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아버지를 욕망한다.
가지지 못한다면 차라리 부숴버린다.
사랑이라 부르기도 주저되는 집착의 역사서에서 가장 보편적인 수사를 꼽으라면 위의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남성이 어머니를 욕망하는 경우(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드물지 않으나 이것이 모성 신화와 결부된 자궁 회귀의 욕구로 나타나는 것에 비해, 여성의 아버지에 대한 욕망(엘렉트라 콤플렉스)은 주로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가장에게 먼저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통해 있다. 말하자면 남성과 여성의 ‘어른됨’은 가족 내 이성이 자신의 성애적 가치를 ‘어떻게’ 인정해 주는가의 분기점에서 매우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그러나 <티탄>의 알렉시아/아드리앵을 단순히 엘렉트라를 재현하는 존재라고만 하기엔 애매하다. 알렉시아가 알렉시아일 때에도 그의 아버지를 향한 욕망은, 여성의 자리에서 남성을 헌신적/순정적으로 (원수를 대신 갚아줄 정도로) 사랑하는 엘렉트라보다는 어머니를 욕망하는 아들 오이디푸스의 것을 닮아 있다. 그는 사실 미러링된 오이디푸스에 더 가깝다. 그는 아버지들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면서도 이기고 싶어하고 아버지와 좀 더 깊이 닿기를 소망하고 유일한 자식이 되기를 소망하고 경쟁자를 모두 제거하고 고집스레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 이는 숱한 신화에서 오로지 ‘아들’들에게만 허용되던 발칙한 지위다.
알렉시아는 어린 시절 당한 차 사고로 머리에 티타늄을 심은 후부터 차의 금속성을 페티시적으로 사랑하게 된 레이싱걸이지만, 영화 속에서 그가 차를 직접 운전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남의 차에 실려 운반되거나 차 위에서 란제리 차림으로 남성들의 포르노적 시선을 재현하기만 하는, 전형적으로 여성적인 존재다. 그가 차에 관해 발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비정상성은 차 안에서 자위할 때뿐이다.
그 기이한 자위행위를 굴레 같은 성애화를 견뎌낸 후(ex. ‘미친 소리 같겠지만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며 알렉시아를 쫓아오고 못 가게 막던 남자)의 알렉시아가 자신을 되찾아보려는 인정투쟁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친부를 태워 죽이거나 뱅상에게 무력으로 굴복당하던 때에 알렉시아의 눈에 어린 강렬한 혼란이나 흥분감을 생각하면, 차를 남성의 페니스 삼아 자위하는 행위는 되려 조금 슬프고 부족한 투쟁 같다. 그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충분하지 않다’는 감각을 알렉시아 자신 역시 느꼈던 듯, 무차별적 살해라는 기이한 행위가 하나 더 끼어든다. 거구의 남자 스토커를 죽일 때 알렉시아가 내비친 지겨운 기색, 지중해 지역 연쇄살인 뉴스 등을 생각하면 살인은 꽤 오래전부터 그의 루틴에 추가되어 있었던 것 같다. 호감을 느낀 여자든(쥐스틴) 그날 처음 본 남자든 운 나쁘게 휘말린 여자든 상관없이 알렉시아 자신에게 없는 성기 대신 (추후에 완전한 마초 남성인 뱅상이 ‘뜨개질바늘’이라고 조롱한) 얇은 비녀로 귓구멍을 찔러서 살해하는 것이다.
동기도 없고 규칙도 없는 살해는 알렉시아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불처럼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 모든 이에게 동등한 처벌을 내리는 잔인한 신성을 가질 수 있는 존재임을 미리 암시한다. 이 광기를 어찌하지 못하고 알렉시아는 자신의 친부모마저 방에 가둔 채 불을 질러 살해한다. 더 정확히는, 집에 옮겨 붙은 불을 본 순간 어떤 충동을 이기지 못하게 돼, 깨어있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한결같이 무관심한 표정이 어떤 기폭제가 되었는지) 그들을 대피시키지 않고 방문을 잠그기를 선택한다.
그렇게 뿌리를 제 손으로 태워 없앤 살인마가 새로이 선택하게 되는 ‘아버지’가 바로 뱅상이다. 뱅상은 실종된 아들 아드리앵을 10년 넘게 찾고 있던 소방대장으로, 수배령이 떨어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머리와 눈썹을 밀어버린 후 아드리앵을 사칭한 알렉시아를 철석같이 믿는다. 제대로 된 집도 없이 소방대원 기지 안의 숙소에서 살아가는 뱅상은 대원들의 굳건한 지지를 받고 있고 중년임에도 엄청난 근육을 유지하는 마초 남성이지만, 실은 스테로이드 주사를 매일 맞고 있고 10년 전 없어진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도 정확히 알고 있어 신체적 정신적으로 굉장히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는 돌볼 대상이 필요하다. 아드리앵의 엄마는 남편인 그를 떠난 지 오래고, 아들이 죽지 않았다고 / 자신이 아직 건강하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가는 괴로움도 무거울 따름이다. 돌아온 탕아 같은 ‘아드리앵’이 남자라기엔 지나치게 마르고 수상쩍은 구석이 많은 사람이더라도, 심지어 자신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뱅상에겐 차츰 상관이 없어진다. 뱅상은 돌볼 사람이 필요하고, 알렉시아-아드리앵은 그가 존재할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아들의 타 죽은 모습을 여전히 환영으로 보는 아버지와, 친아버지를 제 손으로 태워 죽인 딸.
그들은 그렇게 기이한 유사 부자 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다시, 알렉시아의 이상행동의 근원이었던 친부는 어린 시절부터 알렉시아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자기 딸을 어려워했다. 자기와 함께 타고 있었던 차에서 자기 관심을 조금이라도 끌어보려다 사고가 난 딸이 티타늄을 심는 대수술을 마친 직후인데도, 딸을 바라보는 친부의 표정은 냉담하기 그지없다. 장성한 딸이 배가 아프다며 의사인 아버지에게 진료를 청하고 “좀 더 자세히 봐달라”며 손을 배에 갖다 대고 눌러도 그는 곤란하고 짜증 나는 기색뿐이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는 알렉시아를 사랑하지 않았고, 이유도 없이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알렉시아의 결핍과 분노는 화마가 되어 원가족의 비극을 낳는다. (이 갈등의 서사에서 알렉시아의 친모는 1초씩만 등장했다 사라지거나, 잠들어 있거나, 흐리게 블러 처리되어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정말로 아버지(의 지위와 사랑과 신체)를 노리는 딸’만’을 위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에 반해 뱅상은 오로지 아드리앵만을 위해 모든 위험부담을 지고, “내가 너희들의 하나님이니까 내 아들 아드리앵은 예수”라고 위협적으로 공언하는 아버지다. 외형에 잔존하는 비-남성성을 기민하게 읽어낸 일부 대원들이 아드리앵을 ‘게이 예수’냐며 조롱하지만, 뱅상은 그들의 경고를 모두 물리고 사건 현장에도 아드리앵을 데리고 다니며 헌신적으로 군다. 그는 기어코 기존에 뱅상을 살갑게 챙기며 아들 역할을 수행해온 소방대원 라미앙이 아드리앵의 진짜 정체를 의심하자 그를 사고사로 위장해 죽여버릴 정도로 아드리앵에게 집착한다.
‘나보다 불완전해서 돌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해서’ 아드리앵의 정체를 알고도 계속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뱅상의 선택이라면, 아드리앵-알렉시아는 왜 두 번이나 뱅상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영원히 떠나지 않기로 선택했는가. 뱅상이 그가 꿈꿔오던 완벽한 마초 아버지, 평소처럼 비녀를 들이밀며 귀를 찌르려던 시도를 어이없을 만큼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무력을 지닌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뱅상이 자신을 아기 예수처럼 귀히 여기는 공간이라면 알렉시아는 비로소 안전하고 충분하게 사랑받으며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소방대에서 도망쳤을 때 알렉시아가 목격한, 버스에서 멍청한 백인 남자애들에게 성희롱당하는 흑인 여성의 모습이 바로 알렉시아가 마주한 현실이다. 남자들은 “구멍만 있으면 괜찮아, 귓구멍이라도”라고 노골적인 말로 여자를 조롱한다. 아드리앵을 수행하는 알렉시아가 아닌 진짜 알렉시아는 귓구멍에 비녀(펠루스의 대체물)를 찔러 넣어 누구든 살해해온 사람이지만, 그는 탑승 직전에 ‘진짜 남성’의 살해에 실패해 좌절한 상태다. 알렉시아는 자신의 상상적이고 전복적인 남근이 진짜 남근의 폭력성 앞에서는 그다지 쓸모 있지 않다는 현실을 깨닫고 만다. (곧 성폭력 당할 것이 분명한) 여자가 도움을 청하듯 간절하게 쳐다보지만 알렉시아는 그를 도와주지 않고/못하고 버스에서 내린다. 그렇게 그는 남성 호모 소셜 안에서 더 권위 있고 강력한 남성의 아들을 흉내 내어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결말부에서 춤추는 소방대원 사이에 섞여 남자처럼 몸싸움하며 놀다가, 누군가의 장난으로 소방차 위에 올려졌을 때 알렉시아-아드리앵은 레이싱카 위에서 추던 춤을 그대로 재현하고 만다. 전혀 여성으로 보이지 않는 외형을 하고는 여성만 할 수 있고 여성만 해야 했던 춤을 추면서 자신이 누군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고 싶었을 알렉시아.
극도로 선정적으로 구현되는 ‘아드리앵’의 여성성 앞에서 소방대원들은 당혹해하고 약간은 역겨워한다. 삭발한 머리, 삭발한 눈썹, 란제리가 아닌 똑같은 대원복을 입은 남성의 모습을 한 사람이 그들에겐 여자로 패싱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씬은 외형만 바뀌어도 분간할 수 없는 성성이 과연 의미가 있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을 (남성들에게) 던진다. 성은 재현되고 수행되며 수정되는 것일 뿐, 본질적이지 않다는 전복적 선언이다.
이 전복의 시도가 끝까지 성공적이었다면 아마 알렉시아는 과거를 모두 지우고 알렉시아도 아드리앵도 아닌 그 외의 다른 것이 되어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장애물이 있었으니, 그가 알렉시아이던 시절에 원하는 것-가진 것의 불일치감을 해소하고자 자구책으로 택했던 자동차 섹스의 부산물인 태아다. 아주 빠르게 성장해 그의 배를 찢고 태어나려 하는 금속성의 그것은 알렉시아의 선택을 가로막고 그를 여성/어머니/성녀의 지위에 남겨두고자 애쓴다. 게다가 차 그 자체를 향한 성애적 욕망도 아직 건재하다. 소방차와의 섹스를 그만두지 못하는 알렉시아는 여전히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될’ 수는 없는 존재다. 즉 인간의 표준형인 남성이 될 수 없는 알렉시아의 임신한 신체, 그런 알렉시아가 아무리 성적 대상화를 통한 degrading을 시도해도 절대 ‘어머니’의 지위로 떨어져 주지 않는 뱅상의 강건한 신체가 문제다.
돌봄이 성애로 들불처럼 번져갈 때. 인간을 벗어난 무언가가 되고 있다는 알렉시아의 공포와, 뱅상의 자기파멸적 충동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단초가 된다. 뱅상이 자기 배에 술을 뱉고 불을 붙이는 동시에 알렉시아가 소방차 사이에서 산통을 겪는 장면은 그들의 심리적 합일을 상징한다.
하지만 각자 가진 선택지의 수가 너무도 다른 아버지와 딸은 그 감정을 달리 받아들인다. ‘아들’을 육체적으로 욕망할 이유가 하등 없는 아비는 유혹을 거부하고, 의 인정만이 유일하게 인간으로 살아갈 방법인 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있어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자아이는 제게 있는 것(자궁)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해 없는 것(펠루스)을 선망하게 된다는 말이 기존의 정설이고, 남자아이는 제게 없는 것(자궁을 통한 재생산)마저 여자에게서 탐욕스럽게 가져올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하다는 믿음이 여전한 현실이라면. 줄리아 뒤쿠르노가 여러 신화의 전복을 통해 시도하려던 것은 이 프로이트적 믿음에 정통으로 반기를 드는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네가 누구든 상관없어”를 말하는 뱅상의 무조건적 사랑을 맛본 알렉시아(를 페르소나로 쓴 줄리아 뒤쿠르노)가 아무리 염원해도, 알렉시아의 페미니즘적 신화는 그의 의지로 이어질 수 없이 끊겨버린다. 알렉시아를 대신해 모성을 수행하게 될 뱅상과 알렉시아의 아이를 남겨두고.
뱅상의 전 부인은 알렉시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어떤 역겨운 이유로 여기 빌붙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남자는 돌봐줘. 너든 누구든 있어야 해. 저 남자를 돌봐줘”라고 청했지만, 뱅상은 아드리앵의 보살핌이나 동정을 허용하지 않으며 “내가 너를 돌봐야지 거꾸로는 안 돼”라고 못 박는다.
뱅상은 어머니와 같은 무한한 보살핌을 제공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드문 아버지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그가 ‘여성화’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알렉시아의 퇴장 이후에도 계속해서 소방대원들의 존경받는 하나님 아버지로 살아갈 테고 사람들은 그가 ‘어머니처럼’ 헌신적이라는 이유로 그의 젠더를 헷갈려하지 않으니 말이다.
알렉시아는 ‘엘렉트라가 아닌 자리’까지는 나아왔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존재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감히’ 오이디푸스의 자리를 넘본 비남성이 결국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어버리는 것으로 꽉 닫힌 결말을 맞게 한다는 점이다. 알렉시아는 직접 배 아파 낳은 아이에게 모성적 보살핌을 제공하지 않고 깔끔하게 세상에서 제거되는 것 외에는 허용된/나아갈 길이 (아직) 없다.
알렉시아가 아이에게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물려주지 않고 떠난 것을 일종의 ‘여성성 해제’로 보는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나는 언제나 이것보다는 더한 급진을 원한다. 배불러 아이를 낳은 것도 아닌 뱅상은 손 하나 까딱 않고 새로운 자식-신을 얻어 “여기 (너를 위한) 내가 있어”를 끊임없이 실천할 수 있게 되었고, 알렉시아는 아들됨-남자됨이 소거될 수밖에 없는 출산의 장면에서 예수가 아닌 마리아인 채로 죽었지 않은가. 아버지와 딸의 인정투쟁에서 승리한 것이 누군지 가리기는 힘들어도, 생존투쟁에서 패배한 것이 누군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나는 이보다 딱 한 걸음만 더 나아간 새 시대의 신화를 바란다. 살아남은 알렉시아가 자기 딸을 직접 키우는 신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