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2/03 여성신문 리뷰기사는 이 글을 바탕으로 편집되었습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리즈 1편의 주연 배우가 세상을 떠나고, 선왕의 장례를 치르는 씬으로 포문을 여는 이 영화는 마블에게도, 배우들에게도 엄청나게 도전적인 영화였을 것이다. 트찰라와 슈리 남매를 모든 마블 캐릭터 중에 가장 좋아했던 내게도. 그런데 마블은 영리하게도 지금껏 유지해온 혈연주의-가부장제에 입각한 (남성) 히어로라는 자기들의 ‘원형’을 포기하고 새 세대의 주역이 가장 원하는 것을 즉각 파악해 내놓는, 지극히 상업적인 방식으로 이 위기를 타개했다.
마블이 10년 넘는 세월 동안 끈질기게 그려온 히어로의 기본형은 당연하게도 남성이고 그들은 주로 대디 이슈를 갖고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거나 자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거나 자기가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거나 셋 다이거나. 그들은 유사 부자 (또는 부녀) 관계를 통해 정신적 성장을 이루고, 아버지가 마련해준 의례를 통해 또는 유사 아들-제자를 기르는 과제를 통해 두어 번의 성인식을 치른 후 ‘약간 흠결은 있지만 선하고 사랑스러운 성인 남성’ 영웅으로 완성된다. 그나마 어머니 또는 동료 여성에 대한 남성의 존중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던 블랙팬서 1의 트찰라마저도, 1) 경애하던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 이후 2) 부계 혈연의 전통과 남성 혈육의 새로운 시각 사이에서 진통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진짜 영웅이 되지 않았나.
그런데 블랙팬서 2는 뭔가 다르다. 그간 <캡틴 마블>을 시작으로 (혹은 더 너그러이 봐준다면, <앤트맨과 와스프>도 그 시작점으로) 드라마 시리즈 <완다비전>, <미즈 마블>, <호크아이> 그리고 마블 phase 1의 개국공신이지만 기어이 10년 만에 첫 솔로 무비를 내준 <블랙 위도우>와 완전히 새로운 <이터널스>까지 마블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여성 서사에 대한 고민을 티 내어 왔다. 모든 남자들을 압도할 만큼 강한 여자, 몇천 년 동안 가스라이팅 됐지만 실은 가장 강했던 여자, 남편을 잃은 여자, 아버지를 찾은 여자, 애증 관계의 언니와 여동생 등등.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져 세계관의 핵이 되고 모든 이슈의 키가 되던 이 여자들은 종종 (실은 엄청나게 자주) ‘오리지널’ ‘올드’ 팬보이들의 원성을 샀지만, 그래도 마블은 뭐가 돈이 되는지 안다는 식으로 최저 속도로나마 달려온 것이다. 아주 느릿느릿 답답할 만큼. 그리고 그것은 <블랙 팬서 2 : 와칸다 포에버>의 놀라운 성비, 여성 인물의 화면 점유율로 결실을 맺는다.
결국 이것은 phase 4를 열어젖힌 마블이 “우리 이만큼 달라졌어요”를 외치기 위한 영화다. 이동진을 비롯한 많은 (나이 든 남성)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3년째 이어지는 중인 기존 인물들에 대한 지겨운 작별인사”로만 이뤄진 영화인 것처럼 오해했지만, 이 영화는 오직 그것만으로 평가되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이다. 이건 마블이 새 시대의 글로벌 관객들에게 우리가 이만큼 다양성을 고려하고 있고 비표준의 서발턴을 주체의 자리로 불러오고자 노력한 증거이니 제발 버리지 말아달라는 약속이자 선언 같은 영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속에는 남성이 아닌 성에 대한 조망뿐 아니라 ‘새로운 세대’라는 요소가 추가적으로 결합된다.
슈리-리리(아이언 하트)-아요라는 세 젊은 여성과, 라몬다 여왕-오코예로 대표되는 이전 세대의 여성들이 미묘한 대립각을 세우는 모든 순간이 그 세대론의 증거다. “파괴적이고 우아한” 창이라는 기존의 무기가 이미 있는데 왜 슈리가 새로 만들어준 단검을 쓰냐며 오코예가 아요를 몰아세우는 오프닝 장면부터, 슈리-오코예가 리리를 처음 만나러 갔을 때 리리가 두 사람에게 보인 반응의 차이, 나모르의 ‘과격한’ 사상에 슈리와 오코예-라몬다가 달리 감응하는 숱한 장면 등에서 이 차이는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코예는 가장 노골적으로 슈리의 ‘과학’을 불신하고 힘겨워하며, 라몬다와 나키아는 유화된 권력으로 슈리의 분노 서린 도전을 잠재우고자 한다. 그들은 슈리에게 일말의 악의도 없었으나 슈리의 ‘사상’이 어딘가 위험하다는 어렴풋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극에서 슈리가 내비친 자기 불신은 대부분 그런 타인의 불신에서 기인한 것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런데 결국 슈리는 오롯이 자기 힘으로 블랙 허브를 되살리고, 모두의 충고를 경청한 후에 자기가 납득되는 방식의 옳은 선택을 내리는 현명한 지도자임을 증명한다. 슈리의 자기 확신은 곁의 사람들이 해주는 좋은 말에서 오기보단 지극히 개인적인 천재성, 적군과 아군을 아주 명확하게 분리해내는 능력, 현실주의적인 성격, 그리고 세상을 향한 분노에서 추동된다. (조금 유머러스하게 과장해보자면, 이것이야말로 Z세대 여성의 공통된 특성이자 그들 간의 전 세계적 연대가 출발하는 지점 아닐까?ㅎ)
그래서 슈리의 적대자 안티 히어로가 500년 넘게 살아온 보수 꼰대, 완전한 고립지인 심해의 왕 나모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슈리가 맞서 싸우는 건 어떤 거악이나 절대악이기 이전에, ‘절대악으로 생각되지 않았던’ 오래된 전통과 굳건한 체계다. 슈리는 가부장 중심의 패러다임, 사상, 담론, 규율과 먼저 싸워야 하고 그것에 익숙함을 느끼는 여자들 - 가장 믿는 존재인 어머니와 오코예와 나키아를 포함해서 -과도 싸워야 한다.
전통이 원래 이런 거니까 우리의 일도 어떠한 순서/규율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 여자들은 결국 슈리의 ‘기술’ 앞에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복종하게 된다. 퀸 라몬다가 AI 그리오를 호명하고 오코예가 미드나잇 엔젤 수트를 입고 싸웠듯이. 그리고 때로는, 슬프지만, 후세대 여자들에게 권력을 성공적으로 이양해 주고 그들의 지위를 보장해주기 위해 (영화적으로) 제거된다. 퀸 라몬다의 죽음은 기존에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목도함’으로써 성장한 수많은 남성 영웅 - 트찰라 포함 -의 법칙을 아주 간단하게 반전시킨 장치다.
그냥 거악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사랑하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물론 훨씬 어려운 고난이다. 이 지난한 싸움에서 슈리의 가장 좋은 조력자는 놀랍게도 (만난 지 사흘도 안 된) 리리 윌리엄스다. 아프리카 왕국의 천재 공주와 미국 공대의 천재 소녀. 리리의 말마따나, “어린 천재 흑인 여성”인 두 과학자는 만나는 즉시 강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가족 외의 타인에게는 오로지 두 가지 반응밖에 이끌어낼 수 없기에. 불신당하거나 압도하거나.
그리고 트차카-트찰라와 라몬다-슈리가 서로의 거울상이었듯, 트찰라-은자다카(킬몽거)와 슈리-리리는 정확히 같은 종류의 관계성을 재현한다. 고향에 남은 흑인과 떠나서 노예가 된 흑인의 후예들. 그렇기에 “어린 천재 흑인 여성”끼리 만나서 좋지 않느냐는 리리의 리드미컬하고 힙한 인사는 엄청나게 노골적이고, 유치하고, 속이 빤히 보이지만, 바로 그래서 직관적으로 이해되고 또 임파워링되는 대사다.
마지막으로, 은자다카, 에릭 스티븐스, 킬몽거 - 호칭만큼 복잡한 성질을 가진 이 매력적인 안티 히어로가 슈리의 성인식 속 무의식에 가장 강렬한 존재로 재등장할 때 우리는 내적 비명을 지르게 된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슈리의 ‘혈육’이기 때문이다. 그는 누가 네 뺨을 친다면 그냥 맞아주고 용서하라는 예수의 법칙에 정통으로 주먹질하는 완전한 양아치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고,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그래서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들을 필요가 없고, 오로지 자기만이 이해할 수 있는 도덕률을 가지고서도 외로워하지 않는 존재다.
슈리는 ‘가족들이 날 버렸다’라며 눈물 흘리고 화를 내지만 사실 관객은 진짜 답을 알고 있다. 트찰라와 라몬다가 슈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은자다카가 슈리를 찾은 것이 아니라 슈리가 은자다카를 찾은 것이다. 블랙 팬서의 혈연 계보 속에서 오로지 슈리와 에릭만이 그런 류의 격정과 분노를 가질 수 있다. 오로지 그들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나키아나 오코예 혹은 음바쿠의 걱정처럼 에릭의 헛된 분노에 슈리가 잠시 사로잡힌 게 아니라, 새 시대의 새로운 정동 - ‘정당한 분노’, 누가 네 뺨을 친다면 너도 똑같이 갚아줘야 마땅하다 - 에 익숙함을 느끼는 새 세대끼리 너무도 자연스러운 공모를 이룬 것뿐이다.
그런 압도감, 그런 분노, 그런 공모가 과연 선하고 옳은지 또는 당위적인지를 따지기 전에 나 역시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해해버린다.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어떻게 하는가는 나중 문제다. 그들의 피해자성과 거기서 촉발된 정서가 얼마나 설득적인지를 자문하기 전에, 나는 일단 이해해버린다. 그것이 ‘위험한지’는 우선 느낀 다음에 따질 문제다. 그래서 그 동기를 갖고 슈리가 내린 모든 결정, 무모하고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을 일으킨 것부터 나모르의 날개를 꺾은 것과 나모르를 결국 죽이지 않은 것까지도, 내겐 이전 세대의 전통보다 훨씬 더 ‘당연한’ 결정이다.
고전적이고 눈에 익은 서구의 미인형에 부합하지 않는 외모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흑인 여성 주연들/캐릭터들이 지금껏 겪어온 박해를 생각하면 나는 객관성을 잃고 엄청나게 호의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 역시 내가 어떤 의도나 의지를 갖고 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되는 일일 뿐이다.
당장 이번 시리즈에 새로 등장한 아이언 하트는 ‘수트가 간지나지 않는다’ 또는 ‘아이언맨을 대체할 후계자로는 부족하다(3편에 등장한 그 꼬맹이가 있는데도)’ 등등의 이유만으로 동서양 할 것 없이 오만 마블 덕후 남성들의 포화를 맞고 있는데… 솔직히 수트는 보기 나름이고 (나한텐 아이언맨 수트도 언제나 항상 구렸음을..), 후계는 리리가 아이언맨을 승계하겠다고 먼저 도전한 것도 아닌데 겨우 3초 등장한 남자애를 다 끌어오다니 이 사람들 진짜 남자만 사랑하네ㅋㅋ 싶어진다.
혹여나 여성 배우들의 진짜 ‘잘못’이 있더라도 (레티샤의 anti vax 발언 등) 그보다 훨씬 중죄를 저지른 백인 남성 배우들이 얼마나 쉽게 영화계에 복귀하는지를 생각하면 (로다주는 마약 전과 사범에 성희롱 수차례 / 크리스 에반스는 슬럿셰이밍이랑 성기노출 여혐 범벅 / 크리스 프랫은 반LGBT 교회의 수호자고 / 세바스찬 스탠은 인종차별에 소아성애에 … 당장 떠올린 제일 유명한 것만 써도 이만큼이고 솔직히 지금껏 논란이 안 되었던 마블 남배우가 있긴 했는지 의문이다.) 여배우들에게 내려진 철퇴가 항상 너무 가혹했다는 생각뿐이다.
너희들 이 사람들이 약하고 반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맘 놓고 조롱했던 거잖아. 하지만 이제 시대가 달라졌고, 아이언 하트 수트가 구리고 레티샤 라이트는 안티 백서니까 둘 다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조롱에 우리는 로다주/아이언맨이 더 구렸다고, 맨 몸으로 싸우면 완패당할 주제에 블랙위도우도 성희롱하던 늙은 남자 대신 마음 놓고 볼 수 있는 여자들이 영웅이라 너무 좋다고 대거리할 수 있게 됐다. 이제 그 정도는 안심해도 된다는 생각이 나를 (한 5년 동안 꼴도 보기 싫었던) 마블 앞으로 다시 조금씩 끌어당긴다.
그러니까 이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과도한 PC’ (이거 늘 말하지만 뜨거운 아아 같아서 너무 웃김)는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정확한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비웃어주고 싶다. 이제 ‘원래 그런 거’는 없다고. 상식이고 전통이고 당위였던 것들은 그게 어떻게 왜 옳은지 증명하지 못하면 알아서 해체될 것이며, 아마 대부분이 그렇게 소멸할 거고, 거기에 발맞추지 못하고 계속 무지한 상태에 남아있고 싶다면, 얼마 안 가 너 역시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너한테만 좋았던 전통이랑 같이 죽을 거라고. 무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건 악한 거나 다름없고 이제 그걸 용납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하고 싶다.
슈리는 내게 그런 자신감의 근거가 되어줄 완벽한 영웅이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부계로 이어지는 영웅의 역사가 난입하기 전에 슈리가 최대한 오래, 오코예와 나키아와 아요와 리리와 함께, 히어로이자 국왕으로서 자기 몫을 ‘해먹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
※ 인물의 이름은 최대한 원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했습니다. ( N’amor는 자막에 ‘네이머’로 번역되었지만 ‘나모르’로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