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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Jan 23. 2023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아마겟돈 타임>

소년 하나를 키우기 위해 드는 것들



사상범 대신 잡범의 시대



에드워드 양의 타이베이 3부작  마지막으로 발표된 작품이자 가장  과거(1960) 배경으로 하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기본적으로  시절을 추모하는 영화다. 대만 최초의 미성년 살인 사건이라는 무거운 실화에 뿌리를   영화는 우선 과거  자체를, 과거가 내재한다고 믿어지는 속성들 - 인정人情의 소멸, 역사적 가치와 지성의 몰락, 교양과 도덕의 패배, 항구적 고독 -  추모한다.

동시에 이것은 미래를 추모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양이 오지 않은/않을 미래를 추모하기 위해 택하는 방법은, 1) 그것을 맛보지 못하고 영원히 과거에 남은 이들을 스크린 속에 박제하면서 2) 아주 철저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관조를 고집하는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 희미한 전등을 켜는 동작으로 시작된 영화는 4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직접적인 감정 묘사보다는 알듯 말듯한 주변인들의 대사와 부연 없는 표정들을 단서 삼아 전개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손전등을 든 관찰자, 서사적 렌즈인 소년 샤오쓰(장첸)는 국어 성적이 떨어지는 바람에 주간부 대신 야간부에 진학한 중학생이다. 야간부는 공부에 뜻이 있는 학생보다 벽돌 들고 패싸움을 하거나 여학생을 만날 궁리만 하는 비행소년들이 훨씬 많은 곳이므로, 번듯한 지식인 중산층 가정의 4남인 샤오쓰에게 이 진학은 인생의 첫 쓰디쓴 실패다.

게다가  시대에는 아이들이 아이가 아니라 덩치만 작은 어른으로 취급된다. 보호나 계도는 없고 무력에 의한 제압만 있던 야만의 시대. 중국 본토의 정치적 소요를 피해 대만으로 도망친 부모들은 검열 하에 말라가며 힘을 잃는 중이고, 부모만큼의 사상범도  되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자기들을 대우한 대로 거칠고 무지한 잡범으로 자라난다.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사과해야 하는  끔찍한 이란  먼저 말해주는 샤오쓰의 아버지 같은 어른은 원래부터도 흔치 않거니와, 정치적 숙청으로  고결함을 훼손당하며 점점  나약해진다.

손전등 불빛만큼의 시야만 확보할 수 있는 어둠 속에서 샤오쓰는 간신히 ‘야간부의 모범생’ 지위를 유지하는 듯하지만, 실은 소공원파 친구들이나 양호실에서 만난 소녀 밍, 장군의 아들 샤오마 등과 어울리면서 사고 치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소공원파, 217파, 농구부 세 계파로 대표되는 불량아들의 필사적인 땅따먹기만큼이나 샤오쓰의 남매들도 전력을 다해 시대적 격랑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유학, 도박, 신앙생활이라는 남매들의 해결 방식은 각기 무척 달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극적인 회피라는 건 매한가지다.

어쩌면 성장 속도도 집안 배경도 너무 다른 아이들에게 모두 같은 교복을 입혀 앉혀둔 기괴한 교실의 풍경부터, ‘샤오쓰’(小四, 넷째)라는 성의 없는 애칭부터, 샤오쓰가 짊어진 시대의 운명이 예고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이건 시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아마겟돈 타임> 역시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원래 알던 , 책임 없는 미성숙, 당연한 안전함에서 벗어나 강제로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과제 앞에 놓인 소년의 비통함. 그를 성장시키기 위해 계율과 폭력을 동원하는 부모 세대. 중산층 가정의 필연적 실패.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인 조부모는 평생 열심히 노력한 결과 문제아 손주를 사립학교로 빼낼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갖췄지만, 그 자식과 손주 세대는 아메리칸 드림의 멸종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하루하루 주어지는 ‘부당한 행운’에 기꺼이 굴복하는 수밖에 없다. 폴의 아버지 어빙 역시 자식에게 부조리에 대한 굴종을 납득시키며 속이 편하지 않았으리라. 그는 배관공의 자식으로서 성실한 노동과 준법의 가치에 매달리고, 자신을 존중해주는 유일한 어른인 장인 애런에 대한 동경과 존경을 잃지 않고 있다. 애런이 지나간 시절의 순수한 도덕, 용기 있는 양심을 상징한다면 어빙은 이에 대한 80년대의 향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어빙은 범법을 저지른 아들 대신 보호자가 없는 흑인 소년 죠니가 소년원에 홀로 갇히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비겁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에겐 그렇게 하지 않고는 자식을 안전하게 지켜줄 방법이 없다.

“나도 부당한 일을 보면 정말 화가 나”고 자주 잠들 수 없을 정도로 괴롭다고 고백하는 어빙의 우울한 얼굴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아버지가 후반부 내비친 얼굴과 몹시 닮아있다. 친구 왕 선생에게 배신당해 며칠 동안 심문받은 후 집 밖을 나돌던 아버지가 어머니와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 미처 숨기지 못한 공포와 허망함. 앞으로 세상을 어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그 길 잃은 얼굴은 에드워드 양과 제임스 그레이 두 자식들이 평생 간직해 온 비극의 초상일 것이다.



60년의 타이베이와 80년의 퀸스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겟돈 타임>의 자전적 회고에는 아직 선택할 것이 남아있는 소년을 독려하는 낭만과 희망이 힘을 잃지 않은 데 비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는 이미 선택지를 박탈당한 소년이 남은 평생 맞이해야 할 어둠에 대한 씁쓸한 직시가 더 짙게 묻어 있단 점일 테다.

샤오쓰의 아버지가 숙청의 위기에 처하기 전 “자기 가치를 잃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라며 샤오쓰에게 용기를 심어주려 노력한 것처럼 <아마겟돈 타임>의 애런 역시 손주 폴에게 “세상과 싸우는 건 힘들지만, 그래도 포기하면 안 돼”라고 당부한다. 폴은 애런의 조언과 죠니의 마지막 얼굴을 곱씹다가 무언가 다른 길을 찾기 위해 자본이 마련해 준 회피의 길을 이탈한다. 동문 메리앤 트럼프가 ‘노력’에 대해 연설하고, 부자 동급생들은 ‘깜둥이’를 욕으로 쓰는 역겨운 사립학교를 거부하고 걸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샤오쓰에게는 애초에 그 회피의 길조차 마련되지 않았고(샤오쓰의 부모가 왕 선생에게 샤오쓰를 주간부로 옮겨달라 거듭 애원했지만 결국 실패했기 때문에), 마지막 안전망이었던 아버지는 심문 후의 트라우마로 광인이 되어 타락했다. 그렇기에 샤오쓰에게는 도망친 길에서의 자발적이고 도의적인 이탈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미 첫 장면부터 궁지에 몰려있던 샤오쓰에게 남은 것은 이제 낭떠러지뿐이다.


야간 학교마저 그만두고 밍과 멀어지면서 샤오쓰의 급작스러운 폭력성이 발현되기 시작하는 것 같지만, 기실 그것은 샤오쓰가 술 취한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를 뒤에서 벽돌로 치려고 다가가던 씬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혹은 그보다 훨씬 전, 영화의 초반부에서 소공원파의 2인자 슬레이와 언쟁하다 불시에 야구 배트로 슬레이를 후려치려 했을 때, 혹은 교무실에 불려가 아버지의 정중한 항변을 듣다 갑자기 전구를 깼을 때부터도.

그때마다 구멍가게 아저씨의 심장병이나 엄한 주임 선생님, 교사인 부모의 염려 등등이 샤오쓰를 적절한 때에 구해내지만, 마침내 밍을 칼로 찌를 때 샤오쓰를 막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애는 너무 오래 참았고, 너무 오래 신뢰받았고, 너무 오래 방치됐던 것이다. 제때 치료되지 못한 채로 응축되었던 시대적 불안은 곪고 터져 주변의 가장 약한 것을 공격한다. 손전등을 들었으나 길잡이까지는 되지 못한 소년은 그렇게 격리되고 사회적 임종을 맞는다.




소년 하나를 키우기 위해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훌륭한 영화들의 모티브 자체는 정말 흔하고 단순하다. 소년들은 (어떻게든) 성장한다. 또는 마땅히 이뤘어야 할 성장이 좌절된 것 자체가 대단한 내러티브가 된다. 그런데 이 익숙한 이야기의 이면은 여태껏 잘 다뤄지지 않았다: 그렇게 소년 하나를 키우기 위해 소녀, 또는 더 빈곤하고 약한 소년이 역사에서 사라진다.


구겐하임 미술관에 소풍을 다녀오던 날 전철에서 폴과 죠니는 그들 사이를 가르는 계급적 차이를 (강제로) 알게 되고, 먼저 전철에서 내린 폴의 시야를 떠난 죠니의 상처는 그 이상 깊이 서술되지 않는다. 자전적이라서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었을 이야기다. 그 직시가 충분했는지 아닌지를 말하라면 물론 충분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제임스 그레이는 그가 당시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잘 아는 척하지 않으므로 정직하다(이 묵묵한 인정은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보모 클레오를 다룬 태도를 떠올리게도 한다).

영화 내내 ‘폴의 시선’이라는 대원칙에 충실했던 그는 죠니의 할머니가 등장하는 단 한순간 자신이 놓고 온 것들, 버리고 온 것들, 구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죄책감과 애도를 전달하려는 것만 같다. 폴이 운 좋게 소년원 신세를 면한 절도 범죄를 모의하기 직전에 단 한 번 '폴이 알 수 없는' 죠니의 이야기가 1분 정도 몹시 부자연스럽게 끼어드는 것이다. 죠니는 죽어가는 할머니의 침대 옆에 서서 곧 폴과 디즈니랜드로 떠나기 때문에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며 마지막 인사를 한다. 그 장면은 죠니를 바라보는 할머니, 할머니를 내려다보는 죠니의 눈이 아니라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죠니와 할머니를 관찰하는 카메라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제임스 그레이가 의도적으로 삽입한  원경은  그래프라는 백인 소년의 인지 범위 바깥에 있는 유일한 이야기다. 폴의 할아버지 애런의 임종은 모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건하고 애정 어린 의식을 거쳐 이루어졌지만, 죠니의 할머니는 유일한 혈연인 손자 없이 시설에 이관되어 혼자 죽을 것이다. 폴의 엄마 에스더는 언제든 아버지의 무덤으로 울러   있지만, 죠니는 홀로 소년원에 갔으므로 무연고자로 처리되었을 할머니의 무덤을 찾기도 힘들지 모른다.  무참한 대비를 강조하는 제임스 그레이의 연출은 폴이라는 소년 하나를 키우기 위해 소진된 죠니 가족의 사라진 역사를 잠시나마 스크린 안으로 불러들인다.


반면 에드워드 양이 소녀 밍에 관해 취한 태도는 어딘지 애매한 데가 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 유독 밍만이 독립적 서사를 갖지 못하고 소년을 키우는/실패시키는 도구의 역할에 머무는 것 같다는 찜찜한 기분이 계속 드는 것이다.

우선 4시간이라는 대장정을 완수했는데  끝이 결국  친밀한 관계 안에서 벌어진, 남성에 의한 여성 살인이라면 어쩐지 맥이 풀리고 마는  막을  없다. 게다가 샤오쓰는 본래 노렸던 경쟁자 남성 샤오마가 아니라 우연히 만난 밍을 ‘홧김에죽이게 됐고,  순간에 “뻔뻔한 계집, 부끄러운  알아라고 소리 지른다. 자신을 ‘배신 여자를 ‘단죄하는 듯한 남성의 살해는 현대의 인셀 여성혐오 범죄와 너무도 닮아 있어 즉각적인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도 널 무시할 수 없어. (…) 밍, 나는 널 잘 알아. 하지만 상관없어. 잘 아니까 도울 수 있어. 이제 네게 남은 희망은 나밖에 없어. 과거에는 허니가 그랬지. 네가 왜 허니를 못 잊는 줄 알아? 내가 날 허니처럼 생각하기 때문이야.”

“내가 변하도록 돕겠다는 거야? 너도 똑같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너도 다른 애들처럼 나한테 감정을 바라고 잘해준 거였어. 그러면 안심이 될 테니까. 참 이기적이다. 네가 날 바꾸겠다고? 난 이 세상과 같아. 세상은 바꿀 수 없어. 네가 대체 뭔데…”

“넌 희망이 없어. 뻔뻔한 계집, 부끄러운 줄 알아!”


물론 <해탄적일천>과 <공포분자>, <타이페이 스토리>와 <하나 그리고 둘>까지, 꾸준히 여성의 삶에 대한 (그 시대 남성치고는 극히 드물었을) 통찰을 보여준 에드워드 양이기에 신뢰를 잃지 않을 수는 있다. 1990년대 초반에 1960년의 사건을 다루면서 현대 인셀 남성들의 면면을 모두 예측할 수 있었을 리도 만무하다. (설마 이렇게까지 닮은 루저들이 사회현상을 이룰 정도로 많아질 거라고 그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밍은 단순히 ‘살해당하는 여자라서’가 아니라, ‘이 세상과 같’은 존재라서 한계를 갖는다. 전술했다시피 관조적 화면을 위해 인물들과의 철저한 거리감을 극 내내 유지하긴 하지만, 그래도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어디까지나 샤오쓰를 주연으로, 야간부 남학생들과 샤오쓰의 아버지를 조연으로 삼는 이야기다. 샤오밍, 샤오추이, 그리고 샤오쓰의 누나들 같은 여성 조연들도 꽤 비중을 갖고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은 아버지나 캣, 슬레이, 허니, 심지어는 농구부의 타이거만큼의 독자성도 갖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샤오쓰에게 ‘관찰당하는’ 대상으로 남는다. (타이거는 샤오쓰의 눈이 닿지 않는 경기 장면에서 순간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내면의 고민을 티 낼 기회를 얻고, 허니는 샤오쓰에게 <전쟁과 평화>를 언급하는 순간 생명력 어린 부피감을 얻는다.)


샤오밍 역시 마찬가지다. 밍은 샤오쓰가 모르는 엄마의 천식이나 샤오쓰가 모르는 젊은 의사와의 묘한 텐션  독립적인 순간들을 가지긴 하지만 그것은 모두 파편에 불과하다. 밍은 본질적으로 ‘샤오쓰를 좌절하게 하는 세상 상징하며 결국 그와 동치되는 대상이다.

밍은 샤오쓰의 마음대로 바꾸어지지 않고,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없고, 우는 얼굴과 웃는 얼굴의 진위도 속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가 없는 미성년 여성으로서 강력한 남성 권력의 보호를 바라고 추종하는 서글픈 기회주의자로 그려져, 당시 대만 외성인 신분의 중산층 지식인들이 군인과 정치인 등 지배 계급 인사이더에 느낀 열등감을 은유한다. 또 밍은 끝까지 진실을 다 알려주지 않은 채로 사망해 이 극의 미스테리적 요소를 담당하기도 한다. 샤오쓰는 밍의 부정을 의심하지만 관객도 샤오쓰도 정말로 젊은 의사가 밍을 좋아했는지, 샤오마가 밍을 꾀어냈는지 혹은 그 반대인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밍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 -   없고, 가변적이며, 의도대로 바꿀  없다 -마저도 샤오쓰의 입을 통해 서술될 때에만 공신력을 갖는다. 뭐가 진짜고 가짜인지 구분도 못하면서 무슨 영화를 찍는다는 거야?  찍고 있는지 알기나 ?” 소년이 늙은 감독에게 분노하는  대사로써 소년에게 소녀가 갖는 의미, 당대 대만 사회의 허구적 존립, 그리고 에드워드  감독이 영화에 대해 견지하는 태도까지 분명해진다. 밍은 이토록 많은 것을 상징하기 위해 대상화되는 존재이며 그의 행위성은 너무 미약해 샤오쓰의 언술이 없고서는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조차 않는다.



지난 세기의 거장들이 30 전의 유년기를 되돌아보는 회고록은 물론 아름답고 비정형적이며 사려 깊다. 하지만 거칠게 말해 에드워드 양의 90년대 명작이 ‘소년 성장을 위해 나머지 모든 사람을 신비롭고 비정한 세상의 비유물 삼기를 주저치 않았다면, 최근  아메리칸 시네마의 후예들이 이어온 계보는 그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있겠다.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  토마스 앤더슨의 <리코리쉬 피자> 이어 <아마겟돈 타임> 역시 소년 폴의 어머니 에스더와 친구 죠니를 통해 ‘소년이 그때는 몰랐던 것들 현재로 호출해 낸다. 이것은 ‘나도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아는것을 ‘당신도 이젠 알아야 하는것의 자리로 불러들이는 확장의 작업이며, 원복에의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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