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르에게는 각각 ‘안나’와 ‘안느’라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배우자가 있었고,
고다르와 결혼했을 때 그들은 모두 스무 살이었다.
스무 살에 대한 꾸준한 취향.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사랑이란 어떤 시기로의 지속적인 퇴행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中
가끔은 어떤 공통감 같은 것이 나를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땅에서 살아온 여성이라면 아마 비슷한 때에 같은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사적이고 은밀한 피해들이 실은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만 아는 분노이고 우울이고 억울함인 줄 알았는데 실은 거의 모두가 겪어본 감정이었단 사실을 알게 될 때. 나는 그것을 바네사 스프링고라의 <동의>를 읽다가도, 최진영의 <이제야 언니에게>를 읽다가도, 그리고 안희정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수기를 읽다가도 자꾸만 새롭게 느낀다.
나만 아는 줄 알았던, 나의 근간이 되고만 나의 피해가 갑자기 남들의 공적인 발화를 빌려 부딪혀올 때 ‘우리’의 분노는 실체적 힘을 얻고 운동은 폭발한다.
포스트-미투 세대 청년으로서, 주인공 리디아 타르에 의해 예술계 밖으로 내쫓겨 자살한 크리스타 테일러를 뒤늦게 애도하는 여성들이 ‘사랑해, 크리스타’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질주하는 장면은 그래서 익숙하게 가슴 아프다. 권력형 성범죄의 가해자 자리에 전형적인 예술가 남성이 아니라 레즈비언 여성 지휘자라는 새로운 유형을 제시한 이 복잡한 영화의 의도는 무엇일까.
지휘자 리디아 타르는 남성 권력이 여전히 공고하게 작동하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다시 없을 업적을 세운 인물이다. EGOT 그랜드슬래머, 베를린 필하모닉 사상 최초 여성 상임 지휘자, 아프리카 부족과 5년간 동고동락할 정도로 진지한 열정을 지닌 연구자. 이룰 것을 다 이룬 그는 단 하나의 영광스러운 과제만 남겨뒀다.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을 직접 지휘해 녹음하는 일이다.
그렇게 홀로 위대해서인지, 타르는 ‘여자라서 피해 본 건 딱히 없다’며 능력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여성주의와 소수자 연대의 행렬에 끼어들길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그는 자신이 덧입은 전통적 권위를 보존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데, 사소하게는 남자처럼 말하고 남자처럼 위협하고 남성복을 주문 제작하는 것부터 시작해 후배 여성들을 위한 사다리를 걷어차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이 설립한 여성 음악인 아카데미를 두고 ‘지원자를 여성으로만 제한하는 건 너무 뒤떨어진다’며 역설하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현실의 의제들에 무지한지를 알 수 있다.
타르가 인터뷰에서 성전처럼 떠받든다고 밝힌 스승의 가르침은 두 가지, ‘카바나’ 즉 예술가의 의지를 담은 의도와 ‘테슈바’ 즉 속죄와 회개다. 하지만 정작 그의 카바나는 실속이 없고 테슈바는 돌아올 길이 멀다.
타르에겐 허구에 가까운 이상적 페르소나를 제외하면 기실 남는 것이 없다. 열아홉 살 어린 알마와 결혼한 말러를 포함해, 아바도, 카라얀, 번스타인 등 지난 세기의 거장들을 추종하고 커버곡을 생산하는 타르는 강력한 보수주의의 망령에 불과하다. 그는 “소셜 미디어가 설계한 영혼”의 반대편에 고전 예술로 이루어진 영혼이 있다고 상정하고 자신 역시 그 편에 속한다고 믿지만, 바흐의 여성혐오적 삶을 긍정하긴 어렵다는 팬젠더 유색인종 학생을 조롱하며 뱉은 “작은 차이로 인한 자기도취만큼 지루한 건 없다”는 말은 타르 역시 피해 가기 어렵지 않던가.
타르는 (수많은 남성 권위자와 마찬가지로) 빈 껍데기 같은 영혼과 얇디얇은 양심, 거의 전무한 자기성찰 능력의 소유자다.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다가 죽음을 불사한 피해자의 절규에 비로소 권력의 단 꿈에서 깨어난다. 이 경우 지나친 미숙함은 사악함에 가깝다는 경구도 타르를 위해 만들어진 듯하다. 그때부터 타르는 과거가 자신을 따라잡을까 걱정하며 매일 밤 악몽과 환청에 시달린다.
(물론 다른 상상의 여지도 있다. 파트너 샤론 굿나우가 일부러 상처를 후벼파기 위해 한 말에 따르면 그는 "과거의 ‘그 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가엾은 사람인데, 어쩌면 이 말과 리디아의 악몽 속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남성의 몽타주는 리디아 역시 젊은 시절 예술계 내 성폭력의 피해자였을 수도 있음을 조심스레 암시하는 듯하다.)
신처럼 생각하는 음악의 시간성을 상징하는 메트로놈은 주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인다. 그의 주변에서 자꾸만 죽음이 일어나고, 기이한 긴장이 목을 죈다. 자기 문화가 없어서 기존의 권위를 훔쳐와야만 하는 사람답게 창작곡을 쓰는 일은 더디고 결과물은 볼품없다. 그럴수록 그는 또 다른 젊은 여성의 재능과 동경을 노골적으로 탐닉하는 일에 더더욱 매달린다.
대담하고 재능 있는 어린 여자들에 대한 탐닉이 단순히 취향이나 '실수'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적 약자의 인격에 대한 침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일임이 드디어 명확해진 시대이기에 타르는 결국 형벌을 받는다. 가장 먼저 오래된 연인과 가까운 제자마저 철저한 ‘을’로 대한 시간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사비를 털어 기사를 붙이며 모셨던 스승은 타르를 너무나 손쉽게 외면한다. 기민한 캔슬 컬처를 감안하더라도 대중의 단죄는 유달리 재빠르고 냉혹하다.
바로 이때가, 타르가 평생에 걸쳐 흉내 내던 공고한 권위와 천재성의 세계는 사실 한 번도 여성인 그의 자리를 허락한 적 없음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가 기댈 곳은 오로지 윤리의 세계뿐이었으나, 그것을 몰라보고 기어이 거부한 것이 그의 진짜 ‘실수’였음을 관객이 깨닫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이때 미묘한 연민이 침입한다면, 타르의 화려하고 남다른 추락이 ‘거장’이란 상징의 보편적인 허위성을 폭로하기보다는 오롯이 (여성인) 타르만의 남다른 불행을 그리는 데에 더 힘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말에서 타르는 말러의 5번 교향곡을 잃고 대신 동남아 사창가의 5번 소녀를 추천받지만, 반원형으로 꿇어앉아 지명을 기다리는 여자들에게서 자신이 지휘하던 관현악단의 대열을 발견하고 역함을 느낀다. 그제야 그는 도망친 프란체스카의 집에서 발견된 ‘Rat on Rat’ (Tar on Tar의 애너그램)이란 메모의 참뜻을 깨닫는다. 그는 지하에서 개의 습격을 받아 마땅한 이, 추악하고 불결한 시궁쥐이며 끝끝내 마에스트로는 될 수 없는 자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 그가 시간에 대한 지휘권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점이다. 코스프레한 아시안 관객을 위해 지휘하는 타르는 전처럼 전능한 박동의 지배자가 아니라 게임 속 내레이션에 맞추어 악곡을 시작하는 시간의 노예에 불과하다. 서양과 동양, 클래식과 게임 음악의 무리한 대비는 다소 거슬리지만 어쨌든 감독이 던진 질문은 남는다. 한때 신이었던 리디아 타르는 이제 아무 힘이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그가 사랑하는 음악뿐인데, 그의 혁혁한 ‘성과’가 과연 언젠가는 그를 구원할 수 있을까?
로만 폴란스키는 13세 소녀를 강간한 혐의가 사실로 입증된 다음 해 세자르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하비 와인스타인은 2020년 끝내 구속되기 전까지 40년 동안 커리어의 시작점에 서 있는 어린 여성 영화인들만 골라서 성폭력을 저질렀다. 이 땅에서도 해마다 어느 남성 예술가의 미성년자 성매매가, 불법 촬영이, 성폭력 가해 사실이 발각되지만, 그들 중 많은 이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며 뻔뻔히 자리를 지킨다.
죄는 아니라지만 스무 살 가까이 차이나는 연인을 자랑하거나 은밀하게 성적으로 이용하는 남자들의 사례, 부인에게 가내의 모든 노동을 일임하고 기분만 내면서 '애처가'를 자처하는 또 얼마나 많은가. (샤론에게 집안일과 페트라의 양육을 일임한 타르는, 말러의 어린 부인 알마 역시 음악가로서 뛰어난 취향과 재능을 가졌으나 말러에 의해 집안에 주저앉혀진 일에 대해 ”그녀도 동의한 거야.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리디아 타르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대중은 발각과 변명과 구매 취소의 구조를 반복 학습한다. 그중 어떤 이들은 ‘#00계내_성폭력’의 주역이며 서로가 서로의 힘이다. 동시에 그들은 스타성 있는 아이콘이 필요하다. 젊은 타르는 그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레즈비언 여성이 보수적인 예술계의 거인으로 우뚝 서주길 바라는 수많은 여성의 소망을 딛고 성장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결국 대중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따위는 사실 영화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다. 다만 감독은 부패한 권력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며 반드시 주변을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넌지시 경고하고 싶었던 듯하다. 존재 그 자체로 혼돈을 의미하는 타르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도래했다는 찜찜한 확신만이 안개 속 비명처럼 떠돈다.
※ 23/03/25 여성신문 기사는 이 글을 바탕으로 편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