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2/31 여성신문 기사는 이 글을 바탕으로 편집되었습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관의 탄생 이후 무려 13년이 걸렸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바다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려는 듯 천문학적 비용을 들였다는 물 CG와 함께 돌아온 ‘아바타: 물의 길’은 오랜 기다림만큼 황홀한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하지만 시각효과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 뒤에 아쉬운 평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카메론은 명실상부 현시대 최고의 비주얼리스트지만, 훌륭한 이야기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탓이다.
물론 ‘아바타: 물의 길’이 추구한 것은 놀라운 비주얼이지 놀라운 서사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비주얼은 서사를 담는 그릇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스펙터클로 기능한다. 게다가 뻔한 플롯은 곧 안전한 재미를 보장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앙상한 서사 탓에 제이크를 포함한 인물들이 원래 가졌어야 할 부피감을 모두 빼앗겨 심각하게 납작해지고 만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러닝타임 내내 ‘제이크의 부인’으로만 묘사된 네이티리다. 실상 네이티리는 제이크가 자식들에게 뜨거운 부성애를 보여주거나 권력 이양을 암시하는 주요 장면마다 철저하게 소외된다. 피안에서 방금 잃은 아들과 재회할 때조차 네이티리는 한 걸음 뒤로 빠져 부자의 감동적인 접촉을 바라보며 그저 눈물 흘리기만 한다.
멧케이나 족장의 부인 로날이나 딸 츠이레야 역시 아직은 누군가의 여자친구나 부인 이상의 역할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등장부터 관음적 시선에 노출된 츠이레야가 적극적으로 성애화되는 연출도 문제적이다. 츠이레야가 모델처럼 걷거나 보기 드문 (로아크의 자존감을 채워주는) 상냥함을 드러낼 때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네이티리, 로날, 키리가 ‘충족’시켜주지 못한 나비족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설계되었단 사실이 투명할 정도로 명백해진다.
어쩌면 이야기가 시작된 지점부터 무언가 잘못 설정되었을지도 모른다.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이 가모장 사회였다고 상상해 보자. 그들은 <이갈리아의 딸들>이나 아마조네스처럼 엄격한 여존남비의 위계를 따를 수도 있었다. 훌륭한 전사인 여성이 부족장이 되어 공동체를 수호하고, 그의 남편이 신관이자 의사로서 정신적 보살핌을 제공한다. 이 가상의 나비족 사회에 떨어진 제이크의 생사는 장모 모앗의 손에 달려있었을 테고, 쓸만한 전사는 될 수 있어도 부족장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네이티리의 두 번째 남편 자리에 만족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도 그가 나비족으로서의 새 인생을 받아들이고 네이티리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
현실은 상상과는 정반대다. <아바타: 물의 길>에서 제이크에게 실제로 주어진 것은 부족과 가족에 대한 온전한 통치권이다. 그는 두 아들이 자신을 ‘sir’라고 부르도록 교육했고, 네이티리를 나고 자란 숲에서 떠나 실향민이 되게 한다. 부족과 생이별하며 슬피 우는 네이티리의 순종과 희생은 1편에서 보여준 전사로서의 위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제이크의 모든 판단은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는 존재’라는 낡은 가부장적 믿음과 상명하복의 군대식 질서에 근거한다. 운 좋게도 자신을 제약하던 모든 종류의 장애에서 벗어나 판도라 행성의 흠 없는 1등 시민으로 살아갈 기회를 얻었지만, 여전히 지구에서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않은 제이크 설리. 게다가 인류세 역사상 이성애 관계의 규범이 남성에게 우월적 지위를 약속하지 않은 적은 없었으니, 그 불평등한 지형에 익숙한 제이크가 곧바로 네이티리를 ‘사랑’할 수 있었던 일은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의식적 확신에 기반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 그가 주인공이어야만 하는 제임스 카메론의 나비족 사회는 지구의 인간-남성 중심주의 사회와 너무도 닮아서,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고 그저 익숙한 피로감을 안길 뿐이다. 판도라는 별천지 이세계처럼 그려졌지만 적어도 제이크에게 그곳은 이세계가 아니다. 판도라는 그저 피부색이 파랗고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또 다른 지구에 불과하다.
이 전형성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제임스 카메론은 줄곧 즐겨 쓰던 인물 구성을 또 한 번 택한 듯하다. 강인한 여전사 유형의 조연을 제시해 ‘내 영화는 (현실을 최대한 반영하기 때문에) 여자도 약하지 않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아바타’ 1편의 조종사 트루디와 과학자 그레이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사라 코너처럼, 70세를 바라보는 남성 감독이 영화사에 새겨온 기분 좋은 파격의 족적을 생각하면 물론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확실히 그가 자랑스럽게 내세운 선상 전투 신에서 네이티리는 제이크보다도 강렬한 존재감을 뽐낸다. 쿼리치 대령이 비웃었던 네이티리의 ‘야생성’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재해처럼 돌아와 위대한 전쟁 신의 징벌을 떠올리게 한다. 분노의 살육을 몰래 관람하는 스파이더의 눈을 빌린 관객은 하잘것없는 인간의 떼죽음에 이입해 압도적 공포를 느끼게 된다. 쿼리치 역시 ‘상병’ 제이크보다 네이티리의 화살을 더 두려워하는 티가 역력하다. 이만하면 네이티리가 상징하는 원시-자연-여성에 대한 감독의 애호는 증명된 셈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주체적이고 강력한 여성 인물은 이미 숱하게 등장해 ‘걸크러시’ 유행을 만들며 기대감을 높여 왔지만, 그들이 가부장-이성애주의의 강력한 덫으로 빠질 때 그 주체성이 흐릿해지고 가정의 천사에 지나지 않게 되어 겪는 실망도 숱하게 반복되어 왔다. 엄마가 된 네이티리 역시 그 실망감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자매 톨쿤이 아이와 함께 사냥당하자 크게 분노한 로날이 만삭의 몸으로 참전하며 “나도 전사야”를 천명하지만, 그 외침이 가슴 떨리지 않고 그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네이티리와 로날 두 어머니의 극화된 모성성은 서사 전부를 다시금 뻔한 가족주의의 늪으로 끌고 들어간다. 20년 전이었다면 네이티리와 로날은 남자 뒤에 숨지 않고 독자적 액션 신을 몇 개 선보이는 것만으로 (1편의 트루디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감동을 주고 두고두고 회자됐을 테다. 하지만 그간 대중문화의 발전과 함께 수준 높아진 관객이라면, ‘어머니라서’ 발휘되는 전사의 자질보다는 더 현실적이고 고등한 서사를 바랄 법도 하다.
현실과 너무 가까운 어른들보다 오히려 시선을 끄는 것은 ‘혼혈’ 아이들이다. 설리 가족과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입양아 키리는 친부도 알 수 없어 ‘뿌리’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다. 그는 인간, 아바타, 나비족 중 어느 쪽에도 확실히 속하지 않는 경계인으로 무당의 운명을 타고났다. 키리의 영력이 발현될 때 인간 남성 과학자들은 이를 뇌전증이나 망상장애의 초기 증세로 진단하지만, 판도라의 여성형 신격인 에이와에게는 키리를 향한 다른 뜻이 반드시 숨겨져 있을 것을 관객은 알고 있다.
물론 한 발 더 깊이 들어가자면, 여성에게 실제적 물리적 권력을 주지 않고(토루크 막토/올로에익탄) 오직 ‘신비로운’ 영적 지도자의 자리(차히크)만을 허용하는 것 역시 여성혐오라고 생각된다. 숭배는 언제나 배제와 멸시의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금 짚어보건대 <아바타> 시리즈는 태초부터 원시적 자연과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간직한 침입자의 후손이 쓴 이야기다. 즉 이 서사는 진짜가 아닌 것을 조악하게 흉내 내어 재현하며 진짜를 대체하고 진짜를 조롱하게 되는 필연적 한계를 가진다. 게다가 나이 든 백인 남성 감독에게 로아크를 에이와의 중개자로, 키리를 양부 제이크를 이을 최고의 전사로 상상할 만한 역량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저런 한계를 모두 감안한다면, 과학이 무시하고 조롱한 것을 자연이 되살린다는 아이디어가 놀랍게도 에코 페미니즘적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고 최대한 선해할 수도 있겠다.
나비족과 어울려 살아온 인간 소년 스파이더가 생물학적 아버지에게 내비치는 적대감도 흥미롭다. 키리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스파이더 역시 혈연관계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이방인으로 공동체에 강한 유대감을 느끼며 살아온 아이다. 그 역시 언제든 배신당할 수 있고, 칼로 그어질 수 있고, 내쫓길 수 있다. 어쩌면 앞으로 그는 제이크의 친아들 네테이얌이나 로아크보다도 제이크의 초조한 자기 증명을 더 잘 이해할 양아들이 될지도 모른다.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이야기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자식 세대가 그려갈 그림은 지금과는 사뭇 다르리라 믿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높은 확률로 제이크-네이티리의 낭만적 이성애 서사만을 재현하게 될 로아크-츠이레야보다는, 이종족 간의 경계에 서서 공생할 방도까지 고민하게 될 키리-스파이더의 관계에 더 큰 기대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