 괜히 찬물 끼얹는 심술로도 보여서, 이건 보편적인 회사 생활을 다루려다 우연히 광고대행사가 소재가 된 드라마일 뿐이지 너희가 주인공 되는 자리가 아니라고 화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그런데 <대행사>의 무모함과 무지함은 예상보다 더 대단한 수준이었다.
1화 오프닝부터 주인공 고아인(이보영)이 제작한 게임 광고는 동료 남성들의 심기를 거스른다. 백마 탄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도질하기 위해 기다린 여자가 왕자의 백마를 벤 뒤, “왜, 다른 여자애들 같지 않아서 놀랐어?”란 내레이션으로 끝맺는 영상이다. 이 유치한 광고를 두고 멍청한 남자들은 “이거 남혐 아니에요?”라며 분개하고, 실력과 논리로 무장한 아인이 남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렇게 단순하고 철 지난 연출로라도 현실과의 경계를 고의로 흐리면서 페미니즘-판타지적 세계관을 명확히 하려는 것인지 순간 흥미가 돋지만, 이후 회차들은 이 기대를 완전히 배반한다.
일례로, 아인의 의사 친구는 불면과 강박을 낫게 하기 위해 전두엽을 활성화해야 하니 남자와 성관계를 맺으라는 솔루션을 두 번씩이나 강조하면서 “그 임자 없는 몸뚱아리 좀 굴려보라고” 얼토당토않은 충고를 한다. 11화에서 아인은 그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듯 “그래,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뚱이”라는 말을 남긴다. 직후 장면에는 시내 호텔을 전경으로 ‘아인의 가쁜 숨소리’ 사운드가 섞이더니, 천천히 달리는 아인이 카메라에 잡힌다.
꾸준히 섹스를 은유하는 척하다 마지막 순간 방향을 틀어버린 이 장면을 제작진은 유머러스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유머’는 아인이 일하는 동안 룸살롱에서 여자를 끼고 접대받는 경쟁자 남성들의 술자리에서나 통할 법한 저열한 유머다.
이런 장면들을 연출하며 여성의 ‘주체성’을 운운하는 태도는 패셔너블한 페미니즘의 탈을 쓰고 시청자를 기만하는 것에 가깝다. 이쯤 되면 어느 직업군을 다루든 상관없었을 오피스 드라마가 굳이 광고대행사로 무대를 좁힌 의도부터 의심스럽다. 누군가의 니즈를 대신 처리해 주는 업계라는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성 프로페셔널에게 꾸밈노동을 당연한 의무처럼 강요하는 악습을 남겨둔 유일한 업계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실제로 ‘화장하지 않는’ 카피라이터 원희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승진에서 번번이 미끄러졌다고 명시되기도 한다.
“형식이 본질보다 중요할 때도 많다”는 핑계로 인형 놀이하듯 매회마다 옷을 세 번씩 갈아입히며 예쁘게 꾸민 이보영과 손나은을 드라마의 셀링포인트 삼은 제작진과, 상무가 된 아인에게 능력 있는 임원이 아닌 그룹사 ‘얼굴’이 되어줄 것을 주문한 오너 일가의 사고방식에 큰 차이는 없는 듯하다.
남성 감독과 남성 작가가 30년 전쯤 유행했을 것 같은 인물들을 내세워 주체적 섹시함, 주체적 꾸밈을 여성의 ‘주체성’이라 우기는 건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그저 우스울 뿐이다. 지금은 <섹스 앤 더 시티>가 처음 방영한 1998년도 아니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유행했던 2006년도 아니다. 해당 작품들의 후속 격인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 주어진 처참한 평가를 보고도 느낀 게 없었단 말인가.
게다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업계 트렌드 리더이자 ‘돈에 미친 소시오패스’로 묘사되던 아인은 정작 중요한 순간마다 남들에게 한참 못 미치는 전략가로 그려진다. 과하게 흥분해 괜한 공격성을 보이거나, 타인의 묘수에 쉽게 휘둘리는 모습만 실컷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한테나 이빨을 드러내는 미친년”처럼 보여도 실은 다 계산된 전술이었다는 게 아인의 컨셉이지만 그 이빨조차 너무 엉성하고 허접해 아쉬움을 자아낸다.
현실의 일하는 여자들, 하다못해 카피라이터 은정이나 원희 정도만 되어도 드라마 속 아인보다는 똑똑할 텐데, 이건 마치 남성 제작진이 아무리 열심히 머리 굴려 ‘똑똑하고 진취적인 여자’를 상상해 봤자 겨우 이 정도 그림밖에 그리지 못한다는 선고와도 같다.
결국 아인이 당면한 문제 해결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건 항상 선배 정석(장현성)이나 후배 병수(이창훈)다. 그들은 아인에게 없는 인성과 참을성을 지녔고, 양심도 있고, 실력도 제법 좋고, 억울한 사정도 있고, 기 센 여자들에게 조금 밀려도 수긍하고 조언해주는 ‘무해한’ 조력자 남성을 상징한다. 이렇게 현명하고 신중한 남자들은 눈이 시릴 정도로 노골적인 남성 제작진의 욕망이 투영된 페르소나로 보인다.
주연 인물의 설득력 있는 서사 구축에 완전히 실패하면서 자연히 현실의 광고대행업계 역시 모독당한다. 변변한 카피 한 번 등장하지 않는 데다, 중요한 PT나 회의 장면마다 정말 알고 싶은 광고사의 '일하는 방식'에 대한 묘사는 물 흐르듯 생략되고 남는 것은 진절머리 나게 유치한 기싸움뿐이기 때문이다.
부당한 구속수사 피해자를 데려다 국채를 횡령한 기업인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광고에 활용하고 아이를 잃은 엄마의 사연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는 것 외에 남은 디테일도 없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나 <미생> 등 유사한 장르 명작들의 감동을 재연하고 싶었던 듯하지만, 힘주어 쓴 대사를 먼저 나열해 놓고 알맹이 없는 갈등을 급조해 빈 부분을 메꿔 넣는 서사는 그 누구의 공감도 사지 못했다.
“대충 그렇게 일하고 싶으면 과자 광고 대행사 가서 해! 나는 그따위로 일 안 하니까.”라는 경악스러운 대사에선 기어이 광고대행업 종사자들의 직업윤리뿐 아니라 이 드라마를 고른 이보영이라는 배우의 브랜드 이미지까지 일부 훼손되고 만다. 사장이 되고 싶은 임원들도, 그들을 견제하는 검사나 변호사도 고도의 지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자주 밈화되곤 하는 ‘커뮤니티식 회사 생활’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행동하며 개그 캐릭터로 전락한다. 그간 여타 업종의 일하는 사람들을 다룬 드라마들이 난립할 때도 단독으로 주인공이 되어본 적은 없었던 직군이기에 이런 처참한 구현이 더욱 안타깝다.
그나마 남은 희망은 이 드라마가 고아인과는 다른 상황에 처한 일하는 여자들의 삶에 약간의 시간을 할애한다는 점이다. 워킹맘 은정, 꾸미지 않는 원희, 계약직 비서 수정처럼 지금의 아인이 가진 것들을 아직 갖지 못한 후배 여성들의 서사가 드라마의 결핍을 간신히 메꾼다. 금방 자라날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광고 일이 ‘나라 구하는 일’도 아닌데 그만두라고 종용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 사이에서 고민하는 은정은 특히 눈길을 끈다.
은정이 “네가 훔쳐갔잖아. 초딩 때부터 꿔 온 내 꿈. 내 찬란한 미래, 내 원대한 계획. 네가 책임진다면. 낳기만 하면 네가 다 키운다며. 네가 그렇게 꼬셔 가지고 결혼도 일찍 하고 애도 낳은 거잖아.”라고 남편 정호에게 항의하는 씬에서 정호는 “가족이 훨씬 더 중요하지. 가족이랑 잘 살려고 일하는 거지, 일하려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라고 반박하지만, 은정은 이미 그런 상사를 하나 알게 되었다. ‘일하려고 사는’ 바로 그 여자 아인은 어느 여자에게나 ‘내가 애를 위해 일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을 생각하게 만드는, 탄생부터 비극을 예고하는 존재다.
오너의 딸로서 이들과 출발점부터 달랐던 한나는 또 어떤가. 딸을 진심으로 아끼는 아버지는 “좋은 것만 누리고 나랑 이렇게 놀러 다니면서 편하게 살자”며 회유하지만, 한나는 ‘머슴’들의 진흙탕 싸움에 기꺼이 끼어들며 손발을 더럽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종내엔 비서와의 연애 서사에 매몰되어 버리긴 했지만) 그렇게 해서 한나가 되찾으려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주체성’ 아닐까. 기실 아인의 역할은 그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런 후배 여자들이 아인만큼의 자신감과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육성하면서 여자 몫의 자리‘들’을 지켜주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대행사>는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부족하기만 한 드라마다. 최근의 광고대행업계에 대한 취재 없이 오래된 편견만으로 자리를 채우고, 일하는 여성의 삶과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남성 제작진의 한계가 아쉽고 답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낮은 이해도를 가진 남성들조차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일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비자층이 두터워졌다는 점만은 증명된 것 같다.
어쩌면 <대행사>는 기계적으로라도 50 대 50의 비중을 맞추는 출발점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시청자를 실망하게 하는 수준 낮은 ‘남성 주연’ 드라마가 몇 백 편 이상 양산되는 동안, 여성 주연의 드라마는 수적으로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아질 기회조차 없었던 과거를 뒤로 하고 드디어 등장한 귀여운 졸작 말이다. 유치하고 단순했던 최초의 고아인을 뛰어넘는 제2, 제3의 고아인이 계속해서 드라마판을 뒤집는 자극이 되어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