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희 감독 GV “김일성 찬가는 어머니의 가장 순정적인 노래”
일본에 살면서 딸에게 '결혼 상대로 일본 사람은 절대 안 돼'라고 말하던 조선인 부부가 있었다. 몇 년 후 그 딸은 12살 연하의 '이상한' 일본 남자와 가족이 되면서 네 번째 영화이자 세 번째 가족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완성하게 된다.
아버지 량공선 씨는 북송 사업*으로 세 아들을 모두 북에 보낸 열혈 조총련 활동가였다. 아버지만큼이나 열렬하게 남을 혐오하고 북을 사랑한 어머니 강정희 씨도 군말 없이 아들들을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냈다. 막내딸인 양영희 감독은 오빠들과 생이별할 때 고작 6살의 나이라 북송을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 곁에 홀로 남은 외동딸이 되어, 오빠들의 부재를 영화에 담아 북한 입국 금지 처분을 받는 배반자, 반동분자, 아나키스트로 자라난다.
북으로 간 아들 중 음악을 사랑했던 첫째 오빠 건오는 빼앗긴 음악을 그리워하며 말라가다 결국 젊은 나이에 죽었다. 아버지도 치매와 뇌경색을 앓다가 2009년 작고하셨고 북녘땅에 묻혔다(방북 금지 조치된 양영희 감독은 아직 한 번도 아버지 묘를 찾아가 보지 못했다). 그 후 노인연금으로 생활하는 어머니는 북에 사는 아들들, 부모와 동생들, 그들이 새로 만든 가족의 생활이 그리 풍족하지 못하다는 걸 잘 알기에, 없는 돈을 끌어모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먹고 입을 것을 보낸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여전히 "수령님의 은혜로" 북의 가족들이 편안히 살고 있다고 말하고, 저녁마다 김일성 찬가를 부른다. 오래된 찬송가 책처럼 너덜너덜해진 노래집을 앞에 둔 50살의 영희는 "북한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돈을 줄여야 한다"고, 꾼 돈을 먼저 갚고 어머니 생활을 먼저 챙기는 게 맞다고 화를 내야만 하는 입장이다.
그런 어머니가 갑자기 제주 4·3 당시 경험한 일을 풀어놓기 시작했고, 치매가 악화되었다. 어머니는 북에 남았거나 그곳에서 이미 죽은 지 오래인 가족들을 찾으며 망상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영화는 여기에서 시작해 여기에서 끝난다.
고작 2대뿐인 가족사가 이다지 격하게 비극적이고 신산할 수 있나 싶지만 자이니치 가정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연일 테다. 탈북자를 인터뷰하며 '뿌리 뽑힌 자'끼리 공유하는 동질감을 느꼈다는 재일조선인 활동가 신숙옥 씨의 언어를 빌리자면, '너무나 익숙한 지옥'.
최근에는 <파친코>처럼 무려 미국 자본으로 자이니치 가족 4대의 드라마를 만드는 놀라운 일도 일어났지만, 공적 공간에서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서사화는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해방 후 '내지'의 조선인들이 일방적으로 부여받았던 일본 국적을 역시 일방적으로 뺏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그리 많지 않다. 1945년 원폭 투하로 조선인 최소 2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피폭당한 직후였다. 강제 징집되었다가 부상병으로 돌아오거나 아예 실종자가 되거나, 피폭되거나 맞아 죽거나 강간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더러운 거리에 모여 사는 짐승 취급을 받던 '국적만 일본인'이 바닥인 줄 알았더니 바닥 밑의 진짜 바닥이 또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법으로도 보호해 줄 필요가 없어진 무국적자가 된 조선인들은 법 바깥의 벌거벗은 인간, 호모 사케르가 되어 이 나라 저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다.
혼란 와중에 일본에 잔류하기를 선택한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겐 여전히 "쓰레기 같은 존재"였고 사회주의 사상 일체를 배척하던 남한에서는 "버려지고 잊힌 존재"였기에, 그중 다수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에 기대어 한민족끼리의 끈끈한 동질감을 자존의 원천으로 삼는다. 동무끼리 돕고 살며, 아이들을 같은 조선인 학교에 보내 민족정신을 기르게 하고, 결혼도 무조건 '일본놈이나 미국놈이 아닌' 조선인끼리만 하는 것이다.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단단히 얽혀 씨족 사회를 방불케 하는 이 '북조선 국적의 재일교포' 군집은 한때 남한을 국적으로 선택한 재일교포들보다 훨씬 강력한 연대를 자랑했겠지만, 거꾸로 그것은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이들의 마지막 기대였던 셈이다. 조국 없는 사람들의 절박한 정치화.
*재일 조선인 북송사업(在日朝鮮人北送事業)은 1950년대 중후반~1984년 사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 일본 정부 간 긴밀한 협력에 의해 진행된 재일 동포의 북송 사건이다. 북한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이렇게 일본에서 북송되어 정착하게 된 재일 동포들을 '째포'라며 비하적 표현을 하기도 하였으나, 정작 재일 동포들의 재력은 북한 사람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북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 숙청을 당하거나 북한 사회의 주변인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출처: 위키백과 '재일 조선인 북송사업' 항목)
자이니치 2세대인 양영희 감독님 세대부터는 그런 '연대'의 강제성을 거부하고 아나키스트로 살아가기를 선언한 듯하다. (이 코스모폴리탄 후세대의 문화적 유산 중 우리 세대가 알 만한 작품이라면 아마 소설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좀비즈 시리즈와 <Go!>, 시네콰논 이봉우 프로듀서의 <박치기!> 정도. 십 대 때의 내가 가네시로 가즈키 소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땐 전공이나 희망 진로 선택도 그 책들로 인해 결정될 정도였는데ㅎㅎ) 부모 세대의 강경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발해 가족을 떠났다가 돌아왔다는 양영희 감독이 그간 내놓은 극영화 <가족의 나라>,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에 이어 '평양 3부작'의 완결편이라고 칭해도 좋을 영화가 바로 <수프와 이데올로기>다.
제삼자인 내가 앞서 장황하게 서술한 자이니치 가족들의 고난이 당사자에겐 '너무나 익숙한 지옥'인 탓일까? 전작 이후 10년의 세월이 걸려 세상에 나온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그런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걸 말해야 한다는 듯,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래를 제외하곤 상쾌하게 많은 것을 생략한 양영희 감독은 곧바로 일본인 남편 아라이 카오루 씨를 어머니에게 소개하는 날의 '코미디'에 집중한다. 무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예의를 갖추기 위해 정장을 입고 나타난 연하의 예비 남편이 새빨간 미키마우스 티셔츠에 반바지로 환복하는 장면. '일본인은 절대 안 돼'라더니 일본인 예비 사위를 위해 씨암탉을 사 와서 마늘 40알을 집어넣고 백숙을 끓인 어머니. 집의 가장 높은 곳에 걸린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화와 그것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어머니. 한복을 입고 찍은 웨딩 사진에 '입만 안 열면 조선인으로 보이겠다'라며, 어느새 짧아진 말투로 편하게 장난치고 웃으며 떠드는 장모와 사위.
그렇게 유쾌하고 정답고 깔끔한 시간 사이사이로 어머니의 병환이 문득 침입하고, 점점 흐릿해지는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떠내려가는 4·3 피해 경험을 건져내는 것이 양영희 감독의 주요 과제가 된다. 어머니가 그토록 남한을 혐오하고 북송사업으로 생때같은 아들 셋을 모두 보낼 정도로 북조선'만'을 믿게 된 이유. 어머니의 비이성적인 공포감, 혐오감, 침묵의 원천. 4·3 당시 약혼자와 외가 식구들을 모두 잃고 어린 두 동생의 손을 잡고 밀항해 간신히 생존한 어머니의 가장 깊은 상처, 가장 순정적인 믿음 -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양영희 감독 역시 가족이라는 오래된 응어리의 무게를 조금 덜어낸 것 같았다.
2018년 그들은 북한 국적인 어머니의 임시 여권(카오루상이 "난민 비자 같은 거"라고 표현한)을 받아 드디어 제주로 향했다. 어머니의 기억은 이제 거의 끊어져 약혼자나 가족들의 이름을 떠올리기도 어렵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동네와 인명을 기억해 낸다 한들 희생자 명단에 등록되어 있지 않기 일쑤다.
상계리, 하계리, 조천읍, 송당리. 내게도 익숙한 제주 중산간 지역과 동쪽 해안 동네들의 지명마다 어림잡아 몇백 명씩 늘어선 희생자들의 위패. 그 기록에서도 누락된 어머니 강정희 님의 가족과 지인들. 전혀 모르는 남한의 애국가라도 열심히 따라 부르는 어머니의 모습... 노래를 한다는 일이 그이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그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한반도 이남의 이데올로기와 일본 순혈주의/제국주의를 그렇게나 증오했지만, 그이에겐 역시 노래라는 행위와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는 행위 앞에선 이데올로기도 무망하고 의미 없는 관념이었던 건 아닐까.
<수프와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은 양영희 감독이 '어느 나라에서도 제멋대로 번역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고 한다. 영화에선 총 세 번 닭 수프를 끓이는 장면이 나온다. 카오루가 처음 오사카 집에 찾아온 날 어머니가 끓여주신 백숙. 편한 옷을 입은 카오루와 어머니와 영희 셋이 장을 보고 함께 요리하며 만들어 먹은 백숙. 마지막으로, 기력 없고 아픈 어머니에게 카오루가 직접 끓여드린 백숙. 그들이 그렇게 쌓아간 시간만큼, 가족이 되어간 만큼,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마음) 없인 사람으로 못 산다는 생각을 다시금 꼭꼭 씹어 소화시킨다.
아래는 22/10/23 오후 에무시네마에서 진행된 GV의 (거의) 전문.
원래는 녹취는 혼자만 고이고이 간직하고 특히 재미있거나 감동적인 부분만 공유하려고 했지만... 두 번 세 번 다시 들어도 모든 이야기가 다 유의미하고 재미있었다. 몽땅 다 감독님의 지성과 재치와 마이너리티로서의, 창작자로서의 번뜩이는 센스가 느껴지는 말들이라 한 마디라도 놓치기 아까워졌다.
첫 번째 질문도 두 번째 질문도 감독님의 부모님이 부르신 노래(제주 자랑가, 목포의 눈물, 아리랑, 임진강, 김일성 찬가 등등)에 관한 것. 녹취는 두 번째 질문 중반부터 시작
… 저는 21년간 가족을 찍으면서 단 1초도, 단 한 번도 ‘한 번 더’ 찍는 일을 하지 않았어요. 다시 걸어보라든가 지금 얘기 재밌었으니까 다시 해보라든가, 잘 안 찍혔으니까 한 번 더 해주실래요? 같은 말을 안 했어요. 그걸 한 번이라도 하는 순간에 카메라 받아들이는 사람과 찍는 사람 사이에 믿음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제가 그걸 당하면 불쾌해요. 배우도 아닌데, 돈도 안 주는데.(웃음) 나의 인생을, 사생활을, 화장을 안 한 얼굴을 찍겠다고 했는데 왜 지시를 해? 하고 화가 나기 때문에. 그래서 가족한테라도 ‘한 번 더’ 해보라고 절대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너무 완벽한 타이밍으로 그 노래를 부르시는 거예요. 너무 드라마틱하게 나오잖아요. 이것이 다큐멘터리의 매력이라고 할까요? 감독도 컨트롤을 못하는 순간이 있는. 아주 영화적인. 그 어머니가 옛날에 혼자서 고독하게 북한의 노래를 부르던 어머니의 장면, 또 치매 걸린 어머니가 저하고 거울 앞에서 김일성 노래를 부를 때 그 두 가지 노래가 정말 의미가 깊고, 관객들의 상상력을 많이 동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장면은 책으로 쓰기가 아주 어려워요. 정말 영화답다… 찍으면서, 나도 울고는 있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이렇게 나오시나’. (웃음) 연출한 것도 아닌데 이런 순간이 올까 하고 편집실에서 소름이 끼쳤어요.
치매 걸린 어머니, 90살 된 어머니가 아무 생각 없이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툭 나오는 것이.. 오사카에서 나고 자라셨는데 일본 노래도 아니고, 제주도 노래도 아니고, 김일성의 노래. 어머니의 그.. 청춘이라고 할까, 순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에 열심히 불렀던 그 노래. 어머니가 정말 젊을 때 이데올로기도 정치도 아니고, 무식하다고 하는 사람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정말 하느님처럼, 그걸 믿을 수밖에 살 방법이 없는 정도로 재일교포가 쓰레기 같은 처지였어요 일본에서. 또 남한이 재일교포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안 썼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아주 컸고. 일본에서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고. 식민 시대에는 일본인 취급이고 당연히, 근데 갑자기 일본 국적 박탈당하고 북인지 남인지 선택을 해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부모 고향이나 내 고향인 남(한)을 선택하려고 하면, … 아는 사람들이 유학을 가도 간첩이라고 고문받고 돌아오거나 하는, 그런 한국이 무서운 시대였어요. 70년대까지만 해도 정말 심했어요. 제가 아는 일본 사람도 정말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을 이해하고 싶다는 이유로 한국에 갔는데 ‘조선학교 출신의 친구가 있다’, 그거 하나만으로 잡혔어요. 고문당할 뻔했는데 교회 친구들이 달려가서 경찰서에서 살려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쨌든 그 어머니의 그 노래, 그 장면은 정말 많은 것을 얘기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어머니는 이런 마음으로 불렀다고 내가 단정하면 안 된다고 느껴요. 그건 어머니밖에 모르는 거죠. 또 어머니도 모르는 거죠. 그래서 정말 무서운데, 제가 쓴 각본이 아니기 때문에. 찍은 후에 편집을 위한 구성을 생각했지 처음부터 엄마한테 노래를 시킨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장면에서 어머니의 노래에 대한 것은 전 추측밖에 못한다고 생각해요.
저희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나서 42년에 열다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오셨어요. 아버지가 앞부분에서 ‘제주 자랑가’ 불렀는데, 아버지는 한 잔 하시면 맨 처음 김일성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좀 더 취하면 제주 자랑가, 목포의 눈물, 그런 옛날 한국 가요곡을 많이 부르셨어요. 그 후는 임진강 부르면서 울어요. 그것이 완전히 (아버지의) 바탕이라서. 우리 집에서는 매일 식탁에서 아버지 콘서트가 벌어지고 어머니는 손뼉 쳐주고 나는 ‘아이고’ 하는 그런 가족이었는데….
어머니도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치매가 시작되고 나서는 북한 노래를 전혀 안 부르게 되셨어요. 이건 정말 신기했어요. 아버지한테 “아버지, 그 김일성 노래 같이 부를까?” 하고 아무거나 말을 시켜야 한다고 해서 뇌를 움직이도록 시켜도 가만히 있어요. 그런데 목포의 눈물, 아리랑, 제주 자랑가를 부르면 같이 불렀어요. 이렇게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가 되셨지만 그 모습으로 옛날 제주도 노래, 한국 노래만 부르셨어요. 어머니도 치매 걸리니까 그렇게 되어 가실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오히려 김일성 노래만 부르시는 거예요. 나도 정말 깜짝 놀래서, ‘얼마나 이 노래를 많이 불렀을까. 얼마나 스며들었을까…’
어머니가 그렇게 된 이유가 또 있는 거죠. 영화에 안 나오는 이유가 있는데, 어머니 친오빠가 일본 제국군으로서 파병이 되어 전쟁에 갔는데 동남아시아에 가서 안 돌아왔어요. 보통은 전사했다고 하면 몇 월 며칠 어느 섬에서 죽었다 혹은 유품이나 유골이 돌아오거나. 그리고 유족들에게는 정부에서 돈이 나오고 그랬지만 죽었다는 소식도 없고, 유골, 유품은커녕 완전히 무시라고 할까.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오빠는 안 돌아왔어요. 그게 1944년쯤. 어머니가 오사카 폭격으로 제주도 피난을 가기 1년 전쯤.
자기 오빠가 조선인인데 일본 군인의 군복을 입고 동남아 사람을 죽이러 가야 하잖아요. 거기 가는 오빠를 저희 엄마랑 외할머니가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하면서 히노마루(일장기) 깃발을 흔들고, 정말 땅에 이마를 대고 무릎을 꿇어서 절을 하고, 다시 일어나서 히노마루 흔들고 절을 하고, 다시 일어나서 흔들고 절을 하고 그렇게 배웅을 했대요. 그게 얼마나 화가 났는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때 해방 전 일본 지역마다 ‘부인회’가 있었어요. 제일본군국주의 병사들을 혐오하는 말을 한마디라도 해봐라 하고 엄마들끼리 감시하는 부인회. 우리 엄마도 우리 할머니도 그 부인회 말을 들었어야 그 동네에서 살 수 있었어요. 그런 민족적 차별이 한 마디로는 말 못 하는 굴욕이고, 오빠의 목숨까지 빼앗고 연락도 안 주고. 당연히 구청에 갔고 우리 아들이 어떻게 됐느냐 했지만 ‘모른다, 그런 사람 많다’ 하고 상대도 안 해줬대요. 일본이 아무리 나고 자란 나라라고 해도 어떻게 고향이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래서 미군 폭격이 1945년에 있었고 그걸 피해 제주도에 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열다섯 살 난생처음 간 거였어요. 가난한 섬이지만, 오사카에서 갔으니까 상업도시, 공업도시로서 도쿄 다음으로 발전한 도시(거주자)로서 조금 놀랐대요. 이렇게 사는구나 하고 놀랐지만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잘해주셨대요. 그리고 삼촌들이 조금 깨어 있는 사람들이어서 ‘농사 안 지어도 되고, 해녀 안되어도 되고 학교에 가라’ 해주셔서 어머니는 정말 기뻤다고. 학교에 가면서 삼촌들이 집도 주고 음식도 다 날라 주시고, (그래서) 정말 평생 제주도에서 살자고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약혼자도 생기고. 아마 엄마는 진짜 예뻤을 거예요. 그리고 조금 한국말 잘 못하니까, 그런 거 좀.. 예쁜 거 있잖아요(웃음). 오사카 사투리에다 열심히 한국말 배워서 제주도 사투리도 배우고 하는 그런…(ㅋㅋㅋㅋ) ‘오사카에서 하나 처녀 왔어’ 그런 식이었던 것 같은데 들어보니까. 그래서 그 의사 선생님이 와서 따님하고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해서 손만 잡고 데이트를 했답니다. 저희 어머니 저한테 맨날 ‘손만 잡았어!’하고 (웃음).
그 약혼자 이야기도 2009년에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시작을 했어요. 이제 그 이야기를… 그래서 4·3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시작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제 ‘아이고 내가 영화를 두 편 만들었는데… 그 후에 이야기를 하다니. 이제 다큐 끝나려고 하는데 어머니…’ 4·3에 있었다고 하시니까.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을 만들 때는 물어봤어요. “아버지 4·3 아세요? 내가 책을 좀 읽어봐서 제주도 학살을 알게 되었는데”(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제주 출신인 우리 부모가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남한을 부정하고 철저하게 북한을 믿었던 이유에, 일본에서의 차별도 있지만, 이 학살 사건이 역시 관계가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물어보니까 뭐 ‘당연히 제주 출신 사람은 예전 친구나 친척, 희생자가 없는 집이 없다’ 이렇게 대답을 (아버지가) 하셔서. 어머니한테도 “어머니 오사카에서 나고 자랐는데 아세요?” 했더니 엄마가 “몰라”. “엄마 제주도 안 가보셨어요?” 했더니 “아 가본 적 없다”라고 하셨어요. 제주도는 가고 싶으시냐고 하니까 “아 조금 있었다. 조금 살아봤대니까.” “언제?!” “아 그때 그때.. 묻지 마. 잊어버렸어” 그렇게…
그래서 조금 지나고 어머니, 제주도 가본 적 없다고 하다가 살아봤다고 하다가, 왜 제주 이야기 나오면 그러시냐고 하니까 ‘좀 무서운 일이 있었다’고 아주 조금만 얘기해 주시곤. “건드리지 말아라. 차원이 다르게 무서운 일이니까. 지금이라도 말하면 큰일 난다. 오사카 교포들 봐라. 얼마나 경험자가 많은데 아무도 그 얘기 안 하잖아”라고…
그래서 내가 역시 해외 교포랑은 시차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본국에 있는 사람보단 좀 늦죠. 옛날에 자기가 본국에 살았을 때의 정보, 감각이 있어서. 계속 그 본국에 가 있는 사람은 업데이트가 되는데, (어머니는) 특히 조총련 쪽에 갔고 그 후에 한 번도 한국에 안 들어왔으니까 한국의 변화를 실감 못하고. 그래서 제가 어머니한테 ‘어머니, 한국이 정말 변했고 민주화가 됐고 4·3을 인정하고 대통령이 사과하고 연구소가 있고 재단이 있고 평화공원이 있고…’ 쫙 이야기를 드리니까 ‘아, 그렇게 변했나...’ 하면서 점점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러니까 한국이 이렇게 변하지 않았더라면 역시 무서워서 말을 안 하셨을 거예요. 그래서 조금씩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 한번 제주도를 가야지 하니까 그렇지, 그래도 한 번 보고 싶다, 하시고 제가 한국 국적을 얻고 한국에 가기 시작하면서 어머니도 한 번쯤은 서울도 봐야겠네, 이런 말을 하게 되시면서 제가 증언을 찍었어요. 어머니의 증언을 혼자서 한 5년쯤 찍었어요. 토막토막 찍었는데 어머니 증언만 가지고는 장편 영화는 어렵다, 소재가 모자라다는 생각도 했고 증언집 같은 영화는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웃음). 좀 재밌게 만들고 싶은 편이라서 고민하고 있을 때에!
이상한 일본 남자가 나타난 거죠(웃음). 저의 인생에. 나타났어요.
처음 만나고, 제가 쉰두 살 됐을 땐데, 갑자기 3개월 후에 청혼을 하면서 엄마 만나러 간다고, 인사하러 가야겠다는 거예요. 저는 ‘그냥 동거만 하자, 내가 옛날에 한 번 결혼도 이혼도 했고, 당신하고 결혼해서 언제까지 잘 될지도 모르잖아’ 이런 소리 많이 했어요. 엄마 만날 필요 없다고 귀찮다고 했는데. 좀 젊으신데 저보다 훨씬 traditional한 부분이 있어서 엄마한테 꼭 인사를 해야겠대요. 아니 <디어 평양> 스무 번 이상 봤다면서?! 일본 사람 안 된다고 하고 있잖아…(ㅋㅋㅋㅋ) 그런 데를 또 간다는 그 챌린저의 정신은 오케이. 훌륭한데 복잡하게 하지 말자 했는데 그래도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좀 생각하니까…
코미디 같지 않나요?
(김일성) 초상화가 있는 이 크레이지한, eccentric한 재일교포의 집에, ‘일본 사람 안 된다’ 하고 있는데 가고 있는 이 모습을…. 처음에는 솔직히 말하면, 그날까지 찍고 단편으로 하자고 생각했어요. 빨리 끝장내고 싶었어요. 다음 구경하러 가고 싶고 너무 힘들어서, 이제 어머니 증언도 무겁고… 43을 내가 어떻게 영화로 하지, 돈도 없는데… 했는데,
어머니한테 갈 때 당신을 찍고 싶다. 그런데 당신이 찍히는 거 싫으면 당신의 어깨너머로 당신한테 ‘안 돼’ 하는 어머니 얼굴만 찍겠다. 이렇게 해서 약속해서 갔어요. 근데 찍은 것이 그겁니다. 첫날에 그렇게 찍으니까… 오사카 가보니까 어머니가 이제 마늘 까고 계시는 거예요. 어머니 뭐하세요? 했더니 ‘씨암탉이란 거 너 모르지.’ 헉…
“뭐야? 이 사람은 이제 소금을 뿌릴까 김치로 뺨을 때릴까 하고 (한국 드라마 너무 많이 봐서 그래요) 걱정하고 있는데 어머니 환영하시는 거예요?!”
“야 너 내가 죽으면 너 혼자 일본에 남는데, 받아준다는 사람 잘 맞이해야지.”
아마 ‘이 사람 놓치면 다음은 없다’ 생각하신 거 같아요(웃음). 그래서 그날 이렇게 찍으니까, 와 이거 너무 감동적이다. 정말 불필요한 말 안 하고 서로가. 외교관처럼. 평화롭게. 가족이 되려고 하는 이 모습… 나 혼자 무슨 이.. 바보같이 나 혼자 어렵구나. 이 사람들 진짜 어른이구나 생각을 했어요. 이러면 카오루가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도 넣으면 이제까지 없는 저의 다큐 하나 생기고, 4·3도 좀 다뤄보고, 그래야 <디어 평양>을 끝낼 수 있구나. 그렇게 생각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 관객 질문 3 : 삼계탕 만드는 방법… 대추, 마늘 40알 넣고 물에다가는 아무것도 안 넣으세요?
아무것도 안 넣어요. 화학조미료도 없고 멸치도 안 넣고 아무것도 안 넣어요. 정말 그것만. 오늘 밤에 만드시는 거죠?
일본 사람들이, 올해 6월에 개봉했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고려 인삼도 처음 사보고 대추도 사고 마늘 그만큼 넣은 음식을 집에서 처음 만들었다고, whole chicken도 처음 샀다고 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많이 sns에 어머니의 수프를 만들었다고 올려주셨어요.
카오루, 한 마디 하겠어요? 질문 있으신 분?
= 관객 질문 4 : 카오루 님께 질문 있는데요. 상처라고 할까, 어떤 사건을 계속 마주하게 되고 그걸 드러내고 표현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시면서 굉장히 다정하고 따뜻하게 (해주셔서) 저도 카오루 님 같은 입장에서 보게 된 것 같다. 그 모습을 함께 겪으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는지?
(통역) 어머니가 정말 고생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으셔서 걱정도 많았는데 제가 영희와 어머니의 인생에 등장한 후부터는 어머니가 많이 웃으셔야 한다, 어머니께 웃음을 많이 드려야 한다. 재밌게 많이 즐기자고 생각했답니다.
정말 솔직하게… 아 나는 지금 놀래가지고. (감독님 카오루상 답변 듣고 통역 전에 울먹거리심..ㅠㅠ)
두 편의 다큐 만든 후에 제가 좀 번아웃 와서 아주 우울했어요. 기력도 다 사라지고 북한에 대해서 너무 걱정도 하고, 너무 가난하고. 너무 관객은 안 오고. 근데 해외에서나 국내에서나 상만 많이 받고, <가족의 나라> 때도 그랬는데. 하도 경제적으로 어렵기도 하고 어머니를 잘 모셔드리고 싶은데 돈 때문에 싸우고, 또 ‘내가 더 잘 벌 수 있으면’ 이런 생각도 하고. 우울증 아주 심한 시기가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조금 친구들이 많이 도와줘서 괜찮게 되어가면서 <가족의 나라>를 찍었어요.
그 후에 이 사람하고 만났을 때 저는 ‘자기 같은 사람이랑 있으면 큰일 난다, 친구쯤으로 하자. 여자친구 그런 거 하지 말고. 그냥 친구로 있으면 되지 않나’ 했는데. 가족은 북한에 있지, (집에 김일성) 초상화가 있지, 당신은 나를 영화제 레드 카펫 걷는 감독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정말 나의 예금통장, 은행 계좌 보면 놀랄 거라고 그런 얘기 많이 했어요. 우리 가족 가까이 오면 큰일 난다고 (웃음). 그럼 이 사람은 또 자기 가족이 얼마나 미친 바보 같은 가족인가 계속 얘기해서,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 좋은 대학이나 양반 집안이다 이런 거보다 오히려 얼마나 미친 가족인가에 대해서만 계속 서로에게 얘기했어요. 이거라도 되냐고. 그래서 서로가 이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 이제 감춰야 하는 게 없을 정도로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시작을 했어요. 그래서 아마도 면역이 처음부터 있었는지, 여러 가지 일을 맞이해도 놀라지도 않았고요, 정말 우리 어머니에게 끝까지 잘해줬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올해 1월에 돌아가셨어요. 영화는 못 보셨는데 마지막에 뇌경색되신 후에 영화 음악, <헤어질 결심>도 하신 조영욱 영화감독이 하신 영화 음악을 이어폰으로 들려드리니까, 반신마비였다가 굳어지고 있는 손도 발도 이렇게 움직였어요. 멜로디에 맞추고 양쪽 발을 움직이시고 손도 움직이셔서 의사 간호사들도 정말 놀랐는데.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영화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카오루가 등장한 덕분도 크고. 총예산의 반을 내준 프로듀서로서도.
이 사람은 회사원이 아니라 프리랜서 기자, 기자가 아니라 아무거나 글 쓰는 사람. 펜네임이 서른 개쯤 있어요.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싶다는 욕망이 없는 사람이에요. 우린 정반대예요. 서른 개쯤의 펜네임을 바꿔가면서 남의 자서전도 써주고, 그런 라이팅도 하고 그렇게 해서 사는 사람인데. 6년간 나한테 착취를 당했습니다(웃음). 이 영화를 위해서. 그렇게 해서 완성을 했습니다.